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쟁이캘리 Oct 06. 2023

'맛있겠다' 말하는 습관

허기진 마음에 반가운 소식


  나에게는 지독한 습관이 하나 있다. 눈앞에 음식이 보이면 반사적으로 맛있겠다는 말을 못 참고 내뱉는다는 것.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워낙 자주 쓰는 말이다 보니 아빠는 어떤 음식이든 보기만 하면 나를 따라 맛있겠다고 말하며 나를 보며 웃는다. 진짜 맛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뭐가 그리 재미있을까 싶은데, 이제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내게 사진을 찍어 메시지를 보내면서 나를 따라 맛있겠다고 말한다. 얼마 전 퇴근길 전화가 걸려 와 이번에는 어떤 음식을 자랑하려나 싶던 찰나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아빠가 보내오는 카톡 메시지




    엄마가 심근경색으로 급히 병원에 갔는데 보호자가 없어서 수술을 못 하고 있다며 병원으로 와 달라는 연락이었다. 아빠와 오빠는 일 때문에 발이 묶여 움직일 수 없다는 말에, 부리나케 병원으로 향했다. 도착했을 때 다행히도 엄마는 수술실로 들어간 후였다. 며칠 전부터 가슴이 답답하고 소화가 안 된다며 친구와 병원에 다녀오겠다던 사람이 당장 수술해야 한다는 말에 걱정된 아빠가 업무를 제쳐두고 달려온 덕분이었다.


  병원 가는 길동무가 되어 주었던 엄마 친구분은 어느새 훌쩍 자란 나를 반기며 이제 어른이 다 됐다며, 많이 놀랐을 텐데 같이 기다려보자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로 답했지만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보통 심근경색은 급성으로 오는 경우가 많아 병원에 오기 전에 운명하기도 하는 무서운 병인데, 그나마 천운이라는 말을 듣는 동안에도 시선은 수술실로 향했다.     


  삼십여 년간 엄마는 나의 영락없는 보호자였다. 한 번도 그 자리를 비운 적 없는데 별안간 내가 보호자가 될 나이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니 지나온 세월이 쏜살같았다. 인생은 육십부터다, 이제는 백세시대다 해도 부모님의 나이가 든 것은 부정할 수 없고 아무리 강건하던 사람도 시간이 흐르면 모두 쇠한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닿았다. 단숨에 흘러간 시간에 정신마저 아득해지던 찰나, 의사가 나와서 수술 경과를 알렸다.     



  막힌 혈관의 너비가 좁아 관을 삽입하지 못하고 풍선으로 벌리는 수술을 했고 그 과정에서 장기 내부 혈관이 터져 출혈이 발생해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자연히 출혈이 멈추면 다행이지만 만일 그렇지 않으면 위독해질 수 있어서 오늘 밤이 고비란다. 마음이 쓰여 서성이니 코로나 감염 위험 때문에 면회는 불가하다며 집으로 돌아가, 병원에서 따로 연락이 갈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겨우 발길을 돌렸다.     


  눈치 없이 울리는 배꼽시계 소리에 밥 먹고 헤어지자며 근처 밥집으로 향했다. 평소 엄마가 즐겨 먹던 아귀찜을 먹으러 갔는데, 푸짐하게 차려진 한 상을 보고도 맛있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되려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인데 빼놓고 먹으려니 마음이 안 좋다는 말로 잘 먹겠다는 인사를 대신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현실에 먹고 힘내서 기다리자며 기운 내 밥을 먹으면서 알았다. ‘맛있겠다’라는 말은 단순한 습관이 아닌 평온한 일상이 기둥처럼 건재할 때 마음껏 감탄할 수 있는 행복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을.     


  사는 동안 지금껏 수많은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맛있겠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내 곁에서 든든한 보호자의 역할을 감내한 부모님의 은혜나 다름없었다. 그 덕분에 순진무구한 어린 시절 습관을 고스란히 안고 자랐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행복을 입 밖으로 뱉고야 마는 성정을 얻은 덕분에, 행복은 기어코 표현하고 보는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음을 알았다.


그 귀중한 것을 깨달았는데, 이 마음을 받아줄 대상이 없다니 헛헛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별일 없을 테니 집에 가 있으라는 아빠의 말을 뒤로하고 돌아온 다음 날. 다행히 출혈이 멈췄고 며칠 상태를 지켜보고 괜찮으면 퇴원해도 되겠다는 말에 마음이 놓였다. 그날 중환자실 인터폰으로 연락해 익숙한 엄마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온전히 안도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엄마는 건강히 퇴원했고 진료 방식도 통원 치료로 변경되었다. 온 가족이 모여 무사 귀가를 축하하기 위해 저녁 외식을 했는데, 엄마는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주변 사람들 모두 자신이 죽는 줄 알았다며 놀란 마음에 눈시울을 붉혔고, 또 다른 누군가는 평소에 여기저기 베푼 덕에 새 삶을 선물 받은 거라며 몸 건강히 더 오래오래 살라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그 말에, 잘 다녀왔다고 진짜 새 삶을 축하한다며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밀린 담소를 나누는 동안 눈앞에 한 상 가득 음식이 차려졌다. 근심이 사라진 맑게 갠 얼굴로 웃다가, 맞은편에 앉은 아빠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저 단순한 감탄사가 아닌 행복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깨우친, 며칠간 속을 채워도 허기진 마음에 다시 행복이 내 눈앞에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나 다름없는 그 말을 외쳤다.     



아, 맛있겠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새 흉터가 생겼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