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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Jul 16. 2023

새 흉터가 생겼다

드러낼 용기도 함께 생겼다

  

  선량한 목소리로 나를 속인 목소리의 실체가 보이스피싱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 경찰에 신고도 했고 날이 밝자마자 핸드폰도, 번호도 바꿨지만 여전히 후유증은 남았다. 조서를 쓸 때 말고는 보이스피싱을 당했다는 말조차 꺼내기 어려워 습관처럼 울었다. 눈 감으면 그때의 악몽이 꿈으로 재현되었다. 잠에서 깨면 이미 끝난 일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다가도 돌아서면 악몽이 떠올랐다.



  진정 나의 억울함을 공감하며 도와주는 줄 알았던 금융감독원 사칭 여직원. 그녀는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며, 법원 출석 대신 약식수사로 전환하도록 요청했다. 그녀는 나와 통화하다가 갑자기 불리하게 흘러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며 자산 가압류신청까지 불사하고 도왔다. 상황은 제대로 인지할 새 없이 빠르게 흘렀다.

 


검사는 차주에 나를 소환조사할 계획이었는데, 일면식도 없는 그녀가 돕는 것을 두고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며 도리어 나를 의심했다. 이 사건은 금융기관 직원이 연루된 사건으로 특정하기 어렵지만 다수의 고위관리자와도 연계돼 있어 비밀수사 중이었는데, 당신 때문에 사건이 알려져 수사가 어려워지면 책임질 거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럼 애초에 전화 회신을 주지 않고 무시했으면 될 일 아닌가 싶어 의심스러웠다. 내게 벌어지는 상황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다 오히려 그 거대한 조직이 짜놓은 시나리오에 완벽히 속았다. 수화기너머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꼭두각시 노릇하다 빈털터리가 되었다.



 

사고 직후의 나


  겨우 정신을 차렸을 무렵, 어느덧 새해가 밝았고 집에는 미리 찍어둔 청첩장이 도착했다. 계획대로라면 남은 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부지런히 지인들을 만나 결혼 소식을 전하고 식사 대접을 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식사값이 있을 리 만무했고 겨우 자금을 마련하더라도,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결혼 소식을 전해야 하는 그 시간마저 곤욕이었다.



과연 무사히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짧은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나보다 연하인 지금의 남편에게 여태 모아둔 돈이 제법 몸집을 불렸으니 걱정 말라했었다. 둘 다 젊으니 시작은 작게 하고 둘이 힘 합쳐 잘 꾸려보자고 했는데, 이 모든 걸 내 손으로 망쳤다. 결국 주례나 축사 등 결혼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에게만 인사를 전했고 그 외에는 결혼 소식조차 제대로 알리지도 못했다.  



  하루아침에 불어난 막대한 빚을 갚기 위해 결혼자금으로 쓰려고 모아둔 적금을 모두 해지했다. 그래도 갚지 못하고 남은 빚은 다달이 이자로 빠져나간다고 했다. 적금 만기를 넉 달 앞두고 마주한 현실에 잠 못 이루던 새벽, 참던 숨 토해내듯 내게 닥친 불행을 이야기했던 날. 아빠는 동트기 전, 집으로 달려와 군말 없이 나의 신변정리를 도왔다. 재작년  환갑을 넘긴 아빠가 나를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져 몰래 눈물을 훔쳤다.     



조금만 더 의심했더라면, 조심했더라면…. 괜찮은 순간은 잠깐이고 이미 끝나버린 악몽에 대고 끝없이 화살을 겨눴다. 내 잘못으로 모두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생각에 먹고 자는 일조차 사치로 느껴졌다. 아무도 나에게 뭐라 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이미 그 말을 들은 듯 주눅이 들었다.



  하필 사고를 당한 장소가 집이라서 눈길 닿는 곳마다 그날의 기억이 수없이 되살아났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속아 스스로를 불행으로 밀어 넣었다는 죄책감. 그 감정을 얼른 털어내지 않으면 영영 집에서 편히 쉴 수 없을 듯했다. 그래서 지금의 남편에게 잠시라도 좋으니 주말 동안 어디든 다녀오자고 했고 소식을 듣고 걱정하던 예비 시어머니 댁으로 갔다.    



  어머니는 고생했다는 외마디 말과 함께 나를 꼭 안아주셨고 따뜻한 밥 한상을 내어 주셨다. 사고 후 꼬박 일주일 만에 제대로 먹는 첫 끼였다. 지나고 보니 지금의 남편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평소와 같이 대했다. 여느 때처럼 자기 일상을 내게 나눴고 장난을 치고 농담을 했다. 가끔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올 때가 있었는데, 잠깐이지만 거짓말처럼 모든 것을 잊고 환기시키는 듯했다.


 


당시 내가 뽑았던 단어 카드


고백하건대, 함께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복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에 속아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고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남들은 사고라고 했지만 스스로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죄스러운 마음에 내 존재마저 하찮아지는 듯했다. 차라리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무시했더라면 아무 일 없이 지나갔을 일련의 사건들이 파편처럼 떠올라 폐부를 찌르는 기분이었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지옥을 살던 나에게, 침묵으로 곁을 지켜준 사람들의 온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 내어 살아보자는 응원 같았다. 입을 꾹 다물고 하루에도 수백 번씩 자책하며 굳게 걸어 잠갔던 마음을 다시 열 수 있도록 돕는 힘이었다.



사고를 당하기 전과 후, 전혀 다를 것 없이 대하는 사람들 덕분에 빠르게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일로 정신 차리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사실이 엄청난 위로였다. 설사 잠깐 흔들렸더라도, 우리는 원래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준비되면 언제든 돌아오라는 신호 같았다. 덕분에 땅에 지진이 난 듯 흔들렸고 여진 또한 상당했지만 금세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긴 터널 같았던 이 시기를 겨우 끝내고 나와 평소와 다름없이 대해주는 당신이 큰 도움이었다며 감사를 전했을 때. 가까운 지인이 나에게 물었다.   



  ”나무들은 가지가 부러졌을 때
어떻게 하는 줄 알아? “



갑자기 웬 나무 이야기인가 싶겠지만, 자신 또한 생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가까이 지내는 한 분이 이 물음을 던지고는 한참 뒤 이렇게 답했다고 했다. 그저 주어진 일상을 그대로 살아낸다고. 부러진 가지는 부러진대로 하강하고 그 빈자리는 또 다른 튼튼한 가지가 채운다고 했다. 그러니 살면서 마주하는 모든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할 것 없고 이 또한 지나간다고 했단다. 어렵겠지만 그래도 일상을 살라고. 그러다 보면 나무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잘 살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처음 보이스피싱을 당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도대체 어떤 전생을 살면 이렇게 남을 등치는 일로 돈벌이를 하며 살까 의문이 들었다. 나를 속인 금융감독원 과장은 생후 3개월이 된 딸아이의 엄마라고 했고 내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눈물 머금은 목소리로 나의 억울함을 밝힐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었다. 또한 내게 전화해 당신이 개인정보 관리를 소홀히 한 것 때문에 목을 매 자살한 남자의 비참한 최후를 전하며, 자신 또한 곧 태어날 아들의 아빠가 될 사람으로서 수사에 임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그들의 시나리오 속 한 대목에 불과했다. 나만 바보같이 그들의 치밀한 계획에 속아 손에 쥔 것들을 몽땅 잃었다는 생각에 골몰해 스스로를 마음속 감옥에 가둬두고 있을 때. 예비 시어머니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세상은 원래 속임수 투성이야.”



  그 말이 내게 너무도 큰 위안이었다. 지금껏 장애를 가진 채 삶을 살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수많은 말들과 싸워온 삶이었다. 이제 겨우 그 허상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긍정하며 결혼이라는 새 출발을 앞둔 나에게 이 또한 그동안 지나온 터널 중 하나라고 생각하니 별안간 내게 닥친 사고가 작게 느껴졌다. 비록 여전히 그때 잃은 돈은 한 푼도 찾지 못했고 오히려 빚만 불어, 그때보다 경제적으로는 더욱 가난해졌지만 마음만은 더 이상 감옥을 살지 않을 수 있었다.



나에게 온 불행을 인정하고 다시금 긍정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들었고 여전히 그날의 생채기는 흉터처럼 남아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꺼내놓기로 용기를 내며 한 자 한 자 글로 옮기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지금도 칠삭둥이 미숙아로 뇌성마비를 앓으며 양쪽 종아리에 난 수술자국이 선명하지만, 이제는 그 흉터로부터 자유로워져 남들에게 드러내는 것이 더는 창피하지 않고 도리어 그 시절의 글들이 누군가에게 용기로 읽히는 것처럼. 이 불행으로 얻은 흉터 또한 언젠가는 또 다른 누군가와 함께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소중한 계기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들었고 그간의 시간을 담아내는 이 기록 또한 수려하지도 자랑할만한 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살고 그 삶을 바탕으로 여전히 쓰는 사람으로 있으련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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