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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Jun 12. 2023

목소리에 속아 재산을 잃었다

나만 진심이었지 또…


   아주 오랜만에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머리 위로 불운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눈앞이 캄캄해지던 날에도 기록하기를 멈춘 적 없건만, 어느덧 펜을 놓은 지 반년이 지났다. 몇 번이고 쓰기 위해 애써 봤지만 번번이 빈 문서만 남겼다. 그간의 공백을 채우려니 마음이 감개무량하다.




올해 초 나는 목소리에 속아 재산을 잃었다. 시작은 어느 날 갑자기 알지도 못하는 쇼핑몰에서 해외직구 결제승인 문자를 받으면서부터였다. 평소라면 무시했을 테지만, 당시 결혼을 앞두고 목돈이 숭숭 빠지던 때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고객센터에 연락해 내가 구매한 것이 아니라며 승인취소를 요청했다. 상담사는 일을 처리해주고 나서 개인정보 도용이 의심되니 금융감독원에 연락해 자산보호 신청하기를 권했다. 안 그래도 지출이 많은 시기라 또 다른 피해를 볼까 봐 잘 마무리 지을 심산으로 시키는 대로 했다.



  진짜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자산보호를 위해 내 명의로 된 은행권 계좌를 확인하는 중에 누군가 명의를 도용해 대포통장을 만든 정황이 포착됐다는 것이다. 그 통장을 통해 해외로 빠져나간 금액만 몇십억에 달한다며 해당 계좌는 형사사건으로 수사 중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외의 정보는 개인정보라 열람이 불가하니 직접 법원을 방문하거나 연락해 보는 것이 좋겠다며 사건 번호를 일러줬다.



도무지 믿을 수 없어 법원에 전화해 사건번호 조회를 요청했는데 정말 사건번호와 금융감독원에서 일러준 검사가 실재했다. 나중에 경찰서에 신고하서야 쇼핑몰부터 금융감독원 직원, 법원 민원실, 금융감독위원회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 통속이 되어 나를 속였다는 것과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어도 ‘강제 수발신’으로 원하는 전화를 걸거나 당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정말 꿈에도 모르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야말로 글로 담기 어려운 수 없는 일들이 부지불식간에 벌어졌다. 어쩌면 결혼 전에 큰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지금의 남편에게는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자초지종을 나눴고 그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누명을 쓴 거라는 생각에 다 잘 될 거라고 믿었다.


그 후 이튿날 예비 남편의 외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그가 며칠간 지방으로 떠났다. 공교롭게 도 그가 부재한 사이 모든 일이 가속페달을 밟은 듯 생각할 새도 없이 빠르게 펼쳐졌다.


  오늘내일하시던 외할아버지의 상태가 호전돼 서울로 돌아온 늦은 밤, 거실을 청소하던 그가 내가 숨겨둔 현금뭉치를 발견하고 나를 차에 태워 경찰서로 달릴 때까지도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빈털터리였다. 십여 년 간 땀 흘려 모은 재산이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하루아침에 말도 안 되는 빚을 불렸다. 늦은 밤부터 새벽녘까지 사건 진술서를 쓰던 날. 경찰은 나에게 일어난 일을 ‘보이스피싱’이라는 단 한마디 말로 정리했다.


  정말 그들에게 완벽히 속았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피해 금액을 읊조리고 있을 때. 그래도 먼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남자친구 덕분에 이쯤에서 끝난 거라며, 어느 경제부 기자는 보이스피싱 예방 기사를 쓰고 난 이튿날 일을 당해 몇 억을 잃었다며 그보다는 나은 거라는 쓰라린 위로를 덧붙였다. 어쩌면 잃어버린 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단 몇 시간 만에 해외로 넘어가 추적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에, 일말의 불씨마저 꺼졌다.


  피의자 몽타주와 소유하고 있던 증거자료를 넘기고 나서 모든 사건 진술이 끝났다. 철저하게  훈련된 각본대로 읊조린 누군가의 목소리에 완벽하게 속고 나니 호졸근한 현실만 남았다. 모든 일은 당신의 잘못도 아니고 그저 운이 나빴던 것뿐이라며 절대로 자책하지 말라는 경찰관의 마지막 당부와 함께 밖을 나섰다. 지금의 남편도, 가족도, 그 누구도 나를 탓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자유로울 리 없었다. 당장 석 달 뒤 결혼을 앞두고 그 목소리에 속아 내 손으로 모든 것을 다 망쳐버렸다는 생각에 편히 먹을 수도 누울 수도 먹을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반년이 지난 지금, 드라마를 보다가 아주 우연히 내게 온 불행의 이유를 알았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의외의 통증을 견디는 일이었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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