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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Nov 21. 2023

아빠는 한 번도, 감기에 걸린 적 없다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다.


  아빠가 몸이 아파 일을 거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 흔한 감기 한 번 걸린 적도 없었다. 가끔 술병이 나서 평소보다 늦잠 잔 적은 있어도 그 때문에 지각하거나 일을 쉰 적이 없었다. 어릴 적 세상에서 제일 잘 생겼다 생각했던 아빠는 어느덧 환갑을 넘겼고 제 나이보다 어리게 보던 얼굴에 세월의 주름이 졌다. 나중에 크면 꼭 아빠랑 결혼하겠다며 떼쓰던 나도 훌쩍 자라 어른이 되었고 비혼을 선언하며 부모님과 반려견까지 넷이 모여  살자고 했었는데, 벌써 결혼한 지 반년이 지났다.


 

  한 집에 살면서 매일 보던 엄마 아빠의 얼굴은 보기 어려워졌고 전에 없던 영상통화 횟수가 늘었다. 밥은 잘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시시콜콜한 안부를 묻는 일이 많아졌다. 생애 첫 독립을 선언하며 자취를 했을 때와 다르게 결혼하고 나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틋함이 생긴 듯 자주 부모님이 그리워졌다. 장성한 어른이 되어 새로운 가정도 꾸렸으니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생각에, 자주 연락하지는 않지만 속마음은 그랬다.    

   



  얼마 전, 퇴근 후 쉬고 있을 때 아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와 똑같이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아빠는 업무 때문에 한 달간 지방에서 지낼 예정이라는 근황을 전했다. 또 며칠 새 날이 많이 추워졌으니 감기 걸리지 않게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는 말도 덧붙였다. 내가 아빠도 감기 조심하고 따뜻하게 입으라는 말로 화답하자 아빠는 알아서 잘 챙겨 먹고 잘 자고 따뜻한 옷도 다 챙겨 와서 괜찮다며 나의 걱정을 일축했다. 자신은 감기 한 번 앓은 적 없고 아프지 않도록 알아서 조심하고 있으니 네 몸만 잘 챙기면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바깥에 나갈 때도 차 조심하라고 했다.    



  찻길 건널 때 손 번쩍 들고 좌우를 살피며 조심히 건너라는 말만 안 했지, 어릴 적 귀가 닳게 들었던 말들과 똑 닮아 있었다. 자식은 어른이 되어도 부모 눈에는 평생 아기라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아주 잠깐 혹여나 넘어져 크게 다칠까 염려할 수밖에 없는 핸디캡을 타고나서 걱정 말라고 큰소리칠 수 없는 현실에 마음이 쓰리기도 했지만, 여전히 감기 한 번 걸린 적 없는 건강한 아빠라서 감사했다. 서로 웃으면서 통화할 수 있다는 사실에 느닷없이 울컥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아빠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우리 딸, 사랑해'라고 말했다. 일순간 깜빡이 없이 불쑥 들어온 애정표현에 눈시울을 붉혔다. 학창 시절 다른 집 아빠들과 다르게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것이 섭섭해했던 기억이 선명한데…. 말속에 눌러 담은 진심이 느껴져 바로 말을 잊지 못했다. 가끔 손으로 하트를 만들어 장난스럽게 마음을 전해온 적은 있었지만, 문자 그대로 전해져 오는 말의 무게에 철없이 투덜거리던 지난 시간 속의 내가 부끄러웠다.



  우리 아빠도 사랑한다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구나. 생경한 감정에 놀랐다가, 한 집에서 부대끼며 살았던 오랜 날 동안 아빠가 건넸던 사랑의 언어가 주마등처럼 스쳤다. 한창 돼지 저금통 배 불리는 재미에 빠졌을 때 퇴근길마다 오백 원 짜리 동전을 한가득 챙겨 왔던 것부터, 술만 마시면 빵집에 들러 내가 좋아하는 빵을 사들고 왔던 것, 편도로 두 시간 먼 출퇴근길이 고될까 봐 시간 날 때마다 데려다주던 것까지. 셀 수 없이 많은 기억이 사랑한다는 말을 확증하듯 연이어 떠올랐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빠의 목소리에서 취기가 살짝 느껴졌다. 주(酒)님 덕분에 이렇게 말할 용기가 난 것일까. 궁금해지던 찰나 앞으로도 아빠가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오래도록 으스대도 좋으니까 앞으로도 감기 한 번 걸리는 일 없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리던 몸과 마음이 자라고 독립심을 기르고 새로운 가정을 꾸려 건강한 어른이 되는 것은 좋았지만, 그와 반비례해 점점 쇠하는 엄마와 아빠를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더 아프게 다가왔다. 그러니 부디 쇠하는 시기가 더디 오기를 기도했다.



  멋지게 용기 내 고백한 아빠에게 나도 사랑한다고 말했다. 아빠는 멋쩍게 웃으며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다며 수화기를 오래 붙들게 해 미안하다고 했다. 고작 십여 분 넘긴 통화였는데, 평소 5분 넘기지 않아서였는지 영 익숙지 않은 듯했다. 서로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그날 밤, 이부자리에 누워 아빠의 말을 되감아 보다가 생각했다. 사는 동안 감기 한 번 걸린 적 없는 아빠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건강한 어른이라고.     

             



  마흔 전까지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얼굴로 살고, 그 이후로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지금껏 수많은 역경을 지나오면서도 나의 얼굴이 티 없이 맑을 수 있었던 것은, 건강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곁에서 양육해 준 부모님 덕분이었다. 두 분은 타고난 장애로 인해 홀로 틀린 그림처럼 눈에 튀던 나를 한 번도 부끄러워한 적 없었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불편한 것뿐이라는 말로, 마음이 불행으로 치우치려 할 때 중심을 잡아주었다. 덮어놓고 괜찮다, 잘한다는 말로 눈 가리지도 않았다. 남들과 다르게 태어났으니 네 스스로 더 단단해져야 한다는 말로 부딪치고 깨지는 순간마다 꼭짓점처럼 제자리에 있었다.



  그 덕에 세상이 빙글빙글 돌듯 삶이 어지러울 때도 바깥으로 나가떨어진 적 없었다. 숱하게 넘어져 여기저기 성할 날이 없었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 모두 몸은 약해도, 마음은 그 누구보다 건실할 수 있도록 길러주었기 때문이었음을 알았다. 아빠처럼 감기 한 번 걸린 적 없는 건강한 몸을 물려받지 못했지만, 궂은 날씨 같았던 과거를 감기로 치환해 생각할 힘이 있었다. 비 맞는 동안은 힘들어도 결국 감기 한 번 앓으면 그만일 뿐. 마주한 현실을 맞을 만한 비라고 여기며, 피하지 않고 빗속으로 뛰어들 용기가 났다.



  감출 수 없는 약점을 타고나 숱하게 공격받던 삶이었지만 부모님이 한결같이 건강한 마음으로 든든히 받쳐준 은혜로 바람 잘 날 없이 흔들려도, 깊이 뿌리내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는 동안 사랑한다는 말은 아꼈지만 그 뜻을 담은 마음과 행동은 모자람 없이 넘쳐흘렀으니, 나 또한 흘려보낼 것이 사랑밖에 없었다. 타고난 부족함을 핑계로 화를 분출하며 살았을지도 모를 내 삶은, 가끔 꽃샘추위가 오기도 하는 두 얼굴의 봄 같아도 결국은 추운 겨울을 잊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개화할 테니. 사는 동안 부모님이 길러주신 대로 남은 날 동안 몸도 마음도 건강히 살아보겠노라 다짐했다.




쇠할 수밖에 없는 몸을 타고났어도
누구보다 건강한 마음을 물려받았으니.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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