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감독 김도영, 2019)
노을을 볼 때면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고 ‘지영’은 말했다. 지영의 하루는 평범해 보였다. 두 돌 된 딸과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빨래를 개어 넣었다. 지영의 연속된 일상 틈틈이,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그녀의 일생이 하나둘 스크린에 그려졌다. 보는 내내 가슴이 쿵, 쿵, 계속 내려앉는 것 같았다. 엄마가 떠올랐고, 딸을 키우는 누나가 떠올랐다. 외할머니가 떠올랐고 나의 유년시절을 돌아봤다.
머리가 크면서부터는 명절이 싫었다. 명절이란 그저 서로의 멀어진 간극을 가슴 뻐근하게 느끼는 서글픈 이벤트일 뿐이었다. 엄마와 숙모는 팔목이 닳도록 상을 차리고 그릇을 씻고 바닥을 닦았다.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해외여행 패키지를 끊어버릴까도 생각해봤다. 다음 명절엔 내려가지 않겠노라 다짐한 게 몇 해 째지만, 할 수 있는 게 고작 설거지뿐이라도 엄마의 명절이 조금은 더 편하길 바라며 매번 기차표를 산다.
산후 우울증에 걸린 지영은 부쩍 옛날 생각에 자주 빠진다.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보는 그녀의 일상은 시대를 대물림한 것이기에 지극히 평범한 것으로 치부된다. 어떤 처지든 당사자가 되지 않고는 모르는 법. 출구 없는 미로에 갇힌 것 같다던 지영은 명절에 내려간 시댁에서 시어머니를 “사부인”이라 부르며 마치 빙의한 듯한 언행을 보이고, 남편은 그런 그녀를 안쓰럽고도 위태로운 눈으로 지켜본다.
<82년생 김지영>은 원작 소설과 달리 남편과 엄마를 포함한 주변인들의 심리까지 균형 있게 배치한다. 그러면서 지영의 과거나 지인들의 에피소드를 원작보다 더 평면적인 사례들로 나열한다. 여성을 향한 차별적인 언행이나 사회적 사건들이 원작에서는 메시지의 날을 세우는 장치로 쓰였다면 영화에서는 ‘연대와 공감’이라는 그 너머의 역할까지 부여받는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특정한 인물의 특별한 사건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 특성으로 귀결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한국에서 살아온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었거나 공감할 사례들을 엮음으로써 자신의 목적과 역할을 공고히 수행한다. 누군가 겪은 예외적이고 별난 사건으로 취급받지 않도록 전형적인 이야기를 통해 보편적인 사람들의 공감을 구한다. 그렇기에 인물들의 심리가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모든 주변인들은 새로운 시대정신을 향해 변화한다. 지영의 남동생과 아빠는 입으로, 때론 몸으로 말한다. 몰랐어서 미안하고, 모르고 살고도 괜찮았어서 미안하다고.
성평등의 최전선에 있었던 원작이었기에 <82년생 김지영>은 영화화 과정에서도 갈등이 많았다. 하지만 영화는 성평등이라는 담론을 온전히 품고, 이를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합당한 사회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데까지 메시지를 확장한다. 사람들을 구분 짓고 선을 긋는 대신 서로의 연대와 보살핌을 말한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나아가 한 엄마가, 한 여성이, 한 개인이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서도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명절 직후엔 심리상담 검색량이 일시적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여전히 힘든 명절을 마주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방증일까. 갈등을 연대로 바꾸는 것엔 많은 노력이 요구되지 않는다. 작은 변화의 조짐을 살펴봐 주는 서로의 눈길, 멀어진 간극을 줄이려는 손길과 발길이 더해진다면 우리는 출구 없이 막힌 미로라도 헤치고 넘어갈 힘을 얻을 것이다. 영화 속 지영이 끝내 보여준 것처럼.
이 글은 2024년 2월 <경남도민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