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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 영 Jun 26. 2021

내 안의 지킬과 하이드

Self-esteem can be damaged by how we see ourselves. Some people have an "inner critic, " a voice inside that seems to find fault with everything they do. 
 [2013년 9월 고2 전국연합 모의고사 30번]
 
자존감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보는가에 의해 손상될 수 있다. 몇몇 사람들은 ‘내면의 비판자’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는 모든 것에서 잘못을 발견하는 것처럼 보이는 내면의 목소리이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사랑이 힘들다. ‘내 안에 존재하는 비판자’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낮아지면 지킬보다 하이드가 힘이 더 세진다. 너 같은 놈이 무슨 사랑 타령이냐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기나 하냐고. 하이드는 남을 위하는 척도 한다. 그녀를 사랑하지 말라고. 그게 그녀를 위하는 길이라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당연히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게 될 때, 하이드는  ‘저 사람이 너를 제대로 알고 있다’고 비아냥거리며 빨리 동굴로 돌아가 혼자 쭈그리고 있으라고 명령한다. 하이드를 사랑할 사람은 없다. 지킬을 사랑했던 사람도 하이드의 존재를 안다면, 당연히 떠날 것임은 자명하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서로에게 불안함을 주는 상황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자신의 부족함이 들통 나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지 않을까 불안해한다. 장점은 부풀리고, 단점은 숨기는 데 급급하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본모습은 사라지고, 부자연스럽고 거짓된 모습만이 나타나 사랑하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거짓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어서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하면 안 되는 사랑이다. 




 자존감이 낮아 질대로 낮아진 나는 고슴도치가 되고 말았다. 나에게 관심을 두지 말라며 항상 가시를 곧게 세워놓고 있었고, 누군가 다가올라 치면 상처 받기 싫어, 상처주기 싫어 가시 돋은 말을 먼저 내뱉곤 했다. 타인이 진심으로 베풀어준 호의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타인의 관심이 지금 내 삶에 어떠한 위로도, 도움도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존감이 낮다고 해서 자존심마저 없지는 않았다. 친구 A는 입이 가벼웠다. 분명히 불쌍한 놈이라고 잘 부탁드린다고 원장에게 말했을 것이다. 원장도 입이 무겁지는 않아서 친한 강사들 몇 명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나에 대해 모르는 강사가 이 학원에 없다고 봐야 했다. 그게 더 문제였다. 내 비루함과 가난함을 모두가 알고 있는 창피한 가시방석에 앉아 있다 보니 어느새 난 고슴도치가 되고 말았다. 


 높아야 할 자존감은 낮았고 없어도 될 자존심만이 남았다. 미천한 자존감과 알량한 자존심만이 남은 사람에게 사랑은 사치였다. 만약 그녀가 나에게 관심 있다고, 한 번 만나보자고 말했다면 나는 그녀를 되려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나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은 그녀가 사람 보는, 남자 보는 안목이 좋지 않음을 방증한 셈이었다. 고슴도치의 가시를 예쁘다고 만지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설령 있다 해도 그 사람의 취향은 결코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이드에게 사랑의 감정을 보이는 사람은 결코 정상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녀는 하이드 때문에 위축되었던 내 안의 지킬을 깨워준 사람이었다. 두려움, 증오, 자기 비하로 한동안 살았던 탓에 행복, 사랑 같은 단어를 한동안 잊은 채로 살아왔음을 그녀를 알게 된 이후부터 깨닫게 되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본다. 배가 고플 때는 식당 간판만 눈에 들어온다. 노래방, 피시방 빨래방, 가로수, 거리의 전체적인 조화로움은 배고픔을 해결한 후에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당시 내 눈에 사랑놀음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외롭다’와 ‘그립다’라는 감정은 적절한 시기에 알맞게 혼합되어 ‘사랑하고 싶다’라는 감정을 만들어 낸다. 그 시절의 나는 외로운지도,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자각하지 못할 만큼 좋지 않은 시력을 가졌었다. 신포도는 눈에 포도가 보여야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이드는 포도도, 사람도 전혀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녀가 내 눈앞에 직장동료로 나타났고, 하필 내 옆자리에 앉아 나의 신포도가 되었다. 그녀의 모습을 안 볼 수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안 들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향긋한 냄새를 맡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태어난 아기처럼 모든 감각이 민감해졌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고로 존재했다. 눈으로, 귀로, 코로 느껴지는 순간의 좋은 느낌들은 내 안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었다. 이성은 절대로 감정을 지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감정은 사라지고 오로지 이성만이 이상적인 인간을 만든다고 말한 모든 위대한 철학자들의 말은 다 헛소리였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이성을 말한다. 쇼펜하우어의 ‘표상’은 감각을 뜻한다. 인간은 때론 이성으로, 때론 감각을 통해 세계를 바라본다. 이성과 감정, 객관과 주관이 엎치락뒤치락하기에 인간이 바라보는 세상 또한 알쏭달쏭, 오락가락한다. 인간은 그 중간에서 합리를 찾으려 노력한다. 나는 하이드가 주관하는 못난 이성에게 내 몸을 맡기고 살았었다. 그래서 좋은 것을 좋은 것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못난 이성이 바라는 대로 나를 못나게 보이는 쪽으로 변형시키고 왜곡시켰다. 그녀는 죽어있었던 내 감각을 다시 살려주었다. 그녀를 보고, 듣고, 맡으며 내 뇌의 뉴런들은 끊겨 있었던 행복 회로를 다시 연결하여 작동하게 했다. 고시원 방에 혼자 누워있을 때도 그녀를 보고, 듣고, 맡을 수 있을 정도로 뉴런은 튼튼했고, 부지런했다.




 감정이 주는 쾌락과 행복이 사랑일까? 고기가 맛있게 익어가는 소리를 듣고, 접시 위에 보기 좋게 놓인 것을 보고, 침샘을 자극하는 황홀한 냄새를 맡을 때, 나는 스테이크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은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베르테르의 로테에 대한 사랑이 단순히 쾌락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사랑은 쾌락을 뛰어넘는 숭고한 무엇이 있어야 한다. 철학자들과 문학가들은 이천 년 넘는 세월 동안 그 숭고함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탐구했고 그 답을 찾아내었다. 정답은 답이 없다는 것.  애초에 정해진 답이 없는 문제는 항상 개인의 몫이어서, 나의 몫이다. 나는 그녀의 외모, 목소리, 냄새를 좋아했다. 이것이 사랑일까? 뉴런에게 답을 찾아내라 강요해 보지만, 뉴런은 그녀를 느끼는 데만 바빴다. 


 지킬이 그녀 생각에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하이드가 발견하는 순간, 행복한 상상은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애달픔으로 가슴 시리게 끝이 난다. 하이드는 이것이 결코 사랑이 아니어야 한다고 말한다. 너는 그녀를 사랑할 자격이 없다. 너는 그녀를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잔인한 이성은 감정에게 그리 긴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다음 날, 일부러 다른 여자 강사들을 지나쳐 봤다. 보고 듣고 맡아봤다. 티 나게 빤히 쳐다보며, 귀를 쫑긋 세운 채로, 변태처럼 코를 벌렁거리지는 않았다. 이렇다 할 감정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행히 그녀를 향한 나의 감정이 여자 생각이 간절해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동물적인 것은 아니었다. 내 모든 감각기관이 오로지 그녀에게만 초점이 맞춰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 내심 기뻐했다. 그것도 잠시. 하이드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내 단단한 이성의 고삐가 풀리거나 미쳐 돌아가서, 그녀를 맘껏 사랑하라고 날 부추기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내 감정을 절대 들키지 말아야 했다. 아직 그녀는 출근 전이었다. 자리에 앉아 책을 편 다음, 메모지에 쇼펜하우어의 한 구절을 써서 그녀가 볼 수 있게끔 책상에 붙였다. 유별나게 보여 재수 없어 보여도 상관없었다. 그녀에게 들키지 않는 방법으로 이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이 추구하는 것은 지적 유희가 아니라 아이의 출산이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이건 아니다. 갈기갈기 찢어서 버렸다. 


“사랑이라는 것은 가장 신중한 일까지 훼방 놓는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이 정도면 적당하다. ‘저 사람은 절대 사랑이라는 것을 하지 않겠구나’라는 의지가 표상되어 맘에 든다. 





 그녀가 출근했고, 난 시크하게 ‘오셨습니까’라고 속으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녀도 ‘안녕하세요’라고 소리 내어 답했다. 그녀와 내가 교차했다. 보고, 듣고, 맡았다. 이기적이어야 한다. 나만 좋아해야 한다내 안의 지킬과 하이드는 그렇게 서로 합의했다. 안 그러면 내가 살지 못할 것 같아서. 내가 살지 못하면 하이드도, 지킬도 살지 못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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