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위라는 말을 좋아한다.
논문을 준비하면서 야스퍼스의 책을 정독할 때에 알게 된 단어다.
세계정위 세계에 대해서 대처하는 적절한 방침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살아가는 세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형이상학적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나의 세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실 모두 알겠지만 이러한 질문을 한다는 것은 거의 있는 일은 아니다.
살기 바쁜 우리네 세상에서 세계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은 불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배가 더 고프지 않기 때문에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내가 정의하자는 말이다.
그대가 살아가는 세상 역시 그대가 정의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세상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경험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철학적이다.
언어는 세계를 이룬다고 한다. 내가 어떤 언어를 쓰는가에 따라서 나의 가치관이 정해진다.
가치관이 정해지는 것을 더욱 극대화한다면 세계관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대충 우리가 쓰는 언어부터 점검하자는 말이 되겠지만, 중요한 것은 나의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이렸다.
가치관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그렇기에 세계관도 다양하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이야기하다 보면 이상향에 대해서는 언제나 엇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사실상 경제적 자유 이런 거
누구나 경제적 자유를 바란다. 아무튼 하고 싶은 게 생겼을 때, 또는 아플 때 경제적 여유로 인하여 일상생활이 피해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렸다. 그런 이유는 자연스럽게도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자본주의일 테니 무척이다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모든 세계를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언제나 세계는 간접적이다. 세계는 언제나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세계정위는 결론적으로 철학적 세계정위를 필요로 한다. 너무나 만연한 생각으로 자신의 세상을 정의하지 않았으면 한다.
세상은 시궁창이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약육강식이라는 말도 있다.
이 두 가지는 정말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이 두 가지의 방식으로 정위 하지 않기를 바란다.
언제나 투쟁적이고, 회의적이고 암울한 세계 속을 살아가는 자기 자신을 형성하지 말란 말이다.
그래서 사실 기독교 세계관을 중요시 여기는 나로서는 야스퍼스의 철학적 세계정위의 힘입어서 신학적 세계정위를 고수하는 편이다. 기독교 세계관을 통한 세상은 일반적인 세상과는 다른 중점을 둔다.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에 대한 희망, 어떤 면에서는 세상의 종말을 미리 맛본 자들의 모습일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줄 것은 절망이 아니오 평안과 희망이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자기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비록 고통과 억울한 일과 수많은 역경이 도사리고 있음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늘의 힘과 내일의 소망을 갖는 세계를 가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