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읽다>
책 읽기는 우리가 굳건히 믿는 것들을 흔들기에 위험하고(1장), 우리는 '돈키호테'나 '에마 보바리' 같은 책 속 인물들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며 소설에 매료된다(2장).
책 속에는 ‘길’이 있는 게 아니라, 감춰진 중심부가 있고 그것을 향해 헤매고 어슬렁거리다 한 겹씩 나만의 작은 우주를 쌓게 되는 것이며(3장), 등산가가 다리를 잃는 한이 있어도 다시 산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소설은 그냥 소설이 가진 매력 때문에 (계속) 읽게 되는 것이다(4장).
실은 매력적인 괴물들의 세계인 소설을 보면서 혹시 내 안에도 이런 괴물이 있진 않나 돌아보고 우리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5장).
마지막으로, 100년 남짓의 우리의 짧은 생물학적 생애를 넘어 영원히 존재하는 우주에 잠시나마 접속할 수 있다는 것이 독서의 가장 큰 보상일지도(6장) 모르겠다.
우리는 소설조차도 '왜 읽느냐'는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합목적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책 읽기의 결과는 있어도, '목적'을 앞서 설정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은지 소설의 ‘존재적 무목적성’조차 열심히 설명하게 되는가 보다. 저자는 문학작품들에 바치는 자신의 사랑고백(206)이라고 말했지만..
오랫동안 책은 그냥, 읽을 수 있는 것 - 플롯, 반전, 맥거핀 등 서사 문학의 작법에 대한 이해 없이 -인 줄 알았다. 그래서 지금껏 얕은 호기심으로 '많이 펴고', 부족한 소화능력으로 ‘가차 없이 닫아'왔던 것 같다. 마치 미각이 둔한 사람이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 가서 양이 적다고만 말하는 것처럼. 아주 사소한 취미라도 제대로 즐기려면 공부하는 시간(최소한 매뉴얼이라도 읽는 성의)이 필요한 건데 역시 무식하니 용감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 더 '주의 깊은 독자(86)'가 되고 싶어진 건 매사 심드렁한 나에게는 큰 의미이다. 그저 사건 요약이 아니라 저자의 섬세한 묘사의 의미를 볼 줄 아는, 중심부에 다다르는 과정을 즐기며 소설의 맛을 제대로 느끼는 독자 말이다.
좋은 독서는 '한 편의 소설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가가 만들어놓은 정신의 미로에서 '기분 좋게 헤매는 경험'(101)이라고 한다. 수많은 책들 중에서 소설을 집어 드는 이유가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에 싫증 난 운전자가 일부러 작은 지방 도로로 접어드는 것(99)이듯이.
아, 왠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정말 재미있어.
인물들은 생생하고,
사건들은 흥미롭고,
읽는 내내 정말 흥분되더군.
플로베르는 "거의 아무런 주제도 없는" 책을 쓰고 싶다고 말하는데 이는 '무엇을 그리느냐보다 어떻게 그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란다(93). 독자가 감춰진 중심부에 쉽게 도달할 수 없도록 엉뚱한 방향으로 유인하며(95), 주제와 교훈을 강조하는 소설을 낡은 것으로 만들고, 그 결과 <마담 보바리>의 상투적인 불륜 담은 완전히 새로워졌고 에마 보바리는 놀랍도록 생생한 캐릭터가 되었다(97).
클리셰로 가득한 소설을 안전한 세계(98)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니 아침 드라마와 일일연속극의 힐링과 카타르시스가 뭔지 이해된다. 아무런 긴장감 없이 볼 수 있는 이야기인 셈이다.
소설을 일종의 '자연'으로 비유하는데, 감탄할만한 아름다운 풍경도 있지만 심한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 자연 -끝없이 걸어야하는 사막? - 있듯이 그 무수한 힘겨루기 끝에 독자는 완독에 다다르는 것이다. 끝까지 읽기 어렵지만 끝까지 읽고 나면 독자의 자아는 읽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가기 어렵다. 이전에는 받아 들이지 못했던 인물과 생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동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런 인물과 사상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셈이다(134).
소설은 소설이 가진 매력 때문에
다가가게 되는 것이고,
그 매력과 싸우며 읽어나가는 것이고,
바로 그 매력 때문에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138).
작가는 소설 쓰기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크리에이티브가 아니라 이미 쓰인 것(고전 같은)들을 조금씩 바꿔가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행위(198)라고 한다. 소설 읽기 역시 내가 읽은 단 한 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이자 다른 책으로 연결해주는 징검다리가 되는 것이다.
소설 읽기의 본질이 좁은 시야에 갇혀, 세속적 이해와 단기적 전망으로 아웅다웅하며, 더 이상 어떤 모험도 허용하지 않는 지극히 합목적, 교환가치에 익숙한 현대의 삶 속에서 잠깐씩 나와 '이야기의 바다'에 뛰어들어 '책의 우주'와 접속하는 일(201)이란 걸 잊지 말아야겠다.
저자도 '철이 들고 나서는 살아 있는 그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별로 강렬한 인상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일급의 소설들로부터는 수도 없이 압도당했고, 그런 충격들이 나로 하여금 그 소설들을 '다시 쓰게' 만들었다(206).'라고 말하듯이 현실 노잼을 탈피하게 해 줄 아주 적은 가능성만으로도 소설 읽기는 시도해볼 만한 일일 것이다. 오르한 파묵도 그러지 않았는가, 소설은 두 번째 삶이라고.
영화 <pain and glory>에 나오는 나의 로망 빨간 책장 사진을 공유하며 마무리 지어본다. (사진은 좀 아쉬운데 영화에는 훨씬 멋있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