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애, 타오르다
두 줄 요약
<최애, 타오르다>는 10대 팬-덕질 문화를 다룬다. 삶의 의미를 최애를 좇는 데에서 찾으려 했던 주인공 아카리가 최애의 폭력 논란과 연예계 은퇴로 충격받는 이야기로 줄거리는 심플하다. 일본에서 문예지에 발표되자마자 SNS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가장 새로우면서도 고전적인 청춘 이야기'라는 평을 받고 있다.
작가는 일본의 99년 생 여자로 23세이다. 2019년 데뷔작 <엄마>로 이미 최연소 미시마 유키오 상(2020년)을 수상했고, 이번 <최애, 타오르다>로는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괴물 신예' 뭐 그런 부류인 셈이다.
(*아쿠타가와 상은 예술성에 치중한 순문학에 주는 상)
물론 얇기도 하지만 가볍게 읽혔다면 경험해보지 않은 고통이라 머리로만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 같고, 무언가 여운이 남았다면 자신의 과거 어느 지점과 아주 옅게라도 겹쳐져서이지 않을까.
파편화된 일본 사회에서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현상으로 덕질 문화를 다루며 덕질을 좁게 장르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사회문화적으로 풀어냈다는 점이 공감받는 이유 아닐까. 덕질을 옹호하는 쪽 보다는 적나라하게 풀어내 팬픽이나 장르소설이 아님은 증명했지만, 끝까지 무기력하게 자신을 내버려 두는 주인공의 일기장을 보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덕질을 소재로 했지만 사실은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십 대 소녀의 성장기이자 실존을 화두로 한 철학적 탐구라는 평을 보니 성장하지 못한 성장기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콘서트를 보고 최애가 사는 것으로 추측되는 맨션 근처에 자신도 모르게 도착한 주인공이 최애가 함께 살고 있는 여자를 보면서 뱉는 독백에서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나를 명확하게 아프게 한 것은
그 여자가 안고 있던 빨래였다.
내 방에 있는 엄청난 양의 파일과 사진, CD보다
셔츠 단 한 장이, 겨우 양말 한 켤레가
한 사람의 현재를 느끼게 한다.
은퇴한 최애의 현재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게 현실이다(128p).
덕질 경험이 없는 나는 덕질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냥 연예인 좀 좋아하고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해놓는 정도가 덕질은 아닐 테니 덕질 좀 해본 사람들의 목소리가 필요했다.
덕질도 DNA
먼저, '덕질도 DNA'라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들었다. 엄마가 대단한 덕질을 하는 분인데 그 딸도 그렇다고. 그래서 학창 시절 내 그 친구의 연예인 팬 활동에는 태클이 걸리기는커녕 엄마와 딸이 서로의 최애가 더 멋있다고 싸우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오희라님의 '덕후의 7단계' 구분도 흥미로웠다. 어느 정도 아는 단계와 그 사람의 콘텐츠를 직접 찾아보는 관심기(3단계)를 지나 사진을 모으고 정보를 수집하는 간잽기(덕질을 할지 말지 간을 보는 행위를 일컫는 신조어로 4단계에 해당)부터 덕후라고 구분한다. 점점 발전해 라이트(5단계로 공식 팬카페 회원, 유튜브 최신 재생 영상 대부분이 덕질 대상 등), 돈과 시간의 씀씀이가 커지는 코어(6단계), 마스터(7단계)로 나아간다고.
#유사연애
호감이 설렘이 되고, 열정으로 넘어가서 결국 프러포즈가 되는 연애 단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일방적이라는 게 큰 차이지만.
#덕통사고
한 순간에 빠져들어버려서 '덕통사고'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사람 좋아하는데 논리적 이유를 델 수 없듯이 덕질도 마찬가지인 가보다.
'이목구비는 아키히토가 더 뚜렷하고, 노래도 세나가 더 잘하잖아.'라며 아키라의 덕질에 참견하는 언니를 보고 '존재 자체를 좋아하면 모든 것이 좋아진다'라고 되뇌는 장면이 바로 그것.
바보 같은 질문이다. 이유가 있을 리 없다.
존재 자체를 좋아하면
얼굴, 춤, 노래, 말투, 성격, 몸놀림,
최애와 연관된 모든 것이 좋아진다(34).
OK 알겠는데,
관계에서 오는 불확실성과 위기를 감수하지 않고, 쟁취하지도 않고 그냥 온전히 일방적으로 주는 사랑이 안전(?)할 수는 있으나, 그 관계를 통해 개인은 인간으로서 성장해 나갈 수 있나? 이런 생각을 한다. 아마도 이것이 내가 덕질이 안 되는 이유인 것 같다.
소낙비와 빨래, 하나하나는 인식하는데
둘을 연결하지 못한다(108).
주인공은 명백히 우울증이다. 아키라는 주변과 속도를 맞추지 못해 늘 일상이 버겁고 몸이 무겁다. 할머니 집에 혼자 살게 되면서 도통 집 관리를 하기가 어렵다. 맨발로 걸으면 파인애플 국물이 묻은 비닐에 발이 걸리고, 등이 가렵고, 마당에 걸어 놓은 빨래는 비에 젖기 일수이다. 이렇게 남들은 쉽게 해내는 일이 아카리에게는 어렵고 이는 단지 노력 부족과 게으름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
인간의 삶이 완성형이 아니라 성장형이라면 우리는 사회 안에서 제도와 관계를 통해 서로를 성장시키고 성장해나갈 '의무'가 있다. 어른, 선배, 부모는 아이, 후배, 자식을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주인공을 아무도 관심과 애정으로 이끌어주지 않는다.
사회 현상으로서 덕질이고 나발이고 부모의 자격, 가족의 어려움. 모두가 하고 있지만 모두가 서툰 그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오은영 선생님이 절실한 순간이다.
최근 방영한 드라마 <소년심판>에서 김혜수가 소년범에게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누구나 실수를 해. 그런데 그다음이 중요해, 그게 모여서 내가 되는 거거든'
우리는 이런 말을 해줄
부모, 어른, 선배, 선생님이 필요하다.
번역가는 '엄마는 닦달하고 아빠는 무신경하고 언니는 종잡을 수 없어 아카리가 심리적인 거리감을 느낀다(136)'고 썼지만 사실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언니'에 가장 이입했다고 말한다. 서슴없이 방문을 열고 들이닥치는 엄마에 비해 언니는 늘 조심한다. 그렇기에, 중퇴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그래. 힘들었겠다. 수고했어"라고 말하는 언니가 폭발하는 순간에 모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안 해도 돼, 열심히 안 해도 되니까
열심히 한다는 소리는 하지 마.
부정하지 말라고(64).
아카리가 언니의 '느닷없는 분노'로 기억하는 이 씬은, 공부하라 잔소리하는 엄마에게 아카리가 열심히 하고 있다고 외치자 참지 못하고 언니가 터진 부분이다. 언니 정도면 좋은 사람 범주에 들어가는 게 분명하지만 언니도 '외적인 기준'과 '판단'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에는 이해와 폭발을 반복하는 삶에 머물게 될 것이다.
갑분 명상인데, 명상에서 '우리 모두 다르지 않음을 압니다'라는 표현을 한다. 적나라한 비유로 치자면 우리는 모두 해변의 모래알이라는 건데, 내가 저 옆의 모래알보다 조금 더 빛나고 하얗다고 말하는 게 우주 시점으로 얼마나 귀여운 일이겠는가. 일을 못하는 그도 그 일의 결과물을 낸 도구이기 이전에 사람이라는 걸 생각해본다는 건데, 이런 얘기를 시작하는 것이 1단계, 받아들이는 게 2단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3단계가 아닐까? 이해의 문제라기보다는 내가 얼마나 받아들일 마음이 되었는지의 문제이다. 안 받아들여도 할 수 없는데, 그렇게 사는 삶이 정말 괜찮은지 살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나는 잘잘못을 따지는 게 결국 더 괴로워서 다르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시도를 하게 됐다. 그리고 당장은 형편없어 보이는 누군가도 언젠가 한 번쯤은 반드시 나의 기댈 곳이 된다고 믿는다.
정리하고 보니 세대, 사회, 관계로 생각이 제법 깊게 이어진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는 르포 같다는 소감이 적합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주목할 만한 특정 문화 현상을 다루면서도 일반적인 관계로 생각을 확장시켜주는 소설인데, 공감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문화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한국 사회는 성시원(응답하라 1997 HOT 팬클럽) 같은 애는 많이 나와도 아카리 같은 애는 많아 지지 않는(혹은 드러나지 않는 것일지도) 특유의 밝음이 있다. 한국 사회는 좀 가볍긴 해도 그래서 건강한 듯하다. K - pop 문화의 핵심은 팬 문화라고 하던데, 이런 게 한국다움 아닌가 싶다. 정준영 팬이었던 영화학도가 만든 영화 <성덕> 언제가 꼭 보고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AcOCb4-le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