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평균인 줄 알았다,,,
세상에 객관적인 것은 없다. 이 말조차 나의 주관이 들어간 것이다. 객관의 지표가 되는 숫자나 시간 같은 것도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주관적인 기준이지 않은가. 만물에는 적어도 하나 이상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 나의 주관에 따라 탄생한 ‘내 맘대로 덕질 레벨’이 있다. 순전히 나의 덕질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척도이기에 ‘내 맘대로’라고 명명해보았다. 얼핏 보면 객관적인 척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며 모두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안다. 덕질의 더하고 덜한 정도를 어떻게 나눠볼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고 분석해본 결과 총 7단계로 나눌 수 있었다.
만약 당신이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덕질을 하고 있는지, 과한 덕질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하다면 아래 내용과 자신의 덕질 스타일을 비교해보자. 미리 말하자면 덕질의 시작은 4단계부터인 것으로 설정했다. 단계는 다음과 같다.
Level 1 : 머글기
Level 2 : 노잉(knowing)기
Level 3 : 관심기
덕질 시작점
Level 4 : 간잽기
Level 5 : 라이트(light)
Level 6 : 코어(core)
Level 7 : 마스터(master)
Level 1 머글기
: 머글이란 영국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단어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일반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덕질판에선 덕질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을 머글이라 부른다. 머글기는 어떤 대상이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상태를 나타내며, 덕질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일말의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이 레벨에 해당한다.
Level 2 노잉(knowing)기
: 영단어 knowing은 ‘알고 있는’ ‘아는 것이 많은’ 등의 의미로 해석된다. 즉 노잉기란 말 그대로 ‘알고 있는 시기’라는 뜻이다. 어떤 인물 혹은 그룹의 이름과 그들의 작품, 창작물, 특징 정도를 대강 아는 시기를 일컫는다. 꼭 덕질을 하지 않더라도 음악, 영화, 드라마, 뮤지컬, 연극, 스포츠 등 문화생활을 향유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에 해당한다. 일반인 전부를 ‘내 맘대로 덕질레벨’의 기준에 맞춰 분류해보면 노잉기의 퍼센티지가 압도적으로 높을 것으로 예상한다.
Level 3 관심기
: 노잉기 단계에서 관심기로 넘어가는 데엔 큰 차이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행위의 주체다. 한 대상의 정보와 콘텐츠를 우연히 알게 되느냐, 아니면 본인이 직접 찾아보느냐에 따라 노잉기와 관심기로 나뉘는데, 노잉기가 TV 채널을 돌리다 이전에 몇 번 봤던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된 시청자라면 관심기는 직접 그 프로그램에 예약을 걸어놓고 시간 맞춰 보는 애시청자라고 비유할 수 있겠다. 한 대상의 이름과 그의 작품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호감도를 가지고 콘텐츠를 직접 소비하는 단계다. 하지만 그의 사적인 것에는 크게 관심 두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어떤 가수의 음악을 좋아하고 자주 찾아 듣지만, 그 가수의 TMI까지 아는 정도가 아니라면 관심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Level 4 간잽기
: 간잽은 덕질을 할지 말지 뜸 들이며 간을 보는 듯한 행위를 일컫는 신조어로 ‘간잽 하다’, ‘간잽 중이다’ 등으로 쓰인다. 간잽기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관심기의 행동들을 포함하여 더욱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어떤 대상의 사진을 모은다거나, 유튜브 공식 채널을 구독한다거나, SNS 개인 계정을 팔로우하고 그의 각종 정보를 수집하는 등 실질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아직 덕질을 하지 않는 상태라는 이유로 간잽기가 덕질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간잽기란 세미(semi-) 덕질 단계와 같다고 본다. 백 퍼센트 덕질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조금 부족하나 덕후가 아니라면 굳이 하지 않을 일들을 사서 하는 상태이기에, 반(半)을 뜻하는 영어 접두사 세미(semi-)를 붙여 세미 덕질이라고 명명해보았다.
실제로 많은 덕후들이 간잽기를 거친 후 겸덕을 결심하거나 본진을 아예 갈아타 버리는 경우가 많다. 크게 논란됐던 사건은 없었는지, 현재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지, 향후 계획은 어떤지 등등 입덕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재고 따진 후 본격적으로 덕질을 시작하는 것이다. 혹은 덕통사고를 당해 의도치 않게 간잽을 하는 경우도 있다(민지가 좋아하는 그룹을 내가 간잽하게 됐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얼핏 보면 입덕부정기도 간잽기에 포함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입덕부정기는 행동에 따른 것이 아닌 신념에 따른 것이기에 어떤 덕질 단계에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Level 5 라이트(light)
: 자, 이제 본격적으로 덕질이 시작됐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다음 질문 중 본인에게 몇 가지가 해당하는지 점검해보자.
공식 팬카페 정회원인가?
트위터 혹은 인스타그램에서 덕질 전용 계정을 새로 만들었는가?
유료 팬클럽에 가입했는가? (ex. 위버스, 유니버스, 리슨 등)
핸드폰 사진 앨범에서 최근 일주일 내에 저장한 사진의 절반 이상이 덕질 대상인가?
방 안에 덕질 대상의 사진이 하나라도 붙어있는가?
팬미팅 혹은 콘서트에 다녀온 적 있는가?
앨범이나 영화 DVD를 포함해 공식 굿즈를 구매한 적 있는가?
본인의 취향이 아닌 덕질 대상의 취향인 무언가를 구입한 적 있는가?
유튜브 최근 재생한 영상의 대부분이 덕질 대상과 관련된 것인가?
멜론 친밀도가 96도 이상인가? 또는 덕질 대상의 필모그래피 중 8할 이상을 보았는가?
위의 열 가지 질문 중 세 가지 이상 “YES”라고 답했다면 당신의 덕질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래도 헷갈린다면 카드 거래 내역을 확인해보자. 어떤 방식으로든 덕질에 쓴 비용이 있다면 라이트 덕질 단계에 접어든 것일 테니.
Level 6 코어(core)
: 코어 덕질에 접어들게 되면 앞서 언급한 열 가지 사항 모두 해당하는 것은 물론 시간과 돈의 씀씀이가 더욱 커진다는 특징이 있다. 공식 굿즈를 넘어서 트위터나 그 외의 사이트에서 판매하는 비공식 굿즈를 구매한다거나, 덕질 대상의 생일이나 데뷔 몇 주년 같은 기념일 서포트에 돈을 보낸다거나, 아니면 직접 선물을 보낸다거나, 공개방송이나 무대인사 등 각종 오프라인 현장에 참여한다거나, 콘서트와 팬미팅을 여러 회차 뛰는 경우 등이 있다.
만약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 덕메가 2명 이상 있다면, 아울러 그 덕메들이 이미 덕질 코어에 접어든 상태라면, 더 나아가 덕메들과 단.체.카.톡.방이 있다면! 지금은 덕질 초기 단계라 할지라도 코어 단계로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덕질판에서 덕메의 영향은 아주 크므로. 솔플로 덕질을 하는 사람들보다 덕메들과 함께 달리는 사람들이 덕질에 열과 성을 다할 가능성이 크다.
그간 내가 덕질을 해오면서 코어 단계까지 왔던 것은 딱 한 번 뿐이었다. E를 덕질하던 때가 그랬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E와 나 자신을 동일시하며 나의 행복보다 그의 행복을 우선순위에 두었다. 굿즈란 굿즈는 불필요하더라도 모조리 쓸어 담았고 콘서트나 팬미팅 같은 이벤트에 죄다 참여했다. 포토샵을 어느 정도 할 줄은 알았기에 그에게 들어갈 서포트 물품 중 어느 것의 디자인을 도맡아 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어느 정도’만 할 줄 알았지 아주 잘하는 실력은 아니어서 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 게다가 출연자가 꽤 많은 특집 음악방송에서 나보다 나이 많은 내 새끼(…) 기 살려줘야 한다며, 버스를 대절해 왕복 10시간 거리에 다녀오기도 했다. 24시간 365일 스밍은 물론이며, 몇 통의 편지도 부쳤다.
돈도 왕창 썼다. 앨범은 버전별로 5장 이상씩 구매했고 E를 스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직접 전해줄 선물도 샀다. 지하철역 전광판 생일 광고 이벤트를 위한 서포트에 적지 않은 액수를 총대에게 보냈고, 몇 주년 기념 선물 서포트에 적지 않은 액수를 총대에게 보냈고, 무슨 무슨 축하이벤트 서포트에 적지 않은 액수를 총대에게…. 다른 것들을 제외하고 서포트에 쓴 돈만 해도 최소 70-80만 원쯤 될 것이다.
E를 탈덕한 후 완전히 콩깍지가 다 벗겨졌을 때, 스스로가 과한 덕질을 해왔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남은 것은 바닥난 잔고와 애물단지 같은 굿즈뿐이었다. 그렇기에 E 이후로는 이 정도 단계까진 덕질하지 않으려 노력해왔다. 맛있는 음식도 과하게 먹으면 체하는 법이니까.
Level 7 마스터(master)
: 마스터 단계는 지금까지 말한 모든 레벨들을 전부 거쳐 온 프로 덕질러다. 돈과 시간, 체력, 노력 등을 현실보다 덕질하는 데 현저히 더 많이 투자한다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지하게 스스로가 현생불가라고 느낀다면 마스터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이 레벨이 되려면 수중에 아주 많은 돈이 필요하다. 어쩌면 카드빚이 쌓일지도 모른다. 모든 콘서트와 팬미팅에 참여하는 와중에도 값비싼 서포트까지 넣어주어야 하므로. 게다가 팬사인회에 참여하려면 수십, 수백 장의 앨범을 구매해야 하는데 한 장에 약 2만 원 정도이니 한두 번만 가려해도 몇백만 원이 깨질 것이다. 지방, 해외 스케줄까지 전부 따라다니기 위해선 식비, 교통비, 숙박비가 추가로 들어간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홈마를 그만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홈마 계정을 운영하는 동안 카드빚이 몇천만 원 쌓였다며 한숨을 쉬었다. 돈뿐만이랴. 시간, 체력, 노력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받쳐주지 않으면 제아무리 만수르라 해도 절대 이 경지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트위터나 허브홈에서 이 레벨에 도달한 홈마와 네임드들을 많이 봐 왔다. 그들은 연예인이 스케줄을 소화하는 것만큼, 어떨 때는 그보다 더 바빠 보였다. 만약 내 수중에 화수분 같은 재산이 있었더라면 이 단계에 접어들었을까? E를 덕질하던 당시의 마음이었다면 아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여기까지 총 일곱 단계로 덕질의 척도를 나누어보았다. 스스로가 어느 수준으로 덕질하고 있는지 고민된다면 참고해봐도 좋을 것 같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것은 명확한 기준이 아니며 누구나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다는 것을 존중한다. 어떤 점에서는 이 단계에 해당하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저 단계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오직 내 맘대로, 내 기준대로 나누어 본 ‘내 맘대로 덕질레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