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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라 Mar 25. 2021

이걸 기뻐해야 돼, 슬퍼해야 돼?

빅계 탄 날. 근데 이제 실망을 곁들인

‘덕계못은 사이언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덕계못이란 ‘덕후는 계를 못 탄다’의 줄임말로, 누군가의 진정한 팬일수록 그 대상을 만날 기회를 쉽게 놓친다거나 이벤트에서 탈락할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이런 덕계못의 상황이 과학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 흔하다는 의미로 팬들 사이에선 진리나 명언처럼 일컬어진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 말에 공감할 수 없었다. 지인들 사이에서도 나는 성덕(성공한 덕후)의 표본으로 불릴 만큼 덕질에 운발이 따라주는 편이기 때문이었다. 살면서 스스로가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던 건, 대부분 덕질과 관련된 일들이었지 싶다. 각 시기마다 거의 모든 최애들로부터 다방면으로 계를 탔는데 그 역사를 간략히 소개해보겠다.


① 뮤지컬 의상팀에서 일했던 민지가 당시 내 최애에게 사인을 받아다 주었다. TO 옆에는 ‘제일 예쁜 희라’라고 적혀 있었다.

② D가 진행을 맡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 세 번 문자를 보냈는데 그중 두 번을 D가 읽어주었다. 게다가 처음 보낸 문자 내용에 대해선 몇 분 동안 진지하게 상담해주기도 했다.

③ 최애의 개인 팬미팅에 두 번 당첨됐다. 팬미팅은 무료였으며, 팬미팅에 당첨된 팬들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사인과 악수와 포옹을 해주었고 함께 셀카도 찍어주었다. (이건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말도 안 된다)

④ 덕질했던 그룹의 멤버와 몇 개월간 같이 일한 적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콘서트 초대권을 선물로 주었다. 모든 스텝들이 다 함께 회식하던 날 그가 말아준 소맥을 마셨다.

⑤ 덕질했던 그룹이 라디오에 출연했을 때, 내가 보낸 사연이 당첨되어서 멤버 전체의 싸인 시디를 받았다.

⑥ 최애가 나의 존재를, 나의 이름을 알았다. ‘고마운 친구’라며 브이앱에서 내 이야기를 한 적 있었다. 방송을 실시간으로 보다가 심장이 터져 죽을 뻔했다.

⑦ 내가 선물한 꽃다발과 엽서북의 사진을 SNS 계정에 올렸다. 각각 다른 최애 두 명이.

⑧ 최애가 콘서트 당일 SNS에 업로드한 사진 한쪽에 우연히 내가 찍혀 있었다.

⑨ 연예부 기자 일을 하는 후배가 최애 그룹의 사인 시디를 선물해주었다.

⑩ 최애 그룹의 쇼케이스에 두 번 당첨됐다. 그중 한 번은 몇천 명 중 4명을 랜덤으로 뽑는 곳에서 운 좋게 당첨이 됐다.     


당장 기억나는 것들만 빠르게 적어 내려갔는데도 열 개씩이나 된다. 아마 이외에도 계를 탔던 적이 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럴 확률이 높다.




2019년 한 해 동안 나는 공항에서 일하며 수많은 셀럽과 연예인을 목격했다. 가수, 배우, 우리나라에선 만나기 어려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크리스틴 스튜어트 등의 할리우드 스타들도 봤다. 그러나 ‘덕계못’은 정말 사이언스였던 건지 내 최애 그룹은 단 한 번도 보질 못했다. 그들이 공항에 오는 날은 내가 휴무였거나, 아니면 스케줄이 엇갈렸거나, 나도 그들도 공항이었는데 서로 다른 층에 있었다거나, 심지어 내가 눈앞에서 보고도 못 알아봤다거나! 별별 억울한 이유로 그들만은 만날 수가 없었다. 원더걸스 전 멤버 선예가 부른 ‘일월지가’의 가사가 괜히 탄생한 게 아니었다. ‘왜 우린 계속 어긋나서 건너편에 서 있는지. 하늘은 왜 우릴 허락하질 않는 건지’


그러던 어느 여름날, ‘덕계못’이라는 말을 박살 낼 만한 기회가 나에게도 찾아왔다.



도쿄로 워홀을 간 친구 미소가 한국에 잠깐 들어오기로 한 날이었다.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공항으로 마중 나가기로 약속을 했다. 비행기 도착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미리 가서 요깃거리라도 먹으며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지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찍 가는 게 나으니. 미소의 핸드폰에 문제가 생겨 연락이 닿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걱정 많은 성격 덕분에 뭐든 미리미리 철저히 준비하는 게 나의 좋은 습관이기도 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입국 게이트 안내 전광판을 확인했다. 세계 각국의 언어로 바뀌는 전광판 화면과 오른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 속 항공권 캡처 사진을 부지런히 비교하며, 입국 게이트가 어디인지 찾는 데 애썼다. ‘도쿄 나리타, 에어서울, 16시 10분’ 친구가 타고 온다던 항공편의 오른쪽 끝엔 ‘Delayed’라고 적혀 있었다. ‘왜 연착이지?’ 하고 생각하자마자 공항에서 안내 방송이 나왔다.


-도쿄 나리타에서 출발하는 에어서울 702편은 항공기 연결 관계 문제로 인해 17시 10분에 지연 도착 예정입니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는데 비행기는 한 시간이나 늦는다면… 두 시간을 대체 뭘 하며 때워야 하나 막막해졌다.


여유롭게 밥도 먹고, 카페에서 커피도 마셨고, 디저트도 먹었고, 공항 끝에서 끝까지 왕복 세 번을 무의미하게 왔다 갔다 하며, 누가 봐도 심심해 죽겠는 사람인 티를 실컷 냈다. 그럼에도 시간은 아직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게이트 앞에 있는 벤치 의자에 앉아 덕질이나 해야지 싶었다. 트위터 타임라인을 둘러보는데 네임드들이 뭔가 수상한 말을 했다.     


‘얼른 와’

‘빨리 보고 싶다’

‘조심해서 와’

‘얘들아 잘 오고 있니?’     


이게 다 무슨 소린가 싶어 자세히 알아보니 오늘은 애들이 뉴욕에서의 스케줄을 끝마치고 귀국하는 날이었다. ‘몇 시쯤 오려나? 이미 왔으려나? 이미 왔으면 프리뷰가 떴을 텐데 아직 안 뜬 걸 보니 도착하려면 멀었나 보다. 어? 잠깐만, 뉴욕?’


토끼눈으로 게이트 안내 전광판을 올려다봤다. 뉴욕에서 오는 항공편은 두 개가 있었다. 설마 저 둘 중 하나인가? 뉴욕발 항공편의 입국 게이트를 확인해보니 내가 앉아 있는 곳의 바로 옆 게이트였다. 난 뭔가에 홀린 양 빠른 걸음으로 옆 게이트로 향했다.


게이트 앞에는 대포 카메라를 든 홈마들과 아마도 팬이 아닌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오늘 누구 온대?’ 웅성거리며 한가득 모여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내 최애 그룹의 굿즈들을 발견하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도 그들을 ‘우연히’ 만날 수 있는 것인가! 덕계못의 공식을 파괴하는 날이 바로 오늘인가!!!


설레는 마음으로 동동거리며 10분쯤 기다렸을까. 갑자기 홈마들이 전장에서 사격 준비를 하는 군인들처럼 일제히 대포 카메라를 들고 게이트 자동문을 겨냥했다. 그 분주한 움직임을 따라 나도 사람들 틈을 비집고 벤치 의자 위로 올라서서 까치발을 들었다.


저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의 사람들이 게이트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자동문이 열리자, 사방팔방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카메라 셔터 소리가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 공항 전체에 무섭게 울려 퍼졌다.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그들이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거기에 있던 팬들과 홈마들 중 그 누구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아무런 말도 없이 서둘러 짐을 챙기고는 그들의 뒤를 쫓아갔다. 나도 그 무리 중 하나였다. 이렇게나 가까운 거리에서 본 건 처음이라 너무 신기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다. 벅찬 마음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핸드폰 영상으로 촬영하며 졸졸 따라갈 뿐이었다.


경호원들은 팬들을 향해 계속해서 나오시라고, 비키시라고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나오시라는 말은 분명 존댓말인데 뉘앙스는 거의 욕설 수준으로 난폭하게 들렸다. 물론 아티스트를 보호하는 것이 경호원들의 임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정도가 지나치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거기에 있던 팬들 중 그들을 건든다거나, 앞을 가로막는다거나, 소리를 지른다거나, 달려든다거나 한 팬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와 하는 이야기지만 그 그룹의 팬덤은 질서를 잘 지키기로 나름 유명하다.) 그러나 경호원들은 팬들이 마치 흉기를 들고 그들을 뒤따라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팬들을 함부로 대했다. 외려 팬들이 다칠 것처럼 조마조마한 상황도 있었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내가 사랑하는 그들은 얼굴 절반 이상을 덮을 정도로 커다란 모자와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계속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갔다.


공항 출입문에 다다랐을 때쯤 인파가 우르르 몰리는 바람에 나는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났다. 그렇게 그들은 시야에서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됐다. 떨리는 손으로 겨우 찍은 핸드폰 영상을 다시 확인해보니 현실이 맞았다. 그런데 영상 마지막쯤 다소 놀라운 장면 하나가 포착됐다. 경호원 중 한 명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카메라로 그들을 찍고 있던 팬을 손으로 세게 밀쳤고, 밀려난 팬이 순간 중심을 잃고 출입문에 쾅! 하고 부딪힌 것이다.


“나오라니까! 씨-”


경호원의 짜증 섞인 목소리와 함께 영상이 끝났다.     


내가 지금 뭘 본 건가 싶어 그 부분을 여러 차례 돌려보았다. 그럴수록 경호원의 목소리만 더욱 선명해졌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그들은 경호원이 뭐라 소리치든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고, 팬들이 바로 옆에서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러도 묵묵부답이었다.


내가 알던 다정한 그들은 온데간데없었다. 팬이 출입문에 부딪힐 때 울린 굉음과 그들의 침묵 사이에서 괴리감이 느껴졌다. 마음이 차게 식었다. 공항에 우두커니 서서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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