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글은 모르는 덕질의 이면
*흐린눈: 잘못된 것을 알고도 애써 모르는 척하는 모습을 비유한 것
탈덕을 시도한 게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던 일인 것처럼 나의 일상은 그대로 원상 복귀되었다. 아침에 눈뜰 때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덕질을 하고 J를 앓았다. 덕질을 알차게 하는 와중에도 한편으로는 생각했다. 앞으로도 내 인생에 탈덕이란 존재하지 않겠구나, ‘휴덕은 있지만 탈덕은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구나, 나는 어쩔 수 없는 본투비 덕후구나. 내 인생은 망했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떠들고 다니던 어느 날, 민들레 홀씨처럼 머릿속을 둥둥 부유하던 작은 생각 하나가 자리를 잡고 탈덕에 대한 열망을 틔웠다.
2019년, 나는 직업 특성상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업무 중에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잉여시간도 잦은 환경이어서 동료들과 둘 혹은 셋이서 모여 사적인 대화를 자주 나누었다. 그중에서는 대화가 술술 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듣는 이들이 전혀 관심 없을 법한 자기 이야기만 구구절절 늘어놓는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과 대화할 때는, 팬 사인회에서 팬이 뭐라 말하든 영혼 없이 ‘아 진짜요?’ ‘그렇구나’를 남발하던 아이돌 아무개 씨의 입장이 대충 이해되기도 했다. 어쨌든 대부분 일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고 좋은 사람들이라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대도 괜찮았다.
TMT(too much talker)인 동료와의 대화가 무의미하고 재미없어서 억지로 얘기를 들어주는 데 모든 에너지를 소진했던 날. 퇴근길 버스에서 피곤에 찌들어 축- 늘어진 채 ‘대화 주제’라는 것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직접 경험했던 일이나 일과 관련된 것들을 제외하고, 나는 어떤 주제의 이야기를 나눌 때 즐거움을 느끼는지 궁금해진 것이다. 호기심 뒤로 자연스레 따라오는 생각의 흐름을 저항 없이 감상했다.
앞서 말한 TMT직원과는 다르게 직장 동료 중 함께 있으면 시간이 후딱 지나갈 만큼 대화가 잘 통하던 동생들이 있었다. 우리의 접점과 이야기의 주된 주제는 언제나 ‘덕질’이었다. 덕질판에 상주하는 사람들끼리의 공감대란, 초면인 사람과의 거리도 단번에 좁혀주는 기묘한 힘이 있어서 그 친구들과는 만난 지 하루 이틀 만에 급속도로 맘을 텄다.
그 후로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기본적인 정보―나이, 사는 곳, 형제 관계 등―다음으로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는지부터 묻곤 했다.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대상이 아이돌이면 스스럼없이 덕밍아웃을 하고 덕질 얘기를 실컷 나누었다. 없다고 하면, 취미나 취향이나 최근 이슈 같은 쪽으로 주제를 돌렸다.
물론 내가 흥미를 느끼는 건 전자였으니 때로는 덕질 얘기가 아니고서야 무슨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몰라서 안 해도 되는 일을 굳이 만들어 자리를 피할 때도 있었다. 가끔은 대화 주제가 고갈되면 상대방이 연예인 덕질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J의 이야기를 툭 털어놓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왠지 익숙했다. 한두 번 겪은 게 아닌 것만 같았다. 대학교 입학식 날 자기소개 시간에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C의 이야기만 하지 않았던가.
“최근에 C가 주연인 영화 ○○○○이 개봉했으니 많이들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시사회 때 보고 왔는데 진짜 재밌더라고요.”
그제야 나는 지금껏 살아온 내 삶이, 진짜 내 삶이 아니었음을 알아차렸다. 스스로가 자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의 팬으로서만 존재한 것이었다.
나는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누구누구의 팬 말고, 사는 곳이나 나이 같은 뻔한 거 말고, 나 자신에게 붙을 수식어가 또 무엇이 있나? 나에 대해서 남들에게 뭐라고 설명할 수 있나?’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나는 스스로에 대해 잘 아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고민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으로 확장되며 생각의 혼란을 초래했다. 안 그래도 하고 있던 일에 대한 확신이 없던 시기였기에 불안은 급속도로 번졌다.
그때 당시 했던 일이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지만 평생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추구하는 이상은 무엇인지, 그 일을 하며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고민해본 적 없이 그냥 직업을 가졌다. 직업이 필요했던 이유는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고, 돈이 필요했던 이유는 앨범과 굿즈를 사고 콘서트를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 인생과 직결되는 심오한 질문들을 깊이 생각해보고 답을 내려보기엔 나는 언제나 덕질에 몰두하느라 시간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직업을 선택하기 전에 그런 것들을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조차 생각지도 못했던 것 같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보면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마련인데, 굳이 꼬리를 물지 않아도 이건 자괴감이 들 수밖에 없는 셀프 팩폭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그만 탈덕을 하고, 누군가의 팬이 아니라 나로서 존재하는 삶을 살고 싶어졌고 또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스스로를 완벽하게 설득할 수 있는 이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가성비 덕질’이라는 대안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조건 일단은 내 인생을 먼저 찾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간 애써 외면하고 있던 덕질의 이면과 정면으로 승부를 겨룰 때가 된 것이었다.
어쩌다 그들의 숨겨진 이면이라도 발견했다면 훨씬 수월하게 탈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꾸며진 모습일진 몰라도 수년에 걸쳐 알게 된 그들은, 팬들에게 배신감을 안겨줄 만큼의 행동들을 일삼는 추악한 유형의 인간들은 아니었다. 차라리 내가 그들에게서 쉽게 정을 뗄 수 있도록 충격적인 병크*라도 터뜨려줬으면 싶기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트위터 알계*를 뒤져보기까지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들은 아직(?) 신빙성 있는 알계가 붙진 않은 상태였다.
나에겐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만큼이나 습관적이었던 덕질을 단번에 그만두면 안 된다는 것을 지난번 탈덕 실패의 경험으로 체감했기 때문이었다. 수십 일동안 천천히 정리해본 결과, 과몰입 덕질의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었다.
(1) 현실도피 기질
우선 덕질에 과몰입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겠다. 과몰입 덕질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나 학업이 잘 풀리지 않거나 가족이나 친구, 지인 등의 인간관계에서 부담을 느끼는 등 일상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불만족을 느끼면, 그것을 덕질로써 해소하려 하는 ‘현실도피’ 기질이 있다고 한다. 문제가 있는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심리적으로 회피하며 애써 잊는다는 것이다. 이런 기질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집착으로 이어지며, 결국 과몰입 덕질로 귀결된다.
실제로 내가 덕질에 과몰입하기 시작했던 시기는 대학교 졸업 후였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취업 준비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지우고 싶어서 덕질로 눈을 돌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답을 내릴 수도 없고 복잡하기만 한 장래 고민을 하는 것보다 달콤한 덕질의 환상으로 머릿속을 채우는 게 쉽고 편하니까. 입에 단 게 몸에 나쁜 줄도 모르고 사탕 초콜릿만 고집하는 아이같이 정작 중요한 건 멀리하고 애먼 데 정신이 팔렸던 거다.
반대로 내 인생에서 덕질을 가장 소홀히 했던 시기는 대학생 때였다. 지금에 비하면 거의 안 했던 거나 다름없다.
글을 쓰며 살겠다는 의지로 문예창작과에 진학하자마자 입학과 동시에 제 발로 과학생회에 들어갔다. 우리 과는 예대에 속한 다른 과들에 비해 중요한 과 행사가 많은 편이었다. 백일장, 문학기행, 작가와의 대화, 학술제 기타 등등. 학회실에 살다시피 했던 우리는 각각의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날 때마다 성취감과 자부심을 느꼈다. 반면에 ‘과제창작과’라는 우리 과의 별칭답게 전공 과제들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어떨 땐 교수님들이 과제에 고통받는 우리를 보며 희열을 느끼는 사디스트가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였다.
거기다 교양 과목 과제, 시험공부까지 하려니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랐다. 학회일과 학점. 이 두 마리 토끼를 잡느라 쉴 틈 없이 바빴지만, 모두 나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즐겁고 보람찼다. 덕질이 인생에 끼어들 틈도, 그럴 필요도 없는 4년이었다. 졸업 이후에도 그 4년의 세월처럼 자기 계발에 열정을 쏟으며 살았더라면 이런 글을 쓰게 될 만큼 덕질에 빠져들지 않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인생에 문제가 되는 부분을 부딪치지 않고 계속해서 뒷걸음질 치며 피하다 보면 두 발이 절벽 끝에 다다르는 것은 시간문제다. 덕질로써 외면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가 있던 건 아닌지, 어떤 종류의 문제인지 생각해보고, 그것에 대한 해결 방안을 고민해보자. 그리고 절벽 아래로 떨어지기 전에 먼저 한 발 앞으로 내디뎌 보자. 현실을 직시하고 자기 계발을 위해 힘쓰는 사람들은 그렇게 덕질에 목숨 걸지 않는다.
(2) 유사연애의 기이함
다음으로, 누군가를 덕질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①최애가 만들어내는 콘텐츠들이 좋아서, ②최애가 롤모델이라서, ③유사연애 감정을 느껴서. 그중 남자 연예인을 덕질하는 사람들은 세 번째, 유사연애 감정으로 덕질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많다.
이렇게 유사연애 감정을 가지고 덕질을 하다 보면 그 대상의 아주 작고 사소한 부분까지도 사랑해주고 치켜세워주게 되는데, 대표적인 예로 ‘귀염(혹은 큐티)뽀짝’이라는 말이 있다. 원래 ‘뽀짝’이라는 말은 ‘바싹’을 뜻하는 전라남도의 사투리인데, 단어의 어감 때문인지 덕질판에서는 최애가 귀여워 보인다거나 행동이 아기 같아 보일 때 ‘귀염뽀짝’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래서 ‘뽀짝’을 사투리로 썼던 사람들이 도대체 왜 귀여운 걸 보고 ‘뽀짝’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한 글을 여러 번 목격했다)
예를 들어 최애가 팔보다 소매가 긴 옷을 입었을 때 ‘귀염뽀짝’ 하다고 하고, 걸어가는 뒷모습이 귀여워서 ‘귀염뽀짝’하다고 하고, 앉아 있는 게 귀여워서 ‘귀염뽀짝’ 하다고 하고, 서 있는 게 귀여워서 ‘귀염뽀짝’하다고 하고, 누워 있는 게 귀여워서 ‘귀염뽀짝’하다고 한다. 덕후가 아닌 사람이 이 얘기를 들으면 ‘도대체 뭐가 귀엽다는 거지?’ 싶겠지만, 최애의 삐죽 튀어나온 머리카락 한 올 갖고도 ‘우리 애가 이렇게나 귀여워요!’ 동네방네 떠벌리는 게 덕질판의 현실이다.
이처럼 덕질 대상의 별거 아닌 행동 하나까지도 깊이 관찰하고 사랑을 퍼부어주는 것은 이 세계에선 너무나도 흔한 일이다. 가끔은 누가 누가 더 레어(rare)한 부분에서 포인트를 잡아내는지가 그를 향한 애정의 척도라도 되는 것처럼 트위터 타임라인이 죄다 그런 글들로 도배될 때도 있다. 과거에 누군가와 사귀었을 때도, 그중에서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에게도, 지금 내가 최애를 대하듯 세세한 것까지 전부 사랑스러워하며 그를 떠받들진 않았다. 그런데 왜 덕질은 그 대상을 마치 신처럼 가닿지도 못할 존재로 느껴지게 하는 걸까. 이것이 바로 엔터테인먼트들이 수년에 걸쳐 치밀한 스타마케팅으로 세뇌한 성공적인 사례이자 허위광고를 족족 믿어버리는 우매한 소비자의 비극적 결말인 걸까?
그렇게 사사건건 최애에게 애정을 바치다 보면 자신의 삶에 소홀해지는 건 당연하다. 시소를 떠올려 보면 이해하기 쉽다. 최애가 앉아 있는 곳으로 나의 관심과 사랑을 쌓아주다 보면 반대편 끝에 놓인 나의 삶은 한없이 가벼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공중에 아슬아슬하게 발이 띄워진 채로, 나와는 다르게 안정적인 삶을 누리는 최애를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그와 나를 비교한 적이 많았다. 정도가 지나쳤을 땐 ‘감히’, ‘나 같은 게’ 따위의 말로 나를 낮추면서 망상은 절대로 실현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최애는 그만큼 잘났고, 나는 아니니까. 나의 말마따나 ‘감히’ 내가 나를 깎아내렸다.
또한, 유사연애 덕질의 중요한 문제점이 하나 더 있다. 유사연애 감정을 가지고 덕질을 하다 보면 이성이 마비돼 판단력이 흐려진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자신이 덕질하는 연예인이 범죄를 저지르거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킬 만한 행동을 했을 때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악착같이 피의 쉴드를 쳐놓고, 열애설이 터지면 곧바로 탈덕한 뒤 앞장서서 그를 욕하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소수의 이야기가 아니다. 덕질판에서는 허다한 일이다.
그들은 마치 덕질 대상이 본인과 연애하는 도중에 바람이라도 피우다 걸린 것처럼 그의 열애 자체를 범죄와 동일 선상에, 아니 그보다 더 나쁜 일로 치부하고 그를 마구 질타한다. 나의 추측으로는 ‘안티보다 탈덕한 팬이 더 무섭다’라는 말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 같다. ‘저에게는 팬 여러분들뿐이에요’ 해놓고 누군가와 진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는 데 배신감을 느낄 수는 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애인이 생기면 속상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중점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속상해하는 마음 자체가 아니라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감싸고 옹호해주었다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나도 그런 적 있었다. 이것도 E를 덕질할 때의 이야기다. 스캔들이 터지기 이전에 탈덕한 건 맞지만 그전까지 그를 욕한 적은 없었다. 단지 나의 상상 속의 E와 현실의 E가 자꾸 어긋나니까 그 간극을 받아들이기가 괴롭고 지쳤던 것뿐이었다. 사실 그때 당시 팬이었던 내가 봤을 때도 분명 그가 잘못한 일이 있었다. 악플러를 두둔하려는 건 아니지만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그를 욕하는 사람들의 글에 반박 댓글을 달고 악플들을 몽땅 캡처해서 소속사 메일로 파일을 넘겼다.
그 과정에서 상처 받는 사람은 E가 아니라 나였다. E는 내가 울면서 메일을 보내던 순간에도 자기 할 일 하며 잘 지내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렇듯 그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조차 그를 감싸고돌았으면서 스캔들이 터지자마자 그를 책망하며 나서서 비난했다. 그가 했던 말들이 전부 거짓말처럼 느껴져서 원망스러웠고 크나큰 배신감에 욕을 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몇 년이 지난 뒤, 이와 동일한 패턴을 보이는 팬들을 직접 겪고 난 후에야 이런 식의 덕질은 건강하지 못한 형태의 덕질이며, 유사연애 감정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조차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는 걸 알았다. 그 이후로 항상 ‘피의 쉴드는 치지 말자’는 마음으로 덕질을 해왔다.
이렇게 나노 단위로 최애를 앓았던 것처럼, 그의 잘못까지도 감싸주었던 것처럼, 그의 반만큼이라도 자신을 스스로 더 다독여주고 사랑해줬으면 어땠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남과 나를 비교하며 나의 미운 점과 불만족스러운 부분만 쏙쏙 골라 ‘나는 안 될 거야’, ‘내가 그걸 어떻게 하겠어’, ‘나는 왜 이럴까’ 속으로 못질했던 순간들이 후회되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최애에게 최대한 솔직하면서도 시적이고 아름다운 단어들로 나의 마음을 표현하려 노력하듯,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건넬 때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했다. 그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아니 그보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제부터라도 내게 좀 더 따듯하게 말하는 연습을 해야겠다.
(3) 타인 덕질 VS 자아 덕질
과몰입 덕질이 수많은 역기능을 생산하는 가운데 그래도 아직 희망은 남아있다. 누군가를 과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스스로에게도 무한한 사랑을 퍼부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능숙한 우리는 그 대상만 최애에서 본인으로 바꾼다면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긍정적인 차원의 나르시시즘적 인간도 얼마든 될 수 있다.
타인을 덕질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엔 이런 예가 있다. 최애가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고 그로 인해 대리 만족하며 행복감을 얻을 수 있다, 최애를 보며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 콘서트나 팬미팅에서 소속감을 얻을 수 있다, 일상생활을 살아갈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힘든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다, 내일이 기대되는 삶을 살 수 있다, 열심히 사는 최애를 보며 동기부여를 받을 수 있다 등.
그렇다면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았을 때 내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어떤 게 있을까. 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해 쓸 수 있다, 운동함으로써 건강해질 수 있다, 독서를 통해 교양과 지식을 쌓을 수 있다, 색다른 취미를 경험해볼 수 있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다, 돈을 모을 수 있다, 여행을 갈 수 있다, 직업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 목표를 달성하고 꿈을 이룰 수 있다 등.
두 가지 모두 뚜렷한 장점이 있다. 타인 덕질의 경우 소확행을 얻을 일이 잦고 기대감을 충족할 수 있다. 이는 내가 덕질에 중독됐던 이유이기도 하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무언가를 남겨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덕질을 통해 활력과 재미를 얻을 수 있다는 건 분명한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덕질이 가져다주는 정서적 만족감의 주체는 누구인가? 바로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다. 타인이 존재하지 않으면 즉, 덕질 대상이 없으면 느낄 수 없는 감정이라는 얘기다. 그렇기에 한 번 덕질의 맛을 본 이들이 계속해서 의지할 누군가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감정은 도파민처럼 짧고, 강렬하며, 파괴적이고, 쉽게 중독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또한, 덕질로 얻을 수 있는 소확행은 소비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과소비를 불러일으킨다는 문제점도 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우스갯소리로, 덕후들은 아이스크림이 2,000원일 때는 비싸다고 하면서 굿즈가 20,000원일 때는 오, 저렴한데? 한다는 말이 있다. 나도 이와 같은 경험을 한 적 있었다(한참 지난 일들까지 세어보면 끝도 없다). 마트에서 1L짜리 우유를 사려는데 몇백 원 차이가 나는 두 가지 브랜드가 있어 오랜 시간 비교하고 고민한 끝에 더 저렴한 것을 사놓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최애 그룹이 표지 모델인 잡지를 발견하자마자 고민도 않고 구매한 것이다. 잡지의 가격은 내가 고민 끝에 선택한 우유의 5배 정도였다. 이렇듯 타인을 덕질하는 것에는 확실한 단점들이 존재한다.
반면, 자아 덕질은 타인 덕질보다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것을 누릴 수가 있는, 무조건 흑자인 투자다. 타인을 덕질하는 것과 달리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결과물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시간, 돈, 건강, 체력, 지식, 교양, 능률, 경험, 경력, 직업 등이 그 예다. 동시에 삶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자신감과 자존감이 높아지고 더 나은 인격체로 발전할 수 있다.
꾸준히 자기 계발을 위해 노력한 끝에 마침내 자아실현을 이루게 된다면, 그때 다가올 행복의 크기는 덕질이 가져다주는 소확행엔 비할 수 없을 만큼의 대확행일 것이다. 이는 정신적으로 긍정적인 작용을 할 뿐만 아니라 세로토닌에 의한 행복감처럼 잔잔하게 오랜 시간 지속되어 삶의 전체적인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
아울러 타인을 덕질하며 사랑을 주는 이의 기쁨만을 느낄 수 있었다면, 자아 덕질은 주는 기쁨과 받는 기쁨, 두 가지 모두를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나를 위한 삶엔 단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왜 이렇게 과몰입 덕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지 문제점을 확실히 인지하고 나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렇듯 정말로 과몰입 덕질을 그만두고 싶다면 ‘왜’ 자신이 덕질에 집착하게 되는지, 그 이면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흐린눈, 이제 그만합시다.
*병크: 병신짓+크리티컬(critical)의 합성어로 논란이 될 만한 행동이나 사건을 뜻한다.
*알계: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루머를 생산하거나, 그것을 퍼다 나르거나, 금전 거래를 하거나, 악플을 달기 위해 만드는 트위터의 일회성 아이디. 프로필 사진을 따로 설정하지 않으면 달걀 모양이 기본 사진인데 흔히 이런 용도의 계정은 사진을 설정하지 않으므로 ‘알+계정’을 합쳐 ‘알계’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