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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라 Apr 03. 2021

입덕부정기는 짧을수록 좋다지만

재입덕의 변 (1)

앞서 프롤로그에서도 짤막하게 이야기했지만, 이 글은 2020년 봄에 독립출판물로 출간되었다. 제목은 <나는 나의 팬이 될래요>이다. 유명해지고 싶다거나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책은 아니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탈덕하려고’ 만든 책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과몰입 덕후 생활부터 청산하고 나만의 인생을 살아갈 계획이었다. 그리고 연예인 공화국인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을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독립출판물로 제작했던 것이었다. 너무 감사하게도, 내 책이 실제로 도움이 되었다는 독자분들의 진심 어린 메시지와 장문의 메일도 몇 번 받았었다. 한 독자분의 메시지를 읽고 펑펑 운 날도 있었다.


그 책을 쓰면서 덕질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탈덕의 필요성을 확실히 알게 된 덕에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탈덕할 수 있었다. 미련 없이 팬카페를 탈퇴하고, 그들의 사진과 영상을 지우고, 앨범과 포카, 공굿(공식 굿즈), 비공굿(비공식 굿즈)들을 전부 내다 팔거나 무료로 나눔을 하고, 유튜브 채널 구독도 취소하고, 트위터 계정도 삭제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슬프다거나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정말 영원한 이별이었다.




그 뒤로 나에겐 48시간 같은 24시간이 매일매일 새롭게 주어졌다. 덕질만 안 할 뿐인데 이렇게 많은 시간이 생기다니! 때마침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 신분으로 있던 터라 뭘 해도 시간이 남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대충 흘려보내는 걸 못 견디는 나는 그때부터 미친 듯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긴 했지만 불과 2년 전까지 아이러니하게도 책과 나는 서로 낯을 가리는 사이였다. 나는 활동적이었고, 덕질하느라 바빴고, 가만히 앉아 책만 읽기엔 별로 인내심이 없었다. 책이 비둘기도 아닌데 주변에서 책만 발견하면 물리적 거리를 뒀다. 이번 기회에 그 어색함도 없애고, 책을 통해 나의 세계를 더 확장해볼 계획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수개월 동안 읽은 수십 권의 책 중, 나의 인생 가치관을 바꿔놓은 책이 하나 있다. 최태성 선생님의 『역사의 쓸모』이다. 그 책을 읽고 인스타그램에 남긴 독후감 중 일부를 가져와 봤다.     


책을 읽으며 문득 깨달은 점이 있는데 내가 역사를 과거에 한정된 시간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앞으로 다가올 미래도 모두 ‘언젠가의 역사’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그렇기에 무책임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내 삶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후세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조차 쓰지도 않았다.

그런데 만약 100년 전, 200년 전, 5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나는 지금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었을까?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신분제는 폐지될 수 있었을까?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아마 그 어떤 것도 바꾸지 못했을 것이고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나도 역사에 무임승차하면서 비겁하게 살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까지 무탈하게, 엇나가지 않고 잘 살아온 데는 우리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뿐만 아니라 세세하게 따져보면 수백 명도 더 되는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나에게 깨달음을 준 글을 쓴 사람들, 아픈 나를 치료해준 사람들, 가르쳐준 선생님들, 후세를 위해 인권 투쟁을 한 사람들,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킨 분들 등등. 그런데 그냥 나 혼자 잘 먹고 잘살다 가면 과연 그게 진짜 ‘잘’ 먹고 ‘잘’ 살다 가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삶일까 싶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덕에 오늘의 내가 존재하듯 나 또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떤 방식이든, 그 크기가 작든 크든 상관없이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 사람이 멋져서가 아니라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게 28년 만에 처음으로 깨달은 ‘진짜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구분해서 적었다. 그다음, 교집합이 되는 부분을 들여다보니 ‘출판 편집자’라는 직업이 있었다. 아무래도 전공이 이렇다 보니 글을 좀 다룰 줄도 알았고, 누군가의 삶에 도움을 주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란 무수히 많겠지만 그중 책만 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책의 매력에 푹 빠져 있던 시기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운이 좋게도 취준을 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금방 좋은 곳에 발을 들이게 됐다.

     



그쯤 내 친구 유경이가 갑작스레 입덕 소식을 알렸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대상이 불과 얼마 전까지 내가 덕질했던 아이돌 그룹의 멤버 S였다. 역시 덕통사고란 아무리 옆에서 들이받으라고 갖다 대줘도 소용이 없고, 본인이 스스로 갖다 박아야 하는 거란 게... 이런 이유 때문이구나 싶었다. 내가 4년 동안 유경이에게 보여준 S 사진이 오조오억 장이었는데 그때는 꼼짝도 안 하더니, 이제야? 갑자기? 이렇게? 뜬금없이? 입덕을? 정말 믿기지도 않고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아주 아주 잘 아는 그룹에 입덕을 했다고 하니 흥미롭긴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 누구도 덕질하지 않는 무(無)최애 상태였다. 집-회사-집-회사만 반복되는 흔한 직장인의 삶을 살면서 책도 많이 읽고 꾸준히 운동도 다녔다. 


그러나 아무리 직장이 좋고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해도 매일매일 반복되는 왕복 3시간 30분 출퇴근이 만만한 건 아니었다. 때로는 너무 지쳐서 ‘어쨌든 통근이 가능한 거리’에 사는 게 불행이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차라리 아예 통근이 불가한 먼 지역에 살았더라면 어떻게 해서든 서울에 거처를 마련했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직장이란 내가 원하는 사람들과만 일할 수 있는 곳이 아니고,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는 곳도 아니므로 여러 부수적인 문제들도 점차 눈에 들어왔다. K-직장인이라면 대부분 그렇겠지만, 하루에 한 번도 웃지 않은 날도 많았다. 예전 같았으면 이럴 때 연차를 써서 며칠이라도 여행을 다녀왔을 텐데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여름 내내 쏟아진 장맛비에 내 마음에도 폭우가 내렸다. 번아웃 증후군이 꼭 직장을 오래 다녀야만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저녁, 유경이와 카톡으로 S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유튜브에서 유경이에게 보여줄 S의 어떤 영상을 찾다가, 재미교포인 S와 다른 아이돌 그룹의 교포 멤버인 M의 영어 발음을 비교한 영상을 찾았다. M은 유명한 아이돌 그룹의 멤버였고 나도 이름은 몇 번 들어봤지만 M의 얼굴도, 목소리도, 그룹 내 포지션도 몰랐다. ‘요즘은 이런 콘텐츠도 있구나’ 하며 링크를 유경이에게 보내주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10분짜리 영상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아니 이렇게 귀엽게 생긴 애가 있었다고?’

‘아니 근데 이렇게 말도 잘한다고?’

‘아니 진짜 너무 잘생겼는데?’

‘아니 실력도 좋다고?’

‘아니 인성도 괜찮다고?’


‘아니... 아니 잠깐만... 내가 여태 얘를 몰랐던 게 말이 돼?’     


아니, 말도 안 된다. M을 모르고 살았던 것도 말이 안 되고, 다시 누군가에게 두근대기 시작한 내 마음도 말이 안 됐다. 덕통사고라니 그건 겨우겨우 탈덕한 나에겐 있을 수 없고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탈덕할 거라고 글로써 공개 선언까지 하지 않았나! 에이, 설마,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영상을 껐다.     


그러나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이게 바로 입덕부정기라는 것을. 그리고 또 알고 있었다. 입덕부정기는 짧을수록 좋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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