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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라 Apr 04. 2021

내가 자의식 과잉이었다니

재입덕의 변 (2)

M에게 입덕을 할지 말지 빠르게 정해야 했다. 입덕할 거면 입덕부정기는 최대한 짧아야 하고, 입덕하지 않을 거면 간잽하는 게 시간 낭비인 셈이니까. 내 머리는 입덕하지 말라고 정신 좀 차리라고 하는데 마음은 제멋대로였다. M이 점점 좋아진 것이다. 진짜 무슨 저런 애가 다 있나 싶을 정도로 M은 아이돌로서 완벽했다. 아주 작은 병크 하나조차 없었다. 파도 파도 미담만 나올 뿐이었다. 소설 속 남자 주인공으로 M을 내세우면 캐릭터 설정 과다라고 욕먹을 수준이었다.


갈피를 도저히 잡을 수가 없어 엄마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엄마는 내 생애 모든 덕질 역사를 다 알고, 진심으로 내 마음을 이해하고 존중해준 유일한 어른이기 때문이었다. 작은 사위가 자주 바뀌어 헷갈렸을 법도 한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늘 관심을 가지고 애정어린 시선으로 지켜봐 주셨다. 내가 쓴 탈덕책도 두 번이나 완독하셨다.


“엄마, 내가 얼마 전에 책도 내고 J도 탈덕했잖아. 근데 또 다른 애가 좋아지려고 해. 어떡하지? 너무 창피해. 책 괜히 냈나 봐.”


그러자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를 좋아하는 게 왜 잘못이야, 싫어하는 것도 아닌데. 네가 네 할 일 잘하면서 좋아하는 건 괜찮지.”


그 이야기를 들은 즉시 나는 고민을 접고 M에게 입덕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몰입 덕후 시절처럼 M의 모든 것을 일일이 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영상을 다 찾아보지도 않았다. 본래 덕질을 제대로 하려면 일단 모든 콘텐츠를 다 복습해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①팬들이 부르는, 또는 멤버들 사이에서 불리는 별명(애칭)의 탄생 계기를 알 수 있고 ②웃겼거나 특별했던 에피소드를 함께 즐길 수 있으며 ③그래야 팬덤 사이에서 일컬어지는 어떤 은어라도 다 찰떡같이 알아듣고 늦덕(뒤늦게 입덕한 사람)이라 해도 소외되지 않기 때문이다.


떡밥 복습을 안 했기 때문에 오래된 찐팬이 아니고서야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을 자주 맞닥뜨렸다. 그러나 잘 이해되지 않는대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냥 넘어갔다. 더 이상 내 현생이 무너질 정도의 과몰입 덕질은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라이트하게 덕질을 한대도 누군가를 다시 덕질한다는 것 자체가 그리 떳떳하진 않았다. 외려 창피하고 민망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털어놓았을 때 “나는 나의 팬이 된다면서요?” 하는, 내 책 제목을 활용한 농담도 여러 차례 듣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거 SF소설이야” 하고 우스갯소리로 받아치긴 했지만, 속으로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나 자신에게 화도 났고 스스로를 우스운 꼴로 만든 것 같아서 내게 미안했다. 가끔은 책을 낸 것이 후회됐고, 후회한 것 또한 후회했다.


주변인들의 반응이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닌 걸로 미루어 짐작건대 나의 글을 읽어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내게 실망하고 말 게 뻔했다. 타인의 행동에 대한 원인과 과정은 생략하고, 오로지 결과만으로 마음대로 판단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누군가를 또 덕질하게 되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꼭꼭 숨기며 지냈다. 뱉은 말이 있는데 이래도 되나 양심에 찔려서, 잘못된 일이 아니란 걸 아는데도 M을 볼 때면 죄짓는 듯한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얼마 전, 친한 대학교 선후배를 만날 일이 있었다.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후배가 갑자기 클러치백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연분홍색의 네모난 모양의 익숙한 저것은, 다름 아닌 내 책이었다. 사인을 받으려고 가지고 왔다며 수줍게 네임펜과 책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거기서 나는 후배에게까지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서 민망하게 웃으며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지금도 누군가를 덕질중이라고, 그런데 너무 창피해서 친한 사람들 외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그간 다른 사람들에겐 말하지 않았던 속 이야기까지 꺼내서 두 사람에게 털어놓았다.


그때 옆에서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네가 정치인이나 유명 연예인도 아닌데 한 번 했던 말을 꼭 완벽하게 지킬 필요가 있을까? 심지어 정치인들은 지가 뱉은 말도 잘 안 지켜. 덕질하는 게 범법도 아니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네가 탈덕하겠다고 해놓고 다시 덕질한다고 해서 손가락질할 사람 아무도 없어. 만약 누군가가 너에게 실망을 한다고 해도 그건 그 사람의 문제지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야.”


단 한 번도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준 적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기에 선배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에 완전히 몰입되었다. 그곳은 사람이 바글바글한 주말 저녁 강남 한복판의 카페였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 나와 선배 둘뿐인 것 같았다. 선배의 말을 모조리 텍스트화해서 머릿속에 박제시켜놓고 싶을 정도로, 새로운 발상의 주옥같은 말이 줄줄 이어졌다. 감탄을 금치 못할 때쯤 선배는 다소 충격적인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사실 이렇게 자기가 한 말을 모두 철저히 지키려고 하는 것도 일종의 자의식 과잉이래. ‘나’는 무결점이어야 하고 완벽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는 것이니까.”


너무 큰 충격에 눈을 하도 크게 떠서 사백안이 됐다. 내가 자의식 과잉이라니, 내가 자의식 과잉이라니! 말도 안 된다. 아니 말이 되어선 안 됐다. 자의식 과잉형 인간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자의식 과잉이라니…….


믿고 싶지 않았지만, 말도 안 되는 말이길 바랐지만, 선배가 했던 말을 돌이켜보면 틀린 얘기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항상 완벽해지고 싶었고 그렇기에 내가 했던 말은 모두 지키려고 애썼다. 아니 완벽해지고 싶다기보다 완벽해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남의 시선을 별로 신경 안 쓴다고 생각했는데 이것 역시 나의 착각이었다. 남들이 나를 ‘자기가 한 약속도 못 지키는 한심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욕할까 봐 두려워 벌벌 떨었던 내가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왜 완벽해야 하지? 내가 왜 무결점이어야 하지?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이건 애초에 답이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나는 완벽할 필요도 없고 무결점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스스로 한 말을 전부 지켜야 할 의무도 없고 남들에게 잘 보여야 하는 이유는 더더욱 없다. 그리고 나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나를 멋대로 판단할 권리는 없다. 


내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될 필요도 없다는 걸 깨닫자 솔직하게 고백할 용기가 생겼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문제 될 건 없었으나 나에게 고맙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진심으로 탈덕을 응원해준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최소한의 책임은 지고 싶었다. 그리고 기왕 고백하는 김에 ‘건강한 덕질법’에 대해서도 다음 글에서 한번 소개해보겠다.




실제로 예전과 지금 내가 최애를 덕질하는 방식은 비슷하지만, 최애를 대하는 태도나 덕질에 대한 인식 자체는 180도 달라졌다. 지금 나는 언제든 바로 탈덕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 정도의 마음으로만 덕질을 하는 중이다. 현생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오직 재미를 위해서만 덕질을 하고 있으므로 당장 탈덕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런 마음가짐을 유지할 수 있는 건 탈덕 후에 혼자만의 시간을 길게 가지면서 구체적인 삶의 목표를 정하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안정적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 인생에 한 번이라도 덕질에 대해 고찰하고 자발적으로 탈덕을 해볼 기회가 없었더라면,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무런 발전도 없이 내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조차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오직 덕질에만 의존하고 시간을 할애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 내가 원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다. 그건 누구나, 어떤 일을 해도 마찬가지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 시간을 잘 견뎌내려면 일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재미있게 보내면서 우울에 빠지지 않도록 일과 휴식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지금 나에게 덕질은 숨을 돌릴 공간이자 휴식 시간, 딱 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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