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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라 Mar 26. 2021

내 인생에 후폭풍은 없을 줄 알았는데

탈덕때문에우는 여성이 있다...?

연애를 오래 하다 보면 별의별 이유로 권태기가 찾아오듯 공항 사건 이후로 나에게도 덕질 권태기가 찾아왔다. 그러한 것을 목격하고도 이전과 같은 마음으로―그들이 항상 팬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거라고 정신승리를 하면서 덕질을 이어나갈 수는 없었다. 권태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이별하게 되는 연인들처럼 나는 결국 덕질 권태기를 이기지 못하고 그들과 헤어지기로 마음먹었다. 햇수로 따지면 3년째 덕질중이었으니 이 정도면 그만할 때도 됐지 싶기도 했다.


우선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던 그들의 사진 수만 장과 수십 개의 영상을 삭제했다. 앨범엔 나의 일상적인 사진들도 마구 뒤섞여있어 일일이 그들의 것들만 골라내는 과정이 번거롭고 짜증이 났다. 아무리 지우고 지워도 다시 확인해보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사진들이 여기저기서 하나둘씩 튀어나왔다.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해 열심히 삭제한 결과, 약 20GB의 저장공간이 생겼다.


트위터 어플도 지웠다. 계정을 아예 탈퇴해버릴까 고민하다가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에 일단 어플만 없앤 것이다. 그간 리트윗을 하고 마음(좋아요)을 누른 수천 개의 게시글이 한꺼번에 날라간다 생각하니 좀 아깝기도 했다.


벽에 붙어있던 J의 사진들과 커다란 액자를 떼어내자 예전보다 훨씬 더 깨끗해지고 넓어진 것처럼 보이는 내 방이 꽤 마음에 들었다. 너무 깔끔해서 인터넷과 잡지에서 봤던 미니멀리스트의 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굿즈 박스는 단번에 내다 버리기도, 당근에 팔아버리기도 애매해서 일단 그 자리에 그대로 두기로 했다. 산뜻한 마음으로 대청소를 모두 끝낸 후에 발견한 얼룩처럼 굉장히 거슬리고 찝찝했지만 그것이 아주 꼴도 보기 싫다거나 싹 다 치워버리고 싶을 만큼 그들에게 완전히 정이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순조롭게 탈덕이 진행되나 싶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시간이 갈수록 후련함보다 허전함이 점점 커지는 것이었다. 무언가가 몸을 관통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듯 마음이 텅 빈 것 같았다. 그 사이로 찬바람이 드나들었다. 가만히 있다가도 갑자기 눈물이 차고 목이 멨다. 보기 싫은데 보고 싶은 마음이 어쩐지 우습고 가여워 자주 자기 연민에 빠졌다. 그동안 연애가 끝난 후에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하루라도 그들의 소식을 모르고 지나치는 건 아무래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사진이나 영상은 저장하지 않되, 팬카페와 트위터만큼은 당분간 드나들 수 있게끔 스스로 풀어준 것이다. 헤어진 연인의 SNS를 몰래 염탐하는 사람처럼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탈덕의 후폭풍을 맞고는 원래 있던 그 자리로 되돌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흐려짐과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그들이 얼굴을 내비칠수록 탈덕을 결심하게 했던 공항에서의 그들의 모습은 기억의 소각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의지의 불꽃이 꺼질 때마다 다시 불을 붙이고,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장작을 넣고 부채질해댔건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음을 어떻게 해보려는 것만큼 억지스럽고 미련한 짓은 또 없었다.


‘이러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사진을 저장하고, ‘이러면 안 돼’라며 나를 다그치면서도 각종 유튜브 영상들을, 이미 본 것들조차도 나중에 볼 동영상 목록에 담아두고 있었다. 탈덕하기로 했으면서 잘생기고 귀여운 그들을 보면 저절로 웃게 되는 나는 정말 바보 천치 그 자체였다.


새 앨범 발매 쇼케이스에 말도 안 되는 확률로 당첨이 되면서 내 탈덕으로의 여정은 우당탕탕 급하게 막을 내렸다. 심지어 돈도 한 푼도 안 쓰고 당첨이 된 건데 설상가상(?)이었던 건 내가 뽑은 자리가 무대 바로 앞에서 두 번째 줄, 게다가 정중앙이었다는 것이었다. 4K 화질 급으로 선명한 그들의 실물을 2시간 내내 보고 나서 나는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 탈덕은 개나 줘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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