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나의 평범했던 하루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고 생각했던 과몰입 덕후 시절의 어느 날, 나는 내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문득 궁금해져서 그날 아침부터 밤까지 나의 일상을 자세히 기록해보았다. 그날의 일기를 소개해보겠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을 확인한다. 밤사이에 어떤 새로운 떡밥들이 올라왔을지 모르니. 그들은 어젯밤 공식 팬카페에 2건의 글을 작성했고, 새벽 3시쯤 잠이 안 온다며 브이앱으로 약 30분 동안 방송을 했다. 라이브 방송을 놓치다니 한탄스럽도다.
브이앱 영상은 '다시보기'가 올라오면 보기로 하고 일단 스킵. 공식 팬카페에 한 멤버가 쓴 글부터 빠르게 읽는다. 크게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이었다. 안심하려던 것도 잠시, 댓글창으로 가보니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다. 글을 쓴 멤버가 몇몇 팬들의 댓글에 답댓글을 달아주며 한 시간 정도 소통을 한 것 같다. 답댓 받은 사람들 진짜 부럽다. 에휴, 일찍 잠든 내 잘못이지.
착잡한 마음으로 팬카페에서 빠져나온다. 핸드폰 알림 창엔 공식 트위터 계정과 유튜브 계정으로부터 콘텐츠 홍보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이미 본 것이었다. 오른쪽 위에 있는 ‘모든 알림 지우기’ 버튼을 누른다.
알림들을 모두 확인하고 나면 다음으로는 트위터를 훑어야 한다. 트위터는 세 가지의 장점이 있다. 첫째, 어느 곳보다 빠르게 그들의 소식을 접할 수 있다는 것. 둘째, 각종 보정 별로 올라오는 고화질 사진들과 GIF짤들을 주울 수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그들을 낱낱이 앓는 입담 좋은 계정들을 통해 내가 놓쳤던 부분까지도 꼼꼼히 덕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떡밥을 떠먹여 주는 계정은 널리고 널렸다. 그러니까 덕후에게 트위터는 곧 ‘덕질의 성지’인 셈이다.
피드를 새로고침 하자 밤사이 업로드된 게시물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스크롤을 쭉쭉 내려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게시물로 간다. 거기부터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팬들이 쓴 글들을 읽고, 사진들을 저장한다. 그중 웃기거나 공감하는 내용의 글들은 홍익인간 정신으로 바로바로 리트윗 해주어야 한다.
외출 준비를 하는 동안엔 블루투스 스피커로 그들의 음악을 틀어 놓는다. 오늘은 날이 맑아 그중에서도 신나는 음악들을 플레이리스트에 담았다. 수천 번도 더 들었을 곡이지만 들을 때마다 새롭고 짜릿하다.
아침을 먹을 땐 음악은 잠시 끄고 유튜브로 그들의 영상을 본다. 오늘은 어제저녁에 봤던 30분짜리 콘텐츠를 다시 봤다. 유튜브 공식 채널에 업데이트되는 콘텐츠들은 기본적으로 최소 5번 이상은 봐주어야 한다. 볼 때마다 새로운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재미있던 편이나 유독 최애가 많이 나왔던 콘텐츠는 아마 20번 이상은 봤을 것이다. 세세한 효과음까지 다 외울 정도로 여러 번 되돌려 봤던 건 100번 넘게 봤을지도 모른다. 약속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도 당연히 그들의 노래를 듣거나 영상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오늘은 공휴일이라 친한 친구 민지를 오랜만에 만났다. 민지는 나의 18년 지기 절친이자 나처럼 1n년째 꾸준히 덕질 중인 덕질 마스터다. 대상이 다르기에 나와는 완전한 덕메라고 할 수는 없지만, 똑같이 덕질을 한다는 점에선 덕메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마터면(?) 우린 덕메가 될 뻔도 했다. 한때 민지가 덕질 중인 아이돌 그룹을 내가 간잽했으니.
이렇게 덕후인 친구를 만나면 관심사가 비슷한 만큼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각자의 팬덤 내에서, 덕질하는 그룹 내에서 최근에 일어난 사건, 소속사 뒷담, 내 새끼 칭찬과 자랑, 앞으로 올라올 떡밥이나 머지않은 스케줄 등등 주제는 다양하다. 오늘은 오랜만의 만남이라 그간의 근황 토크를 하다가 밀린 덕질 이야기를 쏟아냈다. 민지는 전염성 바이러스 때문에 예정되어 있던 멤버 생일 카페 이벤트들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다며 속상해했다.
생일 카페 이벤트란 주로 홈마들 혹은 서포터즈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데, 최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일정 기간 카페를 빌려 그 공간을 최애의 사진들과 각종 굿즈들로 꾸며놓고 소소한 전시를 하는 것이다. 음료를 시키면 이벤트 주최자가 직접 만든 컵홀더를 끼워 주고, 포토카드나 스티커 등의 특전을 증정해주기도 한다.
카페 이벤트 이야기를 하니 생각난 건데, 민지의 최애 K와 나의 최애 J는 생일이 똑같다. 그래서 재작년에 워킹 홀리데이를 떠난 민지를 대신해서, J의 생일 카페 투어를 할 겸 K의 생일 이벤트를 하는 곳에도 들러 컵홀더를 받아다 선물해준 적이 있었다. 온통 타팬들 뿐인, K의 사진으로 도배된 공간 안에서 타 그룹의 음악을 연달아 들으며 혼자 음료를 쪼로록 마실 때의 그 묘한 기분은…. 새로운 반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전학생처럼 숨 막힐 듯이 어색하고 소외감이 들어서 커피를 절반 이상 남긴 채 얼른 카페를 벗어났더랬다.
민지와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와서는 몇 시간 전 업로드된 새로운 콘텐츠를 보느라 아직 씻지도 못했다. 유튜브에 영상이 올라오면 단순히 그걸 보기만 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트위터를 돌며 사람들이 올려놓은 짤이나 보정된 캡처 등을 저장해야 한다. 나중에 해도 되긴 하지만 한 번 밀리면 밑도 끝도 없이 쌓이는 게 떡밥이다. 몇 년 전 해외여행을 갔을 때 유심에 문제가 생겨 며칠간 핸드폰을 쓰지 못했던 적이 있었는데, 여행이 끝난 뒤 밀린 덕질을 몰아서 하려니 엄두가 안 나 아예 건너뛰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니 될 수 있는 한 실시간으로 달리는 편이 좋다.
이제 곧 침대에 누워서 유튜브로 그들의 눕방을 보다가 스르륵 잠들 예정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여기까지가 과몰입 덕후 시절 내 일상의 풍경이었다. 텍스트로 적어보고 난 뒤에야 얼마만큼 덕질이 나의 일상에 깊숙이 침투해있었는지를 알게 됐다. 그때의 나에게 덕질이란 자리에 앉아 작정하고 하는 숙제 같은 것이 아니라,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도 익숙한 일이었다.
덕질은 애정을 바탕으로 한 열정이 없으면 아무나 쉽게 못 하는 것이다. 게다가 부지런하기까지 해야 한다. 부지런히 덕질하고,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덕질 비용을 위해 월급은 필수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