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끼라 Mar 24. 2021

앞으로도 너는 사랑만 받았으면 좋겠어

나의 천년의 아이돌 J

E를 탈덕한 후로 아무도 덕질하지 않고 있던 2017년 여름, 지하철에서 심심풀이로 한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를 보게 됐다. 기억하기로는 그 곡의 활동 기간이 다 끝난 후였다. 대체 왜 갑자기, 멤버가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 그들의 영상이 궁금해졌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들의 퍼포먼스를 제대로 감상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별 감흥 없던 마음과는 다르게 나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지고, 다트 핀이 재빠르게 날아가 꽂히듯 핸드폰 화면에 시선이 고정돼버렸다. 뮤직비디오 속 그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멋있었다. 제작비를 쏟아부은 것처럼 보이는 고퀄리티 영상에선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간 나에게 그들은 열정적이고 활발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지만, 이번 신곡은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어딘가 잔잔하게 슬퍼 보이는, 그러면서도 역동적인 퍼포먼스였다. 이미지 변신을 하는 게 그들의 목표였다면 이미 달성하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난 그들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었으면서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왠지 모를 충격에 휩싸여 곧바로 뮤직비디오를 한 번 더 돌려보았다. 노래만 들었을 때보다 퍼포먼스와 함께 보니 익히 들어 잘 알던 곡인데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날부터 뜬금없이 그 노래에 꽂혀 하루에도 수십 번을 반복해서 들었다. 그들에게 입덕 중인 줄도 모르고. 음악방송 무대는 어땠을까, 연습 영상은 어떨까, 호기심이 몽글몽글 피어나서 하나씩 전부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중요한 사실을 알아챘다. 내 시선이 자꾸 J를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J는 내가 여태 덕질해왔던 사람들과는 완전 다른 스타일이었으니까. 그는 나의 이상형인 정상훈과는 거리가 아주 먼, 귀엽고 깜찍한 사람이었다(나에게 정상훈은 귀여운 것보다는 다정하고 듬직한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데 도대체 왜! J만 주시하게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J에게 단 요-만큼도 관심이 있던 게 아닌데 말이다. 영상을 넋 놓고 보다가, 사진을 저장하려다가, 번뜩 정신이 들어 인터넷을 후딱 꺼버리기 부지기수였다.




J는 사람을 홀리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만 같았다. J한테 입덕한 거냐고 물어보는 친구에게 말이 되는 소릴 하라고 소리쳐놓고, 뒤에선 J의 정보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꼼꼼히 인터넷을 뒤지며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었다. 생일은 언젠지, 고향은 어딘지, 혈액형은 무엇인지,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취미는 무엇인지, 좋아하는 가수는 누구인지, 언제부터 어떻게 왜 음악을 하게 됐는지, 누구와 친한지,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뭘 잘 먹고 뭘 못 먹는지. J에 관한 모든 걸 알고 싶었다.


얼마 후 친구들과 여름휴가를 가던 버스 안에서, 정말이지 이건 저장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은 J의 예쁜 사진을 발견하는 바람에 ‘이미지 저장’ 버튼을 누르고야 말았다. 입덕부정기의 종식을 선언한 셈이었다.


그때부터 J의 덕질을 향한 여정에 닻을 올렸다. 얼마나 열심히 일했으면 데뷔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콘텐츠 수가 실로 어마어마했다. 잘나가는 아이돌답게 트위터 홈마(‘홈페이지 마스터’의 줄임말로, 연예인의 고화질 사진 또는 영상을 촬영하여 자신의 계정에 업로드하는 사람)도 여럿인지라, 같은 날의 사진이어도 순간순간마다 다각도로 찍힌 사진들이 각양각색 보정 별로 올라와 트위터를 장악했다. 출퇴근길부터 잠들기 전까지도 틈틈이 사진을 줍고 영상을 보며 뒤늦게 진도를 따라잡느라 수험생만큼 바쁜 나날을 보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나 스토리가 이어지는 자체 제작 콘텐츠들은 주말마다 한꺼번에 몰아 보며 덕질에 박차를 가했다.


알면 알수록 J는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 같은 사람이었다.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음악도 잘 만드는, '제대로 타고난' 뮤지션이었다. 또 애교쟁이 막내처럼 귀엽게 생긴 외모와는 반대로 내성적이고 낯도 가리는 편이지만 멤버들과 팬들에겐 한없이 다정하고 따듯한 모습이었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어느덧, J를 모른 채 살아왔던 지난 시간이 후회될 만큼 그를 사랑하게 됐다.


맹세코 처음부터 J가 속해있는 그룹의 모든 멤버들까지 덕질하려던 건 아니었다. 인원이 적지 않은 편이라 다른 멤버들마저 덕질하게 되면 내 인생에 답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J 외엔 사랑을 나눠주지 않으리 굳게 다짐했건만. 어디 마음이 마음대로 되던가. J가 단독으로 나온 콘텐츠는 직캠이나 브이라이브 영상 외엔 거의 존재하질 않다 보니 다른 멤버들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알아가게 되었고 점차 관심도도 높아졌다. 얼마 안 가 올팬(한 그룹의 모든 멤버들을 지지하고 좋아하는 팬을 이르는 말)이 되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맘속에 그들이 꽉 꽉 들어차자 핸드폰도 사진 저장 공간이 부족하다고 귀찮은 알람을 울려대며 떼를 썼다. 자주 사용하지 않는 애플리케이션을 삭제하고, 매일매일 각각의 어플마다 쌓여있는 캐시 데이터를 비워내도, 다시 사진 몇 장을 저장하고 나면 금세 용량이 찼다. 약정기간이 끝나지 않아 위약금을 물어내야 했지만 더는 그들의 사진을 한 장이라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스트레스가 폭발한 날, 홧김에 핸드폰 대리점으로 달려가 가게 문을 닫으려던 직원을 붙잡았다. 그는 추리닝 차림으로 달려온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어서 들어오시라며 가게 안의 불을 켜고 자리로 안내해주었다. 새 핸드폰 박스 겉면에 붙어있는 네모난 스티커 속 128GB 다섯 자를 바라보고 있으니 이제 막 미성년자 딱지를 떼고 성인이 된 스무 살처럼 패기가 넘치고 자신감이 불타올랐다. 시동은 걸렸으니, 힘차게 액셀을 밟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작년부터 지금까지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상황이 조금 달라졌지만 (그리고 덕질하는 데 있어서 유료 팬클럽에 반드시 가입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유료 팬클럽에 반드시 가입해야 하는 필수불가결의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팬클럽 선예매’ 제도 때문이다. 수십만 명이나 되는 대규모 팬덤 속으로 뛰어든 건 처음이었기에 그런 제도가 존재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고, 그렇게까지 치열한 줄도 몰랐다. 피켓팅(티켓팅이 피 튀기듯 치열하다는 뜻)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티켓팅이 총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기에 하마터면 큰코다칠 뻔했다.


첫 번째는 유료 팬클럽에 가입한 사람들만 참여할 수 있는 팬클럽 선예매로, 웬만한 좋은 자리들은 이 단계에서 다 빠져나간다고 보면 된다.


두 번째는 팬클럽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도 예매처에 아이디만 있다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일반 예매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취켓팅’이다. 취켓팅은 공식적인 예매 방법은 아니고, 취소 처리된 좌석이 일정 시간에 예매 사이트에 한꺼번에 풀리는데 그때가 바로 티켓을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며 ‘취소’와 ‘티켓팅’ 두 단어를 합쳐 취켓팅이라 부른다. 일정 시간이라는 것도 예매 사이트마다 각각 다른데 대개 자정이 지난 새벽쯤에 티켓이 풀린다. 취켓팅에서 자리를 건질 수 있는 확률은 세 단계 중 가장 낮다. 노리는 사람은 수천수만 명인데 풀리는 좌석은 전 회차를 합쳐서 많아 봐야 10석 안팎이기 때문이다.


가능성이 그렇게나 희박했던 취켓팅에서 기적적으로 티켓을 건졌다. 내가 입덕했을 때는 이미 팬클럽 모집 기간이 한참 지난 후여서 선예매는 아예 참여할 수 없었고, 일반 예매 단계에서는 전회차가 매진이어서 예매 창을 열어 보나 마나였다. ‘너무 늦게 입덕한 내 탓이려니’ 하며 자포자기한 마음 반, ‘맨 뒷자리여도 좋으니 제발 내 자리 하나만 있어라’ 하며 간절한 마음 반으로 취켓팅에 참여했는데, 진심이 통한 건지 갑자기 취소된 좌석 하나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다시 떠올려봐도 그 후에 좌석을 어떻게 잡았는지 모르겠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던 것 같다. 취켓팅에 성공하고는 잔뜩 신이 나서 소리를 질러대다가 가족들의 단잠을 깨웠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다 가진 것만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나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었을 거다. 나는 무교지만 신나게 덕질해보라는 하늘의 뜻인 것 같아,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온갖 신들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팬미팅에 다녀온 후 팬클럽의 새로운 기수를 모집하자마자 회비 3만 원을 지불하고 바로 가입했다. 드디어 나도 ‘진짜’ 팬이 된 것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입덕했다는 사실을 가까운 친구들에게 알리기 위해 단체 채팅방에 운을 뗐다.


‘혹시 ○○○ 관심 있는 사람 있어?’


한참이 지나도 알림이 오지 않아 다시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말풍선 옆의 숫자는 5에서 1로 줄어들어 있었지만 아무도 답장을 보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럴 줄 알았다며 하던 일을 하려던 그때, 상희가 정적을 깼다.


‘어? 나 ○○○ 팬인데’


이게 말로만 듣던 일코해제*인 것인가?! 상희의 메시지를 읽은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그럴 거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친구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대화방에 있는 친구 중, 그들에게 관심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꺼낸 말이었기에 더더욱 놀라웠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아주 가까운 곳에 그들의 진짜 팬이 또 있던 것이었다. 인터넷이나 SNS에서 새롭게 알게 된 낯선 이가 아니라 실제로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나의 덕메가 됐다는 게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우리는 원래도 친한 사이였지만 공통된 관심사가 생기자 평소의 몇 배 이상 가까워졌다. E를 덕질할 때 민영이와 그랬던 것처럼 덕질과 관련된 모든 것을 상희와 공유했다. 우린 그룹 내에서 최애가 달랐기 때문에 앨범이나 굿즈 속에 들어 있는 랜덤 포토카드가 상대방의 최애일 경우 교환하거나 선물로 그냥 주기도 했고, 콘서트와 전시회 등의 오프라인 이벤트도 함께하며 돈독하게 우정을 쌓아갔다. 덕메가 생긴 후 나의 덕질은 탄력을 받았다.     


그들의 콘서트는 내가 경험해본 다수의 공연 중 단연 최고였다. 무대 구성과 셋 리스트, VCR, 퍼포먼스까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콘서트였다. 몇 날 며칠 밤을 지새우며 연습한 건지 감이 안 잡힐 정도였다. 실력이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가까이서 실제로 무대를 보고 나니 그들이 얼마만큼 자신들의 음악을 사랑하는지가 고스란히 내게 와 닿았다. 그들은 유머러스하고 귀여우면서도 열정적이고 멋졌고, 서로의 시너지가 빛을 발했다. 저렇게까지 무언가에 열정을 쏟을 수 있다는 것이 부럽고도 신기한 한편, 경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150분으로 예정되어 있던 콘서트 시간은 4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스탠딩석에서 녹초가 된 팬 한 명이 “그만!”을 외치는 바람에 다 같이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앳된 얼굴의 미성년자 팬들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막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 공연장을 빠져나갔다.


모두가 겨우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들이 한 명씩 차례대로 공연 소감을 이야기하자, 이번엔 많은 팬이 울었다. 그들 중 몇몇도 글썽였다. 하나의 공간 안에서 수만 명의 사람이 동시에 같은 감정을 교류할 수 있다는 건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들의 콘서트는 단지 노래와 춤을 감상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과 팬들 사이에 유대감을 형성하며 소속감을 단단히 다져주는 모두를 위한 이벤트였다.


4분 같던 4시간이 지나가고, 그들이 정말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며 무대 뒤로 사라진 후에야 정신이 돌아왔다. 내가 공연을 한 것도 아닌데 운동장 10바퀴를 전속력으로 달린 것처럼 팔다리에 힘이 쭉쭉 빠졌다. 그러나 가슴속엔 알 수 없는 기운이 한가득 들어찬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좋은 걸 한 번만 즐기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도저히 여운이 가시지 않아 공연장을 빠져나오는 길에 상희에게 연락했다. 상희는 나와 다른 회차에 이미 다녀온 뒤였다.


“우리 막콘 갈래?”


내가 묻자마자 상희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콜!”을 외쳤다. 곧바로 우리는 마지막 회차 티켓을 예매했다. 예정에 없던 지출이었던 데다 하고많은 좌석 중 3층 맨 뒷줄이었지만, 한 번이라도 더 그들의 무대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마음이 부풀었다. 일상을 살아갈 에너지를 얻게 해 준 행복한 기억만이 자리 공연이었기에, 삶이 괴롭거나 팍팍하게 느껴질 때면 콘서트 영상을 찾아보며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곤 했다.




사람들은 일코를 하지 않는 내게 그들이 왜 좋은지에 대해 종종 묻곤 했다. 노래가 좋아서, 무대를 잘해서, 잘생겨서, 팀워크가 좋아서, 재미있어서, 연습을 열심히 해서, 방송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평이 좋은 편이라서… 그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우주에 존재하는 별의 수만큼이나 많았지만 딱 한 가지만 꼽아보자면, 자신들에게 주어진 무대라면 어느 곳에서든지 조금도 대충 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힘들다고 수를 쓴다거나 꾀부리지 않고 오히려 매번 마지막 무대인 것처럼 온몸이 부서질 듯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그들의 무대를 보고 있으면 데뷔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신인 가수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들의 음악이 좋고 무대를 잘하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덕질을 시작했지만, 무대를 직접 보고 난 이후로는 그들이 본업에 임하는 태도 그 자체가 덕질을 지속하는 이유가 됐다.


이제  이상 그들을 덕질하진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응원하고 있다. 매주 업로드되던, 타팬들도 즐겨 본다는 그들의 유튜브 자컨(자체 콘텐츠) 하루빨리 다시 올라오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충분히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들이라는 생각 또한 변함없다.




* 일코 : 일반인 코스프레.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취미를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 행위

  일코해제 : 일코를 그만두고 누군가의 팬임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

이전 06화 너무 아픈 덕질도 나에겐 덕질이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