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끼라 Mar 23. 2021

못생긴 애들 중에 제일 잘생긴 그분

그땐 분명 잘생겼었다(고 생각했던) D

봄볕이 내리쬐고 길가엔 연분홍 벚꽃이 풍성한 자태를 자아내던 어느 날. 공원 벤치에 앉아 포근한 계절을 만끽하던 중,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D를 발견했다. 얼마 전 그가 새로 낸 음반의 재킷 사진과 같은 모습을 하고서였다. 단번에 그가 D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연예인과 이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왠지 가슴이 두근댔다.


반가운 마음에 아는 척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그때, 그가 갑자기 내 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옆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당황스러워하던 나를 덥석 안았다. 헉, 이게 다 뭐지? 설마 꿈인가?


그렇다. 그건 꿈이었다. 꿈속이면서도 내가 D에게 단 몇 분 만에 입덕하게 만들어버린 처참한 덕통사고현장이었다. 그날 꿈에서 깬 후로 당장 그에게 폴-인-러브 해버렸다.




보통 입덕하기 전, 자신이 누군가에게 깊이 빠지고 있음을 애써 부정하는 시기를 ‘입덕부정기’라 일컫는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90% 이상의 팬들은 모두 입덕부정기를 거친다고 한다. (퍼센티지는 1n년차 덕질 마스터인 나의 뇌피셜이다) 그리고 그 기간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년까지도 들어봤다.


기간은 그때그때 달랐지만 나 또한 대개 며칠이라도 부정기를 거친 후 입덕을 해왔다. 하지만 D는 내가 입덕을 부정할 새도 없이 꿈속에 나타나서는 뻔뻔하게도 내 맘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 그의 모습이 어이없었고 이런 식으로 그에게 빠져버린 나 자신도 어이없었다. 어떤 노래의 가사처럼 ‘어느 멋진 날에 나에게 짠! 하고 나타나선 내 맘을 취하고 시선을 빼앗’*아 버린 것이었다.


덕질할 때 끝장을 보는 스타일인 나는 입덕한 후엔 일단 그에 대한 모든 것을 검색한다. 포털 사이트에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는 기본 정보부터 무슨무슨 백과 같은 곳에 사람들이 줄글로 작성해놓은 그의 일대기, 공식 팬카페에 그가 직접 쓴 글들과 오래된 기사들까지 빠짐없이 정독한다. SNS가 있는 경우엔 그의 취향이나 관심사에 대해 알기가 수월하다. D에게도 트위터 계정 딱 하나가 남아있었지만 최근 업데이트 날짜나 게시물 수로 봐서는 거의 죽은 계정이나 다름없었고 그에 대해 알아가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덕질 대상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머릿속에 저장하고 나면 다음으로 그가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해온 모든 활동을 찾아보고 익혀야 한다. 가수라면 그가 낸 음원들―공식, 비공식 음원 모두―과 출연한 무대 영상, 뮤직비디오,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 등이 있을 테고, 배우라면 그가 출연한 드라마나 영화 등이 있을 것이다. 번외로, 게스트로 출연한 TV 프로그램들과 라디오 프로그램까지 당연히 훑어야 한다. 여기까지가 덕후의 기본자세다.


D에게 입덕했을 당시 그는 데뷔 7년 차로 정규, 싱글 합쳐서 무려 28개의 앨범을 낸 상태였다. 드라마 OST와 소속사 가수들이 다 함께 낸 겨울 노래들, 그가 피처링으로 참여한 다른 가수의 음원은 덤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는 입담까지 좋은 편이라 3년 전부터 라디오 프로그램의 디제이를 맡고 있었으며, 예능에도 여러 번 출연했다. 그는 보통의 발라드 가수가 아닌, 떡밥이 차고 넘치는 만능 엔터테이너였던 것이다!


입덕 후에 한동안은 마치 과제 폭탄에 허덕이는 대학생처럼, 수십 개의 프로젝트를 홀로 떠안은 직장인처럼 미친 듯이 바빴다. 그가 솔로 가수이기 때문에 그를 덕질하는 일이 별로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천만의 말씀. 큰 오산이었다. 그를 알아가는 데만 몇 개월의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몇백 개나 되는 라디오 다시 듣기 파일은 솔직히 전부 복습할 자신이 없어서 몇몇 개만 골라 들었다. 입덕한 후로는 라디오 애플리케이션에 시간을 맞춰놓고 그 시간이 되면 어플이 자동으로 켜지게끔 설정해놓은 덕에(참 덕질하기 편한 세상이다) 거의 모든 회차를 실시간으로 들으며 그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했다.


가수로서 워낙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고, 팬들이 기를 쓰며 스트리밍을 돌리지 않아도 늘 차트 상위권을 차지하는 음원 강자인 데다, 팬들에게도 잘하기로 입소문이 자자했기에 그의 팬인 것이 늘 자랑스러웠다.


특히 ‘팬들에게 잘한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콘서트에서나 TV 프로그램에서나 라디오에서나 그의 언행을 보면 그는 팬이 전부인 사람인 것 같았다. 언제나 우리에게 진심으로 대했고 우리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이 나 한 명까지도 소중히 여기는구나.’ 기나긴 덕질사에서 처음 체감한 일이었다. 더불어 그는 인기가 많아졌다거나 음원이 잘나간다고 해서 우쭐하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재미도 있다.


글을 쓰고 보니 D는 훈훈한 미담밖에 할 말이 없다. 과장하지도 않았고 콩깍지가 씐 것도 아니다. 그의 단점을 굳이 꼽아보자면 썩 잘생긴 편은 아니라는 거? 그 정도다. 그렇다고 D를 여전히 덕질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D는 확실히 ‘탈덕해야지’ 결심한 것도 아니었고 그럴 만한 물의를 일으킨 적도 없다. 그에 대해 더 이상은 찾아보질 않으니 전보다 마음이 식은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노래를 즐겨 듣고, 앨범 발매 소식을 들으면 손꼽아 기다리는 편이다. 어쩌면 백 퍼센트 탈덕한 건 아닐 수도 있겠다. D에게서 멀어진 것은 E라는 사람이 내 삶에 불쑥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 세븐틴 '예쁘다' 노래 가사에서 인용

이전 04화 가수 팬들이 배우로 못 갈아타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