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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오 Jun 22. 2021

기나긴 30일

yuki kuramoto <meditation>

겨우 반팔 셔츠 하나 때문에 오후 내내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다.


 하얗고 촘촘한 구멍이 가득한 빨래 망에 빨간 폴로 로고가 들어간 검은 반팔 셔츠를 넣고, 빨래 바구니 가득했던 갈색 수건을 7개, 속옷은 3개를 넣었다.


 세제는 평소에 넣던 양의 3분의 1을 넣었는데, 그마저도 섬유 유연제를 넣는 칸에 약간 흘렸으니 정확한 양을 알 방법은 없다. 다만, 섬유 유연제에 초록색이 섞여 세탁기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봤을 뿐이다.


 이윽고 표준으로 돌아가는 세탁기에선 불규칙한 소음이 일정하게 방을 채운다. 시간은 오후 7시 10분, 약속은 오후 9시에 있으니 가까스로 빨래를 널고 나갈 수 있으리라. 하고 나는 생각하며 균형이 살짝 어긋난 초록색 의자에 앉는다. 어제 아침에 읽어야겠다 생각한 하루키의 단편집을 들고 의자를 돌려 등받이가 책상과 맞닿게 한다.


  길어야 20장 남짓한 단편들을 하나하나 느리게 탐닉한다. 마치, 어제부터 알게 된 여자와 카페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오가는 대화 중간에 어색함을 잊기 위해 ‘날씨 이야기’를 하는 습관처럼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방을 둘러본다.


 5월의 마지막 날이 되지 못한 30일. 해는 이미 여름처럼 생명력을 쉬이 잃지 않는다. 세탁기 소리와 달리 꾸준히 내 방과 주방을 잇는 미닫이문에 은은한 빛을 뿌린다. 습관처럼 열어놓은 주방 창문에선, 햇빛의 남은 생명력과 함께 잘 타지 않는 시내버스가 지나가는 소리와 1층에서 집주인 아저씨가 피는 담배 냄새가 봄바람에 실려온다.


 난 이 순간이 의외로 마음에 들어 책을 반대로 엎어 내 허벅지 위에 올려두고, 엉덩이를 조금 앞으로 빼 의자에 눕듯이 앉는다. 방의 새하얀 천장엔 LED 전등과 쓸 일 없는 스프링클러가 있고, 열 감지기가 붉은빛을 깜빡거린다. 난 눈썹을 간지럽히던 앞머리들을 위로 올리고 나서 저 깜빡임에 집중한다. 어느새 방 안 가득한 햇빛은 스탠드 조명에 자리를 내어준다.


 그때 피어난 호기심에 나는 고개를 내밀어 창문 밖을 본다. 아직 하늘은 분홍빛과 하늘색이 섞여 밤이라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직 5월의 마지막 날이 오려면 멀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내일은 그다지 중요한 날이 아니지만, 난 항상 그 달의 마지막 날이 되면 우울감에 빠진다. 달이 바뀌는 것에 슬픔인지, 수많은 어제가 흘러버린 것에 대한 후회인지,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애초에 이유를 심도 있게 생각한 적도 없다. 그저 우울한 날이기에 밤이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렇게 한참을 열 감지기의 붉은빛과 세탁기 소리에게 나 대신 그 이유를 생각하게 했더니, 경쾌한 기계음이 울린다. 아주 짧게 5초 정도.

 

‘아 끝났구나.’


세탁기의 문을 여니 어느새 밖은 검은색과 노란 조명의 역할극이 펼쳐져 있다. 난 긴 하루의 마지막 힘을 써서 반팔 셔츠의 물기를 털어낸다. 옷걸이에 걸려 건조대에 전시된 옷이 밤바람에 아주 미세하게 흔들린다. 난 다시 의자로 돌아가 엎어뒀던 책을 든다.


전화벨이 울린다.

“어디쯤이야?” 시간은 오후 9시 2분.

“아 이제 나가려고.”

“왜 이제 나오는 거야? 난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는데.”

“미안해. 빨래가 늦게 끝나버렸어.”


난 하는 수없이 책을 무엇인가 가득한 책상 위에 놓아두고, 급하게 집을 나선다.

이제 남은 일은 그녀에게 오늘 하루, 햇빛의 생명력과 빨래의 관계를 설명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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