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캔디의 성장에세이] PART 1. 상처데리고 살기
얼마전 SNS에서 ‘K장녀(장남)특’이라는 글을 보다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거 완전 나였는데’ 하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집에서 밖에서 있었던 일 얘기 잘 안함
2. 밖에선 싹싹하게 집에선 무덤덤하게
3. 예쁘다는 말 들음 당황함
4. 타인의 행복에 큰 대리만족을 느낌
5. 믿는 사람에겐 장난 엄청 많이침 .
6. 차분한게 아니라 차분하게 미쳐 있는 거임
7. 크레이지 아시안 걸중에서 제일 크레이지는 장녀
8. 철없이 구는거 용납 못함
나는 여기서, 어느 하나 해당 하지 않는 게 없었다.
나라는 사람이 형성되는데, ‘한국’에서의 ‘장녀’로서의 정체성이 참 많이 투영되어 있었구나 싶어 뜨악했다.
‘장녀’라는 옷에 더해진 성장과정 속 굴곡들은 그 옷에 고스란히 어떤 패턴으로 남아
나라는 사람 본연의 자아의 모습 보다는 그 옷을 입은, 그렇게 적당한 거리에 있는 남들에게 보여지는 내 모습이 어쩌면 더 익숙했고, 편했다.
그러다 친한 사람들 앞에만 서면 어떻게 그렇게 짖꿎은 장난이 나오는지, 또 어떻게 그렇게 어리숙한 모습이 나올 수 있는지. 나의 이중성에 혼란이 온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성장 과정을 쭉 함께해온 소울메이트들은 날보며 ‘모순 덩어리’라고 한다
그런 내가 ‘와, 본연의 나는 참 자유로운 영혼’이였구나. ‘철든 척 했지만, 나는 이렇게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구나’ 라고 느낀 건, 혼자 외국생활을 하면서부터이다.
내 뿌리의 근원이라 여겼던, 가족들을 벗어나 외국에 혼자 살면서부터는 어떤 역할이라는 옷을 자연스럽게 벗게 되었다.
이때부터 였던 것 같다. ‘본연의 나’로 살아가는 행복을 알게 된 것이.
‘나’를 마주하고 탐구할 시간이 많아졌고, 나와 혼자 노는 시간들이 축적되어 갔다.
그리고 그건 정말 멋진 일이었다. ‘나’ 그 자체로 살아간다는 것.
가끔 가족들과 연락을 하긴 했지만, 당시에는 카톡도 없고 와이파이도 그다지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기에
한국에 있는 ‘나’라는 존재를 아는 사람들과 연락을 자주 할 수 없었다.
또 가끔 하는 전화로도 ‘잘 지낸다’라는 살아있는지 여부(?)의 안부만 전할 뿐이었다.
나는 평소에도 가족들에게 내 일상이나 감정을 미주알 고주알 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국에는 필요할 때가 아니면 연락을 하지 않고 보니 아주 자연스레 ‘우리가족의 첫째 딸인 나’보다는, 그냥 베트남에 혼자 있는 ‘나’로서의 정체성의 색이 짙어졌다.
조금 이기적일지도 모르나, 내게 이 시간들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외로웠으나 진짜 나로서 행복했다’이다.
내가 어떤 일을 선택 하든, 별다른 고민 없이 그냥 내 마음이 행복한 선택을 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나를 제외한 남겨진 가족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잘 몰랐고, 또 어쩌면 본능적으로 외면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내가 여기서 혼자 잘 적응해나가고 살아가려고. 또 무언가를 이루고 가려고..
그렇게 ‘장녀의 신분’을 망각하고 조금은 이기적으로 보낸 행복했던 시간들을 끝내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취직이 바로 되고 서울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자유롭고 독립된 생활이 연장선처럼 이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참 이 공간이라는 것은 신기하다. 한국에 오자마자 내가 벗어놓았던, 아니 이제는 그 곳에 두고 온 줄 알았던 장녀로서의 옷이 까꿍하고 나오는 게 아닌가.
누군가 그래야 한다고 하진 않았지만, 내 월급의 일부는 엄마에게 용돈으로 보내드렸고 서울살이가 너무 외롭고 힘들어 가끔은, ‘엄마 반찬좀 싸서 와줘’라고 SOS를 쳐보고 싶었지만 전화기 너머 엄마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잘지내고 있다’고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그 시절 우리가족은, 각자의 삶의 짐을 짊어진채 힘겨워하고 있었는데. 특히나, 내가 베트남에 있는 동안 정서적으로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혼자 온몸으로 맞으며, 모난 돌의 어른이 되어버린 동생을 보고 있노라면 혼자 자유롭게 보낸 시간들에 대한 죄책감이 엄습해왔다.
하지만, 이미 ‘자유’의 맛을 알고 있는 나였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나를 죄여오는 듯이 느껴지자, 나는 어느 한 군데에서는 그 속박을 벗어던지고 내 소중한 자유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가족’이 아닌 ‘직장’이였다.
사회생활을 하며 그 곳에서도 늘 내가 했던 역할인 K장녀 처럼, 묵묵히 남보다 그 이상의 책임을 맡으며 해나가려 했다. 그럼에도 힘들다고 내게 많은 업무량이 있다고 어필하나 하지 않았다. 또 회식자리에서는 끝까지 남아가며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던 나 였다.
신입사원 답지 않게 일 잘한다, 책임감있다 라는 말은 어느새 칭찬으로 느껴지지 않고, 내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어떤 역할이자, 짐으로 느껴졌다.
주말이 되면 가족들에게 생긴 일로 청주에 내려가, 내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일단, 회사를 벗어던지기로 결심했다.
그냥 ‘일’ 만이라도, 어떤 조직안에서 역할 속의 내가 아니라 그냥 본연의 나로서 할 수 있는 걸 찾고 싶었다. 주어진 일에 대충이 안되어 숨쉬기 버거웠던, 그러나 마음 속엔 들판에서 노는 법을 알아버린, 자유로운 영혼의 모범생 사원은 그렇게 사표를 던졌다.
누구나 들으면 알법한 직장을 그만둔다고 하는 딸이 조금은 섭섭하셨으리라.
하지만, 부모님도 나의 결정에 크게 반대는 없으셨다. 아니 사실 딸의 삶의 개입하고 신경을 쓰실만한 삶의 여유가 크게 없으셨던 것 같다.
직장을 관두고도, 그럭저럭 잘 해나가며 엄마에게 용돈을 더드리면 더 드렸지 회사를 다닐 때보다 적게 드린 적은 없었다. 또, 직장에 다닐때 보다 생각보다 빨리 자리를 잘 잡고 내 이름으로 무언가를 하게 되었기에, 나름 장녀로서 잘 살아가고 있다는 자부심과 안도감이 있었다.
일에서의 적당한 자유도 찾았고, 또 가족들에게도 어느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내가 아이를 낳게 되고, 아주 자연스럽게 일에서 쌓아왔던 커리어의 블럭들이 조금씩 빠지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무너지려 하는 커리어의 블럭을 조금이라도 다시 올려보려 하니, 혼자서는 도저히 안되어 친정엄마의 도움까지 요청하고 있는 내가 되어 있었다. 한 아이의 엄마로서의 나는 한 없이 서툴었고 또 부족해보였다.
그렇게 아주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자신의 일을 알아서 했던 나는...
‘엄마’라는 옷을 입게 되고, 그 옷이 버거워 내 삶에 친정엄마를 개입시켜야만 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어떠한 계획도, 전략도 없었던 나는 정체성의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를 잃어버린 시간이 꽤 오래, 지속되었고 그저 하루하루 주어진 옷을 입기에 바빴다.
그리고 그 하루의 구석에는 늘 내가 장녀로서 엄마에게 그 어떤 도움을 주지 못한 채 받기만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는데, 그 알량한 자존심이 뭔지. 미안한 마음과는 반대로 때로는 더 날을 세워 나를 보호하려, 뾰족한 말이나 행동으로 엄마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할’의 옷을 많이 가진 채 그 속에서의 ‘나 다움’이 없어진다는 건...
옷장 속에 아주 많은 옷을 가지고도 입을 옷이 하나도 없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나다움'을 가진 옷들로만 있다면, 그 어떤 옷을 입어도 그저 나 일수 있지만,
나답지 못한 옷에 나를 우겨넣는 일은 어색하고 또 때론 답답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그저 그 ‘역할’이 주어지면, 본연의 나는 옆으로 둔 채 그 역할의 옷을 입은 모습으로 충실한 삶을 살려 한 것이다. 또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 잘 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 채 말이다.
그냥 나 다운 옷을, 내 색깔의 옷을 입으면 되는 건데 말이다.
‘그래,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로서 어떠어떠 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냥 나로서 나답게 그 역할의 옷을 입고 해나가면 되는거지’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내가 인생에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고 결정을 내릴 순간이 올 때 조금은 심플해지는 게 느껴졌다. 또 그 역할 속에 내가 더 이상 버거움에 허우적 거리지 않는다.
물론, 아직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어른이란 모름지기 그 역할 속에 있는 책임도 함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역할의 옷을 무겁게 입고 가지 않으려 ‘노력한다’. 아주 필.사.적.으.로.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낑낑대며 입으며 가고 있는 게 또 '본투비 K장녀'니까 말이다.
‘그냥 계급장 다 떼고, ‘나’로서 행복하게 살자’
그게 나를 사랑하는 가족들이 진심으로 바라는 것일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