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캔디의 성장에세이] PART 1. 상처데리고 살기
내 안에 또 다른 생명체가 함께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모든 것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올해 안에 상견례를 해볼까?’ 했던 마음은, ‘이 달안에 상견례를 해야 된다’로,
‘내년 가을쯤 길일을 받아서 하늘이 푸른 날, 특별하게 야외결혼식장은 어떨까?’했던 마음은,
‘배가 나오기 전에 올해 안에 그래도 괜찮은 예식장이 가능한 날로 해야 된다'로... 바뀌어갔다.
내 결혼식은 참 많은 지인들에게 민폐를 끼쳤는데, ‘일요일 오후 4시 30분’에 진행된 것이다.
여자라면, 누구나 일생에 한 번 있을 이 결혼식에 대한 나름의 행복의 색깔로 가득 찬 그림이 있을 것이다.
나는 푸릇푸릇한 잔디밭에서 예쁜 내 상체와 허리라인이 딱 좋게 드러나는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밝게 웃으며 일생에 한 번뿐인 그 순간을 담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내 배가 최대한 ‘티 나지 않는’ 시기 안에 되어야 했기 때문에 행복한 고민의 ‘보기’에 대한 많은 선택권이 줄어들었다.
아무리 빨리 진행되어도, 내일 당장 결혼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드레스는 배 위쪽 부분에서 넓게 퍼지는 드레스이어야 했고, 식장은 가을과 겨울 사이인 11월 말, 일요일 오후 시간 말고는, 서울 아래, 교통이 그나마 편리하고 내 나름의 기준에도 괜찮은 식장이 없었다. 일요일 오후라는, 민폐 가득한 일정 속에서도 지방에 사는 고마운 친구들과 멀리 계시는 친척분들도 소중한 발길을 향해 주셨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내심... “제발 와주세요.” 하고 식장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기도하고 또 기도했던 단 한 사람. 신부가 입장해야 할 때, 바로 그 순간이라도 좋으니, 짠 하고 나타나줘서 내 손을 잡아주셨으면 했던, ‘우리 아빠’.. 우리 아빠는 오지 않았다.
나는 큰 외삼촌의 손을 잡고 자꾸만 삐져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고 또 참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떼야했다.
아빠가 정말로 오지 않을 줄 알았다면, 나는 신랑과 동반 입장의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씩씩하게 웃으며 차라리 그렇게 신랑의 팔짱을 끼고 입장할걸. 아니면 손을 흔들며 혼자 당당하게 입장할걸..
내가 마지막 순간까지 그런 제2의 계획들을 세우지 않은 까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입장해야 하는 그 마지막 순간의 전까지도... 아빠가 ‘늦어서 미안하다’며 나타나 내 손을 잡아줄 거라고, 그렇게 나와 발걸음을 맞춰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런 드라마틱한 상황은 연출되지 않았고, 또 참 드라마 같지만 ‘고인’이라는 단어도 결혼식 안내판 성함에 없는 멀쩡히 살아계신 우리 아빠는, 자신의 딸의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
아빠와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더라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였겠지만, 나는 아빠와 내가 적어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서로를 생각한다'라고 믿었다.
아빠는 내 사회생활의 멘토였으며, 가끔 술을 드시면 전화로 내 안부를 묻고,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서 오랫동안 냉철하게 살아오시며 숨겨왔던 여린 마음들을, 빗장을 풀고 이야기하시던 분이었다.
엄마가 내게 가장 섭섭해하는 게 있다면, “너는 꼭 아빠는 그렇게 잘 이해해 주더라”라는 것이었다.
아빠가 하시는 일을 존경했고, 비록 우리 가정을 끝까지 지켜주시진 못했지만, 그가 비록 내 성장과정 속에서 때론 우리에게 ‘나쁜 아빠’이자, ‘나쁜 남편’으로 남을 기억들을 곳곳에 남겨놓아 그 기억이 불현듯 나와 괴롭히는 찰나도 있었지만 그건 딸인 내게 지나가 버린 시간이자 ‘옛날 일’이었고,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그냥 그가 ‘사랑하는 우리 아빠’라는 사실이었다.
그런 아빠와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 건, 내 결혼을 준비하면서부터였다.
갑작스러운 딸의 임신에, 또 갑작스럽게 결혼을 하겠다는 딸의 결심에 당황스러우셨을 수도 있을 거라는 걸.
모든 면에서 준비가 되지 않으셨을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신의 딸의 결정이고, 인생이기에 아빠가 조금은 나의 이야기를 마음을 열고 들어주셨으면...
조금은 딸의 결혼이 탐탁지 않으시더라도, 당신의 딸이기에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셨으면 했다.
그가 ‘나의 아빠’이기에 지난날의 어떠한 모습들도 이해해 주고 변함없이 사랑했던 나처럼. 그저 단 하나의 사실, ‘나의 아빠’였기에 끊임없이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아빠에게 결혼할 사람이 생겼다고, 보여주고 싶다고 전화할 때마다 아빠는 아직 때가 아니라며 만날 생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몇 번을 설득해, 지금의 남편을 아빠에게 보여주던 날.
꽤 비싼 고급스러운 중식당에서의 우리의 만남은 차가운 침묵 속에 애꿎은 음식들만 차례로 나왔다. 예비 신랑인 그는 그저 그 공기에 압도되어 얼어붙은 듯했다.
아빠는 단 한 번도, 내 옆 사람의 이름도, 무엇을 하는 지도, 나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일견 다른 아빠라면 궁금해할, 그 어떤 통과의례의 질문 절차도 하지 않고, 그에게 눈 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리고 내게 당신이 왜 지금의 ‘내 결혼’이 받아들일 수 없는지에 대해서만, 기자이셨던 당신답게 하나씩 논리적으로 말씀해 주셨다.
나는 당연히 사랑하는 딸의 인생의 아까운 청춘이 제일 마음이 아프실 거라고, 그래서 반대하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더 의연하고 씩씩하게, 자신 있게 해 나갈 수 있다고 그렇게 아빠를 안심시켜 줘야지.’라고만 생각을 했지...
지나치게 자신 중심적인, 아빠 자신의 인생의 이유들로, 내 결혼식에 대해 어떤 ‘딜’을 제안하시고 이것을 받아들여야 할지 여부를 결정하라고 ‘통보’를 받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빠는 사회적으로 자신이 쌓아온 명성과 체면을 절대 놓으실 수 없다 했다. 아빠에게는 당시 재혼하신 선생님의 직업을 가진 아내분이 계셨는데, 자신의 사회 지인 모두가 지금의 아주머니가 자신의 아내로 알고 있기 때문에, 아빠의 체면상 지금 날 낳아주고 키워주신 엄마와, 그의 전 부인과 함께 부모석에 앉을 수 없다고 했다.
이 결혼식을 진행하려면, 또 한 번 선택을 하라는 것이었다. ‘엄마와 살래, 아빠와 살래’ 이후로, 내가 또 이러한 선택으로 고민을 하고 눈물을 흘리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해 내게 파급되는 어떤 고통의 파장은, 성인이 된 이후론 내가 내 인생을 살기 시작하면 끝나는 것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아빠는,
‘너희 엄마하고만 이 결혼을 진행하든지, 아니면 지금의 아주머니를 너의 엄마로 받아들이고 아빠와 함께 옆에 앉히든지’..
선택하라고 말씀하셨다.
두 분의 이혼으로 우리에게 주신 상처도 모자라서, 또 한 번 내 마음을 마구 할퀴며 상처를 내고 있음에 가슴 안 쪽의 시림이 느껴졌지만... 그 마음의 시림으로 몸까지 부들부들 떨렸지만... 그럼에도 이해하려 해 봤다.
아빠라면... 자신의 직업과 회사가 곧 자신의 인생이었던 그에게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나를 설득해보려 했다.
하지만, 결혼만큼은 당연히 나를 낳아주신, 내가 사랑하는 두 분. 엄마, 그리고 아빠와 함께 해야 했다. 그게 너무 당연한 것이 아닌가.
또한 지금 아빠 옆에 계신 '아주머니'는 내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있던 존재였지만, 단 한 번도 나와 내 동생에게 관심과 애정을 주신적도 없는 분이셨다. 오히려 아빠와의 재혼에 내가 걸림돌이라며, 엄마에게 ‘나를 데려가라’고 하시던 분이었다.
그녀가 아빠에게는 얼마나 따뜻한 분이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와 동생에게는 차가운 아주머니였고, 그 어떤 배려도 관심도 느낄 수 없었던 분이었다. 그런 분을 갑자기 사랑하는 '나의 진짜 엄마'를 두고 내 결혼식의 '엄마역할'을 하게 하라니... 또 사랑하는 나의 엄마에게 모진 말들을 많이 했던 것들을 알아온 나로서는 당연히 ‘엄마’의 자리에 그녀가 앉는다는 건,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빠는 당신의 입장을, 나는 딸로서의 내 입장을 주고받는 메일이 이어졌다. 강의로 장거리 운전이 많았던 나는 눈물이 앞을 가려 몇 번이고 차를 세워야 했고, 그렇게 내 눈물도 함께 이어지는 나날들도 함께 이어졌다.
‘왜 내 인생은 이렇게 아플까. 남들은 하지 않아도 되는 고민을.. 왜 나는 이렇게 가슴 아파하며, 또 해야 할까?’하며, 차를 세워놓고 핸들을 꽉 움켜쥐며 엉엉 울고 또 울며 부들부들 떨기도 하고, 또 이렇게 슬픔에 허덕이고 있는 게 미안해, 내 아이가 꿈틀대고 있는 배를 어루만지며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물기도 했다.
그리고 아빠에게 제안을 했다.
당신의 지인이 단 한 명도 안 와도 되고, 하객이 없어도 되니,
‘내 아빠’ 당신만 내 결혼식에 와서 축하해 달라고.
나의 ‘엄마’, ‘아빠’. 딱 두 분만 있어도 되니,
당신들이 지난날 축복 속에서 기대와 희망에 가득 차 결혼을 했듯이, 그 출발로 이렇게 태어난 존재인 나를.. 그냥 그 존재로서 사랑하고 축하해 달라고.
다른 건 하나도 바라지 않겠다고 했다.
내 결혼식에 화환이 몇 개 있는지, 하객이 얼마나 있는지.. 진심으로 그런 것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사랑하는 가족들의 축복 속에서, 그 사랑들을 마음에 가득 담고 나 역시 조금은 겁이 나고 두려운 이 결혼을, 힘차게 내딯고 싶었다.
그러나 아빠는 내 제안에 답을 주지 않았다. ‘오지 않겠다’, ‘너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하지 않았으니, 나는 그래도.. 그래도.. 아빠가 올 거라고. 정말 마지막 순간까지도 굳게 믿었다.
그냥 당신만 양복 입고, 아니 그냥 집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와주셔도 되니.
‘아빠가 늦어서 미안해 우리 딸. 진심으로 사랑한다, 축하한다’하고 그렇게 내 손을 꽉 잡아주셨으면
그렇게 내 마음도 꽉 안아주셨으면. 그게 아빠에게 바라는 전부였다.
어쩌면 어느 누군가에게는 너무 당연한, 친정 아빠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결혼식. 그 바람이 결국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아빠의 지인분들은커녕, 아빠도 없던 내 결혼식이었지만....
일요일 오후 4시 반이라는 악조건의 결혼식 속에서도 결혼식은 앉을자리가 없을 만큼 정말 감사하게도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끝을 맺었다. 비록 엄마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버려 결혼식이 끝날 때 쯔음에는 눈이 퉁퉁 부어버리긴 했지만...
그렇게 사연 많은 신부처럼 보이긴 했지만, 아니, 그렇게 '사연 많은 신부'였지만... 어쨌든 잘, 마쳤다.
지금도 엄마와 동생만이 함께 있는 결혼식 사진을 보면, 어디서 갑자기 찾아오는지 눈물이 덜컥 눈가에 맺히고 만다. 얼마 전 결혼 8주년을 맞이했지만 아직도 이 글을 쓰며 눈물이 줄줄 나고야 마는 나는 아직도 상처가 충분히 아물지는 못한 것 같다.
빨리 상처가 조금은 옅어져야, 아빠와 조금은 아무렇지 않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또 시간이 유한하다는 걸 생각하니 아빠가 더 늙기 전에.. 이 관계를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의 짐도 늘 지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은 그럴 수 없는, 여전히 아빠에게 삐쳐있는 내가, 오늘도 조금은 애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