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캔디 Jun 02. 2023

“결혼해도 아이는 낳지 않을거야” 하던 내가 혼전임신을

[윤캔디의 성장에세이]  PART 1. 상처데리고 살기

 나는 현재 아이 둘의 엄마이다. 또래친구들 보다 아이를 가진 것도, 결혼을 한 것도 빠른 편인데... 여기서 그 순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 우리는 셋이 결혼했다. 내 뱃속에 아가천사도 그 날만큼은 멋진 턱시도를 입고 엄마 아빠를 축복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펼쳐본다.


 인생은 어떨 때는 참 바라던 일들이 현실처럼 나타나기도 하고, 또 때론 그 반대로 감히 상상할 수도 없던 일들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래서 여전히 ‘알 수 없는 인생’이며, 그렇기에 겸손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20대의 ‘잘나가던’ 여자였다. 성장과정 속에서 나름의 자잘한 상처도 많았지만, 내 스스로 새 가지를 뻗어 나간다는 것에 대해 그 자부심이 컸고, 그렇게 나는 ‘성공한 여자’로서 사회에 우뚝 뿌리내리고 싶었던, 야망이 흘러 넘치는 여자였다.


 그랬기에, 내게 ‘결혼’ 그리고 ‘아이’를 갖는 일은 너무나도 생경한 그 어떤 것이었다.

내 인생엔 나의 반쪽을 만나, 우릴 닮은 예쁜 아이를 낳고, 알콩달콩 그렇게 살았답니다 라는 시나리오는 전혀 없었다. ‘NO결혼, NO아이’, 그것은 이유를 들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확고한  나의 인생 신념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첫째, 나는 일단 성공해야 했다. 남들이 흔히 정한 기준에 부합하는 부와 명예를 가지고, 한강뷰가 펼쳐진 넓은 창이 있는 아파트에 살며,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딸이 되어 용돈도 넉넉하게 드리며 효도를 하고 싶었던 나는 야망있는 K장녀였다.

금수저로 태어나진 못했지만, 내가 금수저를 쟁취해보겠다. 뭐 이런 야망이랄까? 그렇기에 나는 성공을 위해, 일단 오로지 ‘나만’을 위해 내 물리적, 마음적 에너지를 쓰고 싶었다.


 둘째, 나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이의 얼굴만 봐도 귀여워하고 사랑스러워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별 관심 없는’ 메마른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나만 그런게 아니였길 바라며, ‘의외로 많다’라고 단정지어 본다.) 나는 그 메마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아이들의 세상 근심 없이 웃는 맑은 미소에도, 짧고 귀여운 다리로 뒤뚱 뒤뚱 걸어가는 걸음마 모습에도 그닥 미소가 지어지지 않는... 좀 이상하리만큼 메마른 사람, ‘노키즈존’을 대 찬성하던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이렇게 아이라는 존재에 감흥이 없는 내가, 아이를 낳아 사랑으로 키운다는 건 언감 생심이었다.


 셋째, 내 마음 속 저기 깊은 곳에서는 부모님의 결혼 실패에 대한 어떤 알고리즘으로 인해, ‘나 또한 결혼에 실패하면 어쩌지?’ 라는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알고리즘에 의해 추천 영상이 뜨듯이, 별 생각없이 있다가도 별안간 어떻게 알고 갑자기 툭 튀어나와 나를 뜨악하게 만드는 그 어떤 마음 속 깊이 있던 내 잠재의식이 투영된 영상과도 같다고나 할까.


 이렇게 확고한 신념으로, 20대의 나는 ‘성공한 독신 여성’으로, 그렇게 살아갈 방향의 키를 잡고 있었다. 그런 내가 갑자기 삶의 방향의 키를 전환하게 된 건,


그렇다. ‘이 망할놈의 사랑’ 때문이다. 지금 내 옆사람.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다정하고 세심한 사람인지, 또 왜 이렇게 한결 같은지. 그는 내 인생의 시나리오에 새로운 인물로 등장하더니, 변두리 인물이었던 그는 갑자기 주요인물로서 상당한 활약을 해 나가게 된다.


 겨우 두 번째 만남에, 오픈토 힐을 신고 간 내가 발을 조금 아파하는 것 같이 보이자 “신발 벗어보세요” 하더니. 꼬질꼬질한 엄지발가락이 창피해 수줍게 나올듯 말듯 하고 있는 내 발을 다정하게 “괜찮아요” 하고 꺼내어, 손으로 정성스레 주물러 주더니...

2년이 넘는 연애기간 동안, 나의 어떤 모습에도 언제나 한결같이 소처럼 선한 눈망울과 환한 선홍빛 잇몸을 보이며, 아이를 보듯 나를 그렇게 귀엽게 쳐다보며 웃어주는 이 사람.  


 삶의 길을 하루하루 걸어오며, 자연스럽게 철이 들어버린... 완벽하게 빈틈없이 하루를 보내야만 나 스스로를 인정하고, 또 남들도 그런 나를 좋아해준다고 생각했던 나를. 또 그렇게 성공하고 싶은 ‘강박’이 있었던 나를, 그는 ‘그저 아주 어린시절의 나처럼, 그렇게 아이처럼 해맑게 있어도 괜찮아’ 라고 안심시켜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그냥 너는 너의 존재만으로 충분히 사랑스럽다’는 메세지를 눈빛으로, 미소로, 행동으로 그렇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내 인생에 스며 들어오고 있었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눈꼽만큼도 엮일 생각이 없었던 나는, ‘그래 이런 사람이라면 결혼을 해도 좋을 것 같아.’, ‘결혼을 해도 내 일을 하는 건 문제 없으니까.’, ‘이 사람이라면 내가 일하는 것을 응원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라며, 아주 감성적으로 내가 가졌던 인생의 철벽같던 신념을 단방에 허물고 있었다.


 원래 사람은 논리보다는 감정에 약한 동물이 아니던가. 어느새... 나는 그와 결혼을 결심하고, 어느새... 상견례 날짜가 오고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난 여전히 내 일에 대한 욕심이 컸던터라 아이에 대해서는 당연히 확고하게 생각이 없었고, 그도 그런 나의 의견을 늘 그랬듯 존중해주었다.


 그는 직업 특성상 지방 출장이 무척 잦았는데, 나 역시 그런 그의 직업이 나쁘진 않았다. 내 일과 내 영역을 충분히 지킬 수 있을만큼의 적당한 거리감이 오히려 그의 매력 중 하나로 다가오기도 했다. 어떨 때는 한 달에 한 번도 제대로 보기 힘들었지만, 또 때론 외롭기도 했지만, 나도 그도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인생을 넓혀나가고 있는 아주 중요한 시기였기에 충분히 견딜만 했다.


 그리고 그가 지방출장을 마치고 서울로 올때면, 매일 만나지 못했던 전해주지 못했던 사랑을 열심히 서로의 마음에 쌓아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사랑은, 맘 붙일 곳 없는 넓은 서울, 낙성대 역 근처 작은 방구석에 살고 있는 나를, 회사를 나와 동료도 없이 외롭게 프리랜서로 일하는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기도 했다.

 그 날은 그가 서울에서 올라와 주말을 함께 보내고, 다시 지방으로 돌아간 지 몇 주 정도 뒤였던 것 같다.

 일정체크를 하려 달력을 보던 중, 나는 '그 날'이 훨씬 지났다는 걸 알게되었다.  

 
당시 나는 강의 촬영과 현장 강의로, 서울과 경기도를 구석구석 운전하며 다닐 때였는데 그 때가 내 생리예정일인 말일 보다 2주정도 지나있다는 것을... 강의 일정을 체크하려다 알게 된 것이다.

사실 이상하게 계속 운전할 때마다 졸린 느낌은 있었지만, 단순히 일을 많이 해서일거라고 생각했지, ‘임신’ 때문일거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테스터기를 사러 집에서 나와 지하철 역 근처 약국으로 가는 길까지도 ‘설마’라는 생각만 했지, 내 눈앞에 두 줄이 버젓이 나오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고, 아니 내게는 상상해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것'은 아닐거라 믿으며 테스터기를 나의 작은 방, 화장실 한 켠에서, 난생 처음 해보았다.



 선명한 두 줄을 보는 순간, 묵직한 무언가가 나를 덮치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눈물이 흘렀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그저 막막했다.

 내 안에 생명을 두고, 이렇게 신성한 그 무언가를 품고서 이렇게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조차도 숨막히게 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내 인생도 역시 소중한걸', '나는 이제 고작 27살인걸', '나는 아직 하고 싶은게, 이루고 싶은게 많은걸',  '나는 아직 준비가 안됐는 걸',  '나는..나는..나는...' 하며, 눈물로 며칠을 지새웠다.


 그리고, 그는.. 마음 속 깊이는 아이를 당연히 낳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욕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입 밖으로 그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저, “선애야, 너가 제일 중요하니까. 너의 결정이 무엇이든 오빠는 괜찮아. 그게 무엇이든 네뜻대로 하자” 라고. 내게 울며 말해주었다.


 밤새 울고나면 날이 밝아 있었고, 창문에 빛이 스며들기 전 일하러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시기 나는 매일 아침 7시, 직장인들을 위해 강의를 하고 있었다. 또 점심에는 인강, 저녁에는 현장강의. 이렇게 하루를, 어떻게 어떻게 보냈다. 내가 ‘어떻게’라는 말로 쓴 연유는 정말 지금 생각해봐도, 뚜렷한 결심이 서기전 까지의 하루하루를 내가 어떻게 보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그 며칠을 내 기억에서 도려낸 것처럼, 아주 작은 기억상실증처럼 내게 남아있다.


 아직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는채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평소에 아기들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는 한 아이의 생명을 경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였다. 또 그렇다고 내 인생, 내 성공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였다. 그 때에는,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으면 나만의 인생은 모두 잠식될 것만 같았다.


 한 일주일쯤 지났을까. 나와 함께 아침 강의를 하던 소연이를 지하철에서 만났다.

소연이는 인도네시아어 강사였다. 그 친구는 서울대 입구역, 나는 낙성대 역으로 집이 한 정거장 차이였기 때문에 출근길, 퇴근길을 의도치 않게 함께 하며 마주치기 일쑤였다.

강의를 통해 알게되었기 때문에, 그녀와는 친분이 전혀 없었고, 오며가며 눈 인사를 하다 조금씩 말을 트게 되어 동갑의 ‘친구’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때였다. 물론, 지금은 내 인생의 은인이자 동반자로서 늘 함께하고픈 친구 그 이상의 그녀다.

 그녀도 나처럼 참 바쁘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아침 “밥먹었어?”라든지, “어우야!” 하며, 아주 간단한 인사만 하고,  지하철에서 자리가 나면 앉아서 노트북을   펴 각자의 일을 하기 바빴다. 그녀는 대학원 과제를, 나는 학습 게시판에 남겨진 질문에 답글을 달며, 그렇게 서로의 모습을 함께하며 무언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청춘을 마음으로 응원해주는. 그 정도의 사이인 우리였다.


 그런데 내가 이 친구에게 왈칵 눈물을 쏟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 사실을 털어놓고 있는게 아닌가. “나 어떡해 소연아,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정말 모르겠어” 하며 며칠 묵혀놓은 눈물을 참 많이도 쏟아냈다.


 소연이는 나를 꼬옥 안아주었다. 그리고, 나 자신도 환영해주지 못했던 우리 아가를 향해 “아가야 축복해! 선애야 축하해! 네 인생이 절대 끝이 아니야. 또 다른 시작이야 선애야. 더 멋진 인생이 있을거야.”라고 손을 잡고 한 마디 한 마디, 꼭 그래야 할 것 처럼 진심을 담아 꾹 꾹 눌러 내 마음에 새겨주었다.


 참 이상하지만, 그 날.. 엉엉 소리내어 울며 눈물을 쏟아내던 날, 그리고 진심이 담긴 묵직한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나는 바로 결심이 섰다. 내 아가를 축복해주기로, 또 새롭게 펼쳐질 내 인생을 응원해주기로!


 그렇게 나는 ‘복덩이’도 함께, 우리는 둘이 아닌 ‘셋’으로 결혼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정말 진심이자 진실이었다. 내 인생의 또다른 시작은, 처음이라 서툴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제까지 내가 살아오며 느낄 수 없었던, 다른 차원의 행복의 문을 열어주었다.


 매일밤, 나는 여전히, 지금은 9살이 되어 어느새 소년이 되어가고 있는 우리 복덩이를 꼬옥 안아주며 속삭여준다. “복덩아, 엄마 아빠 옆에 와줘서 너무 고마워”






작가의 이전글 연애 트라우마를 안겨준 그놈들과의 연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