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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캔디 Jun 02. 2023

연애 트라우마를 안겨준 그놈들과의 연애

[윤캔디의 성장에세이]  PART 1. 상처데리고 살기

 부끄럽지만, 난 연애할 때가 너무 좋다. 아니 어쩌면 연애할 때의 적극적이고, 생동감 넘치고, 사랑스러운 내 모습이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어느덧 결혼 10년차가 다 되어가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영원한 ‘오빠’에게 장난끼 가득하게 입술을 삐죽 내밀기도 하고 똥침을 하고 냅다 도망가버리기도 하는 그의 귀여운, 아니 귀여운척 하는 파트너다. 누군가 보면 철이 없다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을, 평생 사랑스러운 여인이고 싶은 모습으로 살고 싶은.. 여자로서 작지만, 소중한 로망이랄까.


 연애를 좋아하니, 연애를 쉬어본 적이 거의 없다. 회사에 다닐 적 업무에 찌들어 녹초가 되어 퇴근한 날에도, 집에 들어가 샤워를 다시 하고 뽀송뽀송하게 화장을 하고, 향수를 흠뻑 적시고(?) 퉁퉁 부은 발을 우겨 넣는 수고스러움을 마다하지 않고 소개팅은 꼭 사수했다. 부지런한 새가 벌레를 먼저 먹는다고, 비유가 적절할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빼어나게 예쁘지는 않지만 연애에 있어 참으로 부지런했던 20대의 얼리버드(?) 여성 직장인이었다.



 내 연애사는 스물 다섯살의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 갓 어른이 된 이십대 초반의 나는 베트남이라는 곳에 있었고, 스물 다섯 이후에는 줄곧 한국에 있었는데. 연애사가 극명하게 다른 양상으로 갈라지는 것이 나이때문인지, 국경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이 스물 다섯살의 전과 후, 혹은 베트남과 한국에서의 연애는 너무도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서의 내 연애이야기는 마치 순정만화 속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일들이 참 많이 생겼는데, (아니 그래도 순정만화속 주인공은 끝에 백마탄 왕자님이라도 나타나기라도 하지..) 아마도 그건 ‘외국’이라는 특수한 곳에 아직 모든게 미성숙했던 그야말로 세상물정 모르는, 그러나 연애는 너무나 하고싶었던 ‘꼬마 아가씨’가 필연적으로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리라.


 ‘외국’에서 ‘혼자’ 살아가다보면, 내 안의 많은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보게 될 기회가 참으로 많이 오는데. 그것은 아마 매 순간 내 안의 외로움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일거다. 어떤 때는 생각보다 너무나 강한 나의 모습을, 또 어떤 때는 생각보다 너무나 연약한 나의 모습을 하나씩 알아간다.


 사실 베트남에 처음 갔을 때에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해나가느라,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었다.

‘새로운’이라는 단어는 묘한 설렘과 두려움을 동반하는데, 마음 속의 설렘의 칸이 미지의 곳을 알아가는 것으로 채워가고 있는 동안 나는 다른 어떤 것에는 설렘을 양보할 공간이 없었다.

그러나 새로움이 익숙해지면 또 다른 새로움의 재미를 찾아 나서는 것이 본능이듯 나 역시, ‘베트남에서의 생존’을 위한 설렘과 두려움이 어느정도 해결되자 어김없이 ‘외로움’이 몰려왔다.


 외로움이 들어올 틈새를 막으려 하루를 꽉 채워 지내봐도, 어김없이 집에 혼자 터덜터덜 들어오는 길은, 비록 매일이 익숙한 길일지라도, 나 홀로 외국에 이방인으로 있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그것은 가령, 빵빵 거리는 오토바이 경적 소리가 갑자기 내 귀에 매섭게 느껴질 때라든가, 쌀국수 집 앞을 지날 때 큰 솥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쌀국수 국물에서 나는 특유의 베트남 냄새가 섞인 뜨거운 증기가 내 코 속길을 파고들 때, 골목 앞에서 강아지 만한 큰 쥐가 내 눈을 질끈 감아버리게 할 때라든가.. 하는 때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런 날은 골목 초입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맥주한 캔과 함께 감자칩을 사와서 집에오자마자 텔레비전을 켰다. 그러나 또 내 귀로 흘러오는 말들은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베트남어 뿐이였다. 그렇다. 나는 한국의 정서가, 한국어가 너무 그리워졌다. 한국어로 실컷 내 마음을 조잘조잘 이야기하고, 그것을 따뜻하게 들어줄 수 있는 그 누군가를 정서적으로 간절히 원했다.



 사랑은 운명이라했던가. 기가 막힌 감정의 타이밍에 내게 ‘한국인’의 ‘남자’가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존재로 인해 내게 ‘외로운 이방인’이라고 끊임없이 속삭여주던 얄궂던 배경들이 이제는 ‘낭만적인 이방인’이라며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시선을 제대로 즐기며 사랑을 했다.


 모든 연애의 시작이 그러하듯이, 그 끝이 어떠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며, 열심히 사랑하고 또 열심히 공부하며. 내 청춘을 나 혼자가 아닌 ‘우리’가 함께 예뻐해주고 있었다… 고 생각하며 하루의 페이지를 채워나갔다.


 그리고 그 끝은, 서로의 감정선의 변화에 따른 끝이 아니라, 내가 한국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다가왔다. 처음에는 장기 유학이 아닌 1년의 유학을 계획하고 왔기 때문에,  그 계획의 끝에는 연애의 끝도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여러가지 이유로 베트남에서의 생활을 더 연장할 계획이 있었지만, 다시 돌아온다 하더라도 ‘일단은’ 한국에 간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한국으로 잠시 돌아왔다.


 나는 고민 끝에 베트남에 다시 가기로 결심을 내렸다. 사실 베트남에 남겨진 ‘그 남자’가 내 선택에 있어 결정적인 요인은 절대 아니었지만, 아예 없었다고는 말한다면 내 심장이 비웃고 있는 것 같아 최대한 솔직해지려 한다. 가장 큰 이유는 학업 이었지만, 내 연애도 이어간다면…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  


 디데이를 다이어리에 체크하며, 베트남에 다시 돌아갈 준비를 하던 나날들이 한국에서 이어졌다. 그리고 떨어져있는 그리움과 보고싶은 설렘을 메신저의 쪽지창을 통해 열심히 전해 나르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나르던 사랑의 감정들이 ‘나 혼자만의 것’ 이었음을 머지 않아 곧 깨닫게 되었다.

 연애에 있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랑의 감정선도 변해가는 것은, 한 사람의 눈빛이나 말에 담긴 온기, 작은 손짓 하나에도 숨길 수 없이 전달 되는 아주 묘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묘한 어떤 것을 느껴보지도 못한채, 그가 다른 여자 손을 잡고 다닌다는 다른 한국인 친구의 ‘제보’를 통해 참 묘하게 알게 되었는데. 그 ‘제보’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기 위한 아주 작은 장치에 불과했다는 것을 베트남에 가서야 깨닫게 된다.


그가 손을 잡고 다니는 여자가, 내 바로 앞 방에 살던, 매일 인사를 주고 받던 나보다 예쁘장한 언니였다는 것을 알게된 순간. 매점에서 혼자 밥을 먹는 데 , 내 남자친구였던 그가 나의 손이 아닌 다른 여자의 손을 잡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직접 마주치는 순간.

나는 누가보아도, 참 애처롭기 그지없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이 곳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은 피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강한척 해야했고,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해내야 했다. 그런 ‘척’이 없이, 남들이 기대하는 비참한 여주인공의 역할로 그저 눈물을 뚝뚝 흘려내 숨는 모습은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알고 지내는 외국의 대학교에서의 작은 한인 사회에서 우리 이야기, 아니 ‘나’와 ‘그’의 이야기는 꽤나 ‘핫’한 가십거리가 되었는데, 남들은 ‘그새끼가 나쁜놈’이라고 손가락질 했지만 내게 그 이야기는 ‘네가 매력이 없었어’라는 것과 같은 어떤 공식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비록 내가 그 나쁜놈과 연애를 했을지라도, 그렇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꼬여버린 연애가 되어버렸을지라도. 내가 사랑 했던 그 순간들은 내게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나는 그 순간 언제나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 순간만큼은 그랬을거라 믿는다. 아니 믿어야 했다. 비록 매끄럽게 실뜨기를 하다 마지막에 다 엉켜버렸을지라도. 그 실뜨기를 하는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최선을 다해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려 하지 않는가.


 하지만, 어쨌든 그 사랑의 실뜨기는, 잔뜩 엉켜버린 실이 내게 덩그라니 던져진 채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엉켜버린 실을 가위로 싹둑 자르지도, 내팽겨 버리지도 못한채, ‘내가 어떤 게 부족했던 걸까?’, ‘나는 왜 그를 선택했을까?, ‘나는... 왜…?’ 로 끊임없이 나를 질책하며 그 실을 어떻게라도  풀어보려 애쓰는 시간이 내게 남겨졌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나와, 이별의 아픔에 허우적 대고 있는 내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을 때쯤, 상처는 또 그렇게 아물어가고 있는 듯 했다. 또 그 간극을 메꾸기 위해, 매일매일 공부를 악착같이 하려고 했다. 그와 새로운 그녀를 마주치기가 싫어 도서관에 억지로라도 더 붙어 있고, 그의 소식이 듣기 싫어서, 걱정인지 동정인지 알 수 없는 눈빛을 받기 싫어 한국인 친구보다는 베트남 친구와 더 많이 시간을 보냈다. 또 이러한 내 마음을 어떻게든, 베트남 친구에게라도 토해내야 속이 시원했으므로, 더 정교하게 공부하며 상처받은 내 마음을 친구들에게 ‘베트남 말’로 어떻게든 털어놓으려 했다. 그렇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련은 내 베트남어 실력을 수직상승하게 해주었다.


 슬픔과 자기연민에 빠지기 싫어 눈물을 소매로 닦아가며 하던 공부가, ‘내가 진짜 멋진 여자가 되서 네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게 할거야’라는 복수에 불타는 공부가 되더니, 점차 나만의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하는 진짜 나를 위한 공부가 되었다.


 그렇게... 한 뼘정도 성장했을까. 내게 또 다른 ‘한국’ ‘남자’가 찾아왔다. 사실 다 큰 어른들이 연애를 하는 것이 뭐 그리 대수인가. 하지만 나는 ‘베트남’이라는 특수한 곳에 있었고, 나는 이미 이 곳에서의 연애에 크게 데여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특수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국제연애를 선택하지 않는 이상 베트남에 있는 대학교에서의 한국인 국적의 남성, 그것도 나와 잘 맞을 수 는 남성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의 폭이 굉장히 제한적일 뿐더러, 남, 여가 헤어지고 나면 ‘안보면 그만’인 것이, 이곳에서는 ‘내가 가든, 니가 가든’, 한국으로의 귀국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안보는 것을 그만’할 수 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 저러한, ‘특수성’, ‘위험성’, ‘제한성’ 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찌됐든 또 속는셈치고 연애를 시작했다. 학교에서 나름 (속으로만) 좋아했던, 어떤 나만의 이상형에 가까운 선배가 나를 좋아한다고 하니 사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비록 그의 전 여자친구와 내가 서로 아는 사이이긴 했지만. 이미 오래 전 끝나버린 사이였다.

 

이럴 땐 내가 왜 이렇게 과감할 수 있는지, 나도 때론 이해할 수 없지만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연애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과 함께 새로운 연애는 또 그렇게 살며시 다가왔다. 일단 시작은 했지만, 모든 게 조심스러워 한 발 한 발 아주 조심히 새로운 연애의 물에 다가가고 있었던 나는, 발을 푹 담가 첨벙첨벙 놀아보지도 못한 채, 또 다시 나와야만 했다. 나를 좋아한다고 했던 그가, 그렇게 시작 됐던 그와의 연애가, 그가 전 여자친구를 잊지 못하겠다며 ‘헤어지자’하는 선포로 끝이 난 것이다.  


 이쯤 되니, 정말 연애 트라우마가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남자보는 눈이 없나?’,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서 형편없는 사람만 내 옆에 오는걸까?’ 라고 수없이 되물으며, 나는 자기비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진실일 수도 있었다.

 나의 남자를 보는 눈은 한정된 공간에 갇혀있고, 여자로서의 매력은 아직은 연애경험 부족으로 풋내가 났으며, 나는 좋은 사람으로, 매력적인 사람으로 다듬어져 가는 과정 중에 있는 20대 초반의 ‘여성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끊임없이 긍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못나서가 아니야’, ‘나는 매력이 넘치는 걸, 다만 무르익을 시간이 필요한거야.’ 라고 그렇게 스스로 긍정하고, 내가 나를, 애처로운 나를 예뻐주려 애썼다. 그건 이곳에서의 ‘생존을 위한 긍정’이었다.


 매일 눈을 뜨자마자 땀흘리며 조깅하는 나를, 베트남인들 사이에 혼자 당당히 요가 수업을 듣는 나를, 조기졸업을 목표로 선배인 구 남친이 있는 수업에도 꿋꿋이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학점을 이수하고 있는 내 모습을, 베트남 친구들과 진심으로 울며 웃으며 우정을 나누고 있는 내 모습을. 이렇게 기특한 나를, 그깟 꼬여버린 연애 때문에, 내게 상처를 준 남자들 때문에 ‘못났다’고 평가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치만, 사실 고백하자면 내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서 되뇌였다기 보다는 그것은 나 스스로에게 거는 어떤 최면과도 같았다. 내가 매일 거울을 보며, 나에게 이렇게 속삭여주지 않으면, 이렇게 화이팅 하지 않으면, 베트남에서의 유학생활을 버텨낼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난 꿈이 있어서 왔으니까, 그 꿈을 이룰 떄까지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거야.’ 하며 매일 밤 되뇌이다, 잠이들고, 이른 아침 오토바이 모닝콜이 빵빵 시작될 때면 또 그렇게 내 하루도 분주히 시작되었다.  


 비록 이 곳에서 만나는 남자와의 연애 서사는 산으로 가기 일쑤 였으나, 내가 제일 중심에 두고 있었던 내 학업 그리고 내 꿈의 서사는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는게 이제는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베트남은 이런 나를 치유해주었다. 갑자기 내린 비에 온 몸이 흠뻑 젖어버려 망연자실할 때쯤, ‘괜찮아 곧 마를거야’ 하며 언제 그랬냐는듯 뜨거운 햇살을 비춰주는 베트남의 하늘. 그 하늘이 언제나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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