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캔디의 성장에세이] 넘어지고, 일어서고
퇴사의 이유=‘열정’
그것도, 지나친 열정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언가 엄청나게 힘들었던 계기가 있었던 것도, 또 무언가 거대한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서서히 나의 지나친(?) 열정에 스스로 지쳐갔고, 내 열정의 장을 펼치기에는 나는 아직 어떤 일의 주도권을 쥘 수 없는 사원 나부랭이였으며, 또 아주 작은 권리라도 내게 '옛다'하고 쥐어주기에는
전체 회사 매출을 좌지우지하는 TV채널의 제일 잘 나가는 팀이 바로 내가 속한 팀이었던 것이다.
시간당 작은 건물 하나의 매출을 낼 때도 있으니,
주도적으로 상품을 기획해 내고, 가격을 노련하고도 또 노련한 협력사와 협상해 내고,
그럴 듯 있어 보이는 사은품도 상상도 못 할 가격에 공수해서 팀 내 이익으로까지 연결시키기는 일련의 일들.
당연히 신입 MD로서는 너무나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일인 것이다.
MD직군의 많은 동기들이 우리 팀에 오고 싶어 했었다.
이유는 하나, ‘제일 잘 나가는 팀’ (= ‘인센티브가 가장 많은 팀’)이었기 때문이었다.
여느 잘 나가는 팀이 그렇듯 그 팀에 소속된 선배님들은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고, 뒷모습에서 마저 활력이 폴폴 풍겨 나왔다.
‘나도 저 팀의 팀원이 되고 싶다’ 간절히 소망만 했지, 그것이 현실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행운의 도움으로, 그리고 어쩌다 보니 MD아카데미에서 우승을 하게 되어 원하는 팀에 배정이 되었다.
엄청난 행운의 깃발을 손에 쥔 줄로만 알았다. 모두가 선망하는 팀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라는 사람의 성향상 작은 팀이라도 내가 아주 조금이라도 권한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곳에 배치되는 것이 회사생활의 더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른 MD동기들은 다양한 채널에서, 자신의 상품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가며 주도적으로 기획해 판매까지 해 내가는 동안, 나는 여전히 선배 MD 옆에서 큐시트를 보며 자막 검수를 하고, 상품의 코드를 따는 전산 작업들만 하고 있었다.
내게는 그런 시도의 기회를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보수적인 아니,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팀이 우리 팀이었다. 누군가의 시도로, 매출 시간 블록이 하나라도 망가지는 경우 전사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곳이 바로 우리 팀이었기 때문이다.
열정러는 어떻게 서든 내 열정으로 팀에서 누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 열정을 분출해 내야 했으므로 어떤 날은 인형탈을 쓰고 생방송에 출연하기도 또 막대걸레 시연에 필요한 먼지를 모아 오기도, 크레용을 찾아 회사를 다 뒤진 적도 있다. 아, 잊을뻔했지만 나는 MD직군으로 배정받은 신입사원 윤선애다.
이런 내 열정과 책임감을 팀장님께서 예쁘게 보신건지.. 팀 내 실적정리라는, 대리님이 하시던 이 어마어마한 역할을 내게 던져주셨다. 홈쇼핑은 실시간으로 매출이 나오는 꽤나 재미는 채널이다. 하지만 그 실적정리를 담당하는 자에게 이 재미는 지옥과도 같았다.
실시간 업데이트는 물론, 임원분들의 주간회의 자료를 위해 매주 월요일에는 새벽 5시 반에서 6시 사이에는 어김없이 출근을 해서 한 주의 실적정리를 하며 숫자를 정리해야 했다.
나는 자그마치 고2 때부터 수학은 내 길이 아님을 선언했던 수포걸이었지만, 그동안 내 인생에서는 본 적도 없는 단위의 숫자를 정리해 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수포걸에게 제일 이해할 수 없는 말은 ‘숫자는 틀리지 않는다, 숫자는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가 그 배신을 얼마나 많이 당했는데.. 그렇게 나를 배신했던 숫자를 데리고 매일을 아니 매 순간을 또 배신당할까 노심초사하며 지냈다.
팀장님이나 선배팀원분들은 내게 툭하면 “선애야! ~시 타임, 분당(1분당 매출실적) 얼마 나왔니?”라고 물어보기 부지기수였다.
오전 오후 타임별로 머릿속에 대충(이라 적고, 암기라고 반증한다.) 저장해 놓았다가 재빠르게 대답을 했다.
매일 보니 어느 순간 숫자에는 어느 정도 감이 잡혔긴 했지만, 끝내 이 숫자가 내게 어떻게 다가오는지는... 숫자 너의 그 이름 아무리 물러보아도 숫자 너의 몸짓의 의미를... 내가 퇴사 직전까지 찾지 못하겠더구나.
주말에도 큰 pgm(주말 오전 특집 프로그램)이 있던 날이면, 전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어마어마한 매출 규모였기 때문에, 또 경쟁사에도 함께 공유되는 숫자였기 때문에 밤에라도 출근해서 자료를 정리했다. (그래서 팀장님께서 한 정거장 차이에 자취방을 두고 있는 나를 실적정리 담당자로 선정하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
열정과 책임감은 그냥 내 몸에 DNA처럼 장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 노동에 대한 육체적 힘듬은 크게 느끼지 못했었다. 내게 다른 책임이 주어졌어도, 나는 어쨌든 이렇게 했을 것이다.
어떤 날은 엑셀을 잘못 돌려서(?) 숫자가 어그러져 팀장님께 한 번은 호되게 혼난 날이 있었다. 이 날은 정말 화장실에 들어가서 누가 들을까 니트소매를 입에 앙앙 물고 엉엉 울었던 기억이 있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정말 열심히 하는데, 혼나기까지 하니 왠지 모르게 서러운 것이다.
선배 MD 님들도 내게 너무 막중한 임무가 주어짐에 안타까워하시기도 했지만, 또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일로 바쁜 실시간이었기 때문에 내게 그 따스한 시선을 던져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것이 또 현장이었다. 실시간 단위로 매출이 움직이는 부서는 실시간 단위로 많은 희로애락의 궁전이 열리는 그야말로 다이내믹한 곳이었다. 또 모든 회사가 그렇듯, 각자도생 아니던가.
이 매출을 정리하고, 팀장님과 사업부장님께 보고해야 하는 일이 힘들어서 회사생활을 그만두고 싶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갈증’이었다.
내 열정과 책임을 ‘내 것’에 쏟고 싶은 목마름. 내 상품을 기획하고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렇게 내 상품으로, TV 화면에 ‘MD 윤선애’라고 나오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동기들 앞에서 나의 상황을 털어놓거나 불평할 수도 없었던 것은, 나는 누구나 선망하는 팀이었고 또 누군가가 간절히 원했던 자리에 와있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나의 볼멘소리는 또 상처일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2년의 시간 동안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내 역할을 했다. 수시로 그룹 내 통역업무로 불려 가기도 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엑셀의 숫자를 맞추며 보고자료를 만들었다.
사수 MD님 옆에서 상품 회의가 있는 날이면 샘플과 커피를 동시에 날라댔다. 회의에서 주도적으로 말씀하시는 사수님을 보며, ‘나도 언젠가 꼭 저렇게 해내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사내 체육대회든, 행사가 있으면 또 그렇게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축구대회에서, 공격수로 혼신의 힘을 다 해 뛰다 다리가 골절됐을 정도.
다시 한 번! 잊을뻔했지만 나는 MD직군으로 배정받은 사원 윤선애다.
문득, 이 열정이 적절한 곳에 쏟아부어지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MD라는 내 직무로서 이 열정을 부어보고 싶었지만 내게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아니 사실 조금만 기다렸으면 이제 내 차례였을 거다. 그만두기 직전, 상품을 론칭해 ‘입봉’했으니 말이다 (비록 이미 다른 선배님으로부터 거진 기획이 완료된, 사람들이 많이 보지 않는, 매출 부담이 적은 시간이었긴 했지만)
어쩌면 눈에 보이지는 않는 그 어떤 무형의 내공으로 내 업무 역량에 필요한 것들이 만들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2년남짓 부지런히 정리하는 이 수많은 숫자 안에 ‘눈에 보이는 내 것’은 없었다.
2년 반의 시간 동안 이미 내 열정을 모두 소진하고 미래의 열정까지 끌어다 썼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름 최선의 회사생활을 했지만, 일의 보람은 하나도 느낄 수가 없었다.
혹자는 회사라는 공간에서 굳이 일의 보람을 꼭 찾지 않아도 된다 할 것이다. 일한 만큼 돈을 받으면 되는 것이라고. 나는 내가 하는 업무의 양 그 이상으로, 팀 전체의 인센티브까지 더해져 통장 곳간은 아주 기름져 있었다.
그렇지만, 난 누구보다 내 일의 보람이 중요한 사람인 그런 류였던 것이다. 내 통장의 인센티브는 왠지 내 것이,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아닌가. 우리 팀의 실적을 매일을 정리했지만, 내가 만들어낸 숫자는 그곳에 없었으며 내가 만들어낼 기회조차 없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그래, 이렇게 쏟아내는 열정의 시간을 회사가 아닌 '나 자신'에 쏟아보자 하고.
하지만 회사생활 겨우 2년 반의 경력. 내가 가진 역량은 딱히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도 아니었으며,
내 사업을 무언가 주도적으로 해낼 수 있을만한 아이템도 없었다.
그러던 와중 내 안의, 나만이 가진 그 특별한 아이템이 보였다. ‘베트남어!’.
마침, 신문에서 베트남어가 수능의 제2외국어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소식이 들렸다.
뜻이 있는 길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나는 그렇게 베트남어 강사로서 살아보기로, ‘강사 윤선애’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만들어보자 다짐했다.
퇴사를 결정하고, 제일 먼저 팀에서 내가 잘 따르던 선배님들께 이야기를 드렸다. 어쩌면 나도 이 안정된 울타리를 부시고 나가는 게 조금은 두려웠기에, 은근 나를 설득해주셨으면 했는지도 모른다.
배선배님은 평소에도 내가 동경하던 카리스마 있는 선배님이셨다.
1층에 있는 투썸에서 커피 두 잔을 시켜놓고 이야기를 나누던 그날이 여전히 생생하다.
‘니 바깥세상이 얼마나 험한 줄 아니. 정신 챙기고 계속 다니라’라고,
경상도 출신의 배선배님께서 그렇게 말해주실 줄 알았다.
그러면 나는 못 이기는 척, 1년만 더 버텨보자는 심상이었다.
“선애 니 그만둘라고?”
“네, 제 일 해보려고요.”
“그래? 뭐해먹고살라고?”
“저 베트남어 가르치는 일해보려고요”
그리고, 선배님은 따뜻한 커피 한 모금. 홀짝 하시더니, 눈빛마저 따뜻하게 나를 쳐다보시며,
“선애 니는 다 잘할 거다! 니는 어디서든 다 잘할 거다”
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어떤 상황에서의 모범답안이란 건 있을 수 없지만, 이 또한 내가 예상하지 못한 선배님의 반응이었다.
예상치 못한 답안에 예상치 못한 눈물이 불쑥 나왔다.
그리고, 퇴사를 선언한 이후 회사에서 모든 걸 정리하고 나오기 직전까지 참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았다.
사수이시자, ‘내가 이 시대의 커리어우먼의 표상이다’라는 메시지를 쇼트커트의 머리스타일부터 날카로운 킬힐의 발끝까지 풍기고 다니시던 이 MD 님께서는, 내게 보라색의 꽤 비싼 손목시계를 선물로 주시며 ‘정말 잘되길 바란다’고 말씀해 주셨다.
맨발에 구두를 자주 신으셨던, 후배들을 장난기 가득한 자신의 방식으로 진심으로 대하셨던, TV에도 가끔씩 반갑게 나오시는 신 MD선배님은 재방 모니터링 체크를 맡은 내게 그의 귀한 시간을 나누어 작은 워룸(war room- 매 순간 매출이 실시간으로 보이는 곳이자, 스튜디오를 모니터링할 수 있는 일명 MD들의 전쟁의 방)에서 이런저런 힘이 되는 이야기를 특유의 농담과 함께 전해주셨다.
또 연륜과 함께 범접할 수 없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지셨던 신 MD 님께서는 “선애야, 꿈을 크게 가지고 너의 잠재력을 믿어. 너는 더 크게 될 수 있는 사람이야”라며, 아빠와 같은 응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어느 날 팀장님께서 사원급 친구들에게 각자 쓰는 향수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나는 당시 데이지 꽃이 뚜껑에 지나치게(?) 크게 붙어있는 마크제이콥스 향수를 쓰고 있었다.
어떤 향이 마음에 들어서라기보다는 그 병 모양에 끌렸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가진 것에 비해, 크고 화려하게 빛나고 싶었던 내 마음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
어찌 됐든 그렇게 물어봐주셨던 팀장님은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퇴사 전에 마크제이콥스 지갑을 선물로 주셨다. 나가서 돈 많이 벌라며, 팀원들과 함께 준비했다고.
내가 이렇게 수상소감처럼 아주 장황하게 많은 지문을 할애하여, 팀원들의 이야기를 나열하는 것은
이 끝자락의 귀한 기억으로 내 첫 직장에서의 시간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이들의 응원으로, 내가 용기 있게 한 걸음을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고 그 눈빛으로 음성으로 전해준 메시지가 홀로서기를 하는 내게는 두려움의 벽을 부수고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되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내가 함께 있었단 사실을. 회사생활을 하며 많이 놓치고 있었던 것 같았기에, 나가려는 순간 아쉬움이라는 감정이 회사를 떠나려는 내 발걸음에 더덕더덕 붙고 있었다.
짐 정리를 모두 하던 날. 팀원들 모두에게 편지를 썼다. 회사라는 공간을 떠나는 일이 이렇게 슬플 줄은 몰랐는데, 20대의 나는 2년 반 동안 정말 회사가 내 전부인 것처럼 살았기 때문에 꽤나 눈물이 많이 났다.
또 내가 이곳을, 여기를 사랑했었구나.라는 뒤늦은 깨달음이 몰려오기도 했다.
아쉬움이 남지 않게,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게 정말 잘 되어야지,라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먹었다.
내가 잘 되지 않으면, 이 공간은 언제든 후회의 공간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을 것만 같았다.
업무분담에 대한, 기회에 대한 서운함도 물론 많았지만, 또 화려한 회사 안의 작은 내가 초라해 보일 때도 많았지만...
돌이켜보니 또 다 사람이 하는 일이었고, 내게 남은 것도 결국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내 주위에는 좋은 사람들이 참 많이도 남아있는 것이다.
‘잘되자’, ‘잘되자’ 하고 마음을 먹었다. 그것은 어떤 내가 잘돼서 꼭 보여주겠어 라는 억하심정의 잘되자가 아니었다.
내게는 참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그래서 ‘내가 그때 왜 그만두었을까?’하고 후회하며 돌아가고 싶을까 봐 다짐하는 잘되자였다.
그래서 지금 내가 잘되었냐고 물어보신다면,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처음 퇴사할 때 베트남어 강사로서 목표로 삼은 것은 모두 이루었기 때문에 잘 된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또 프리랜서의 삶이, 1인 기업의 삶이 그러하듯이 또 끊임없이 나를 이끌어가며 잘되어감을 만들어가야 하는 삶을 살고 있기에, '잘되었다'고 완료된 대답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전히 잘되기 위해 야망을 가져보고, 여전히 잘되고 싶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가끔씩 내가 출연한 여행 프로그램이 재방송이 될 때면 여전히 선배님들이 톡으로 나의 안부를 물어봐주신다.
“선애 잘 지내니?"
나는 안다. 그들이 내게 물어보는 잘 지내냐고는, 정말 진심이 200프로는 담긴 말이라는 것을.
그들은 인생 선배로서, 비교적 어린 나이에 안정된 회사의 울타리를 나가 내 몸하나로 먹고살며, 헤쳐나가고 있는 내가 진심으로 잘되었으면 하는 바람일 것이다.
퇴사 후 사람들에게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은 ‘후회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후회가 남지 않는 온전한 삶이 과연 있을까? 선택의 함정이 그러하듯, 내가 두고 온 선택하지 않은 그 길이 더 매력적이여 보이는 순간이 내게도 꽤 많이 온다.
그러나 나는 그때가 아니어도, 결국은 언젠가 이 길을 선택했을 거라는 걸, 나 자신을 너무나 잘 알기에.
조금이라도 일찍 나와, 홀로 버텨내고 찾아가는 이 삶을 선택한 것이 그래도 더 나다운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도 내가 선택한 이 길에서, ‘잘 지내’며 ‘잘 되어’ 보려고 한다.
“선배님들, 동료님들! 저는 잘 지내요! 그리고 잘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