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 소식이 하나 있었다. 최근에 여행답게 다녀온 여행이라곤 일 년 전에 갔던 런던, 파리 여행이 마지막이었는데도 브런치에서 여행 크리에이터라는 배지를 달아주었다. 한비야 키즈세대로 여행을 하며 글을 쓰며 사는 여행작가가 낭만적 이어 보이던 시절, 잠깐이지만 여행 작가가 되면 어떨까 생각했었다. 내가 생각한 여행작가는 남미 안데스 산맥을 누비며 남미에 대해 쓰고 있을 줄 알았는데 대신 미국을 기록한다. 이젠 장소를 이동해서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줄 알지만 어쨌든 여행은 일상에 활력이 되기도, 글감이 되기도 한다. 출장 중에도 틈틈이 꾸준히 도시 이야기를 썼었던 나를 칭찬한다. 질보단 양임을, 성실함이 힘임을 다시 한번 상기한다. 굳이 자비로 여행을 가지 않고도 방방곡곡을 둘러볼 수 있게 해주는 회사한테도 고마운 마음이다.
성실하고 볼일이다. 특별할 것 없는 미시간의 프로젝트에 배정받고 (내 관심사여서 매니저가 특별히 배정해 준 건데) 미시간으로 날아다녀야 할 때면 비행기 스케줄이 후지다, 시차가 힘들다, 가서 할 게 없다,라는 식으로 내심 툴툴거리는 마음이 있었는데 역시 존버는 배신하지 않는다.
재작년에 가기로 했던 포르투갈 출장이 비행기 티켓팅 후 엎어지고 나서 실망이 컸지만 뭐 어쩌겠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성실한 회사 생활을 해오고 있을 때쯤 독일 출장의 기회를 감지했다. 원래 프로젝트 멘토해주시는 분이 갈 수도 있는 출장이었는데 그분이 출장 일정 때 하필 그리스 크루즈가 계획되어 있어 이미 진즉 발을 빼고 기회가 나한테로 온 것이다!!!! 비즈니스를 타고 해외 출장을 가는 것이다!!!! 출장 일정도 10일로 꽤 긴 데다가 기회는 이때다 독립기념 휴일도 껴있는 데다 휴가도 일주일을 붙여 장장 3주의 독일 일정!!!
미국과 연합국이 승리한 역사에 살고 있어선지 서유럽 (영국 프랑스 스페인 이태리에 오스트리아 껴드림)이나 놀러 가겠다고 생각했지 히틀러의 나라이자 EU 최고 경제 강대국 독일이 좋다고 하는 얘기는 간간히 들어봤지만 아직 못 가본 데가 많아 독일을 가보고 싶다고 생각은 못해봤었다. 출장 일정을 확정하고 독일을 뜯어보기 시작하니 바이에른 왕국 시대에 왕 및 제후들이 지어놓은 성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데다 신성로마제국의 흔적이 남아있고 소도시 하나하나가 주옥같고 역사가 매우 긴 것이 볼 것이 아주 많은 나라임에 마음이 몹시 들떴다. 이번 여행엔 등산까지 할 여유는 없지만 독일 남부는 알프스도 살짝 걸쳐있다. 비행기 티켓을 예약을 하고 나니 마음은 이미 콩밭행이다.
시애틀에서 일주일에 3번, 뮌헨으로 가는 직항이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왕 가는 거 대한항공에 마일리지를 적립하고 싶어서 에어프랑스 여정을 기웃거렸지만 (겸사겸사 파리 공항에서 레이오버해서 파리냄새라도 좀 맡을 겸, 저번에 못했던 면세점 구경도 할 겸) 작년 파리 공항에서 비행기 놓칠까 봐 마음을 졸이며 식은땀을 흘렸던 걸 생각하면 도무지 75분 만에 환승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변동성을 줄이기 위해 루프트한자 직항을 타기로 했다.
비지니스석을 예약을 하니 라운지 액세스가 따라온다. 홀로 여행족들을 위한 섹션이 나뉘어있는 칸막이가 높은 소파들도 있고 일행들이 같이 앉아 얘기할 수 있는 일인용 소파들도 있다. 생각보다 도떼기 시장 느낌이라 놀랬다.
샐러드 바, 칩스 앤 살사 바, 수프 두 종류와 빵, 커피 바 등이 있었고 술을 주문할 수 있는 바도 있다.
제일 맛있었던 건 랜치에 찍어먹는 생당근 하고 생브로콜리, 그리고 나오기만 하면 어린이들이 다 가져가서 보기가 힘들던 브라우니. 별 맛은 없었지만 나와 사람들은 열심히 음식을 먹었다.
비즈니스석은 짜릿했다. 항공기는 에어버스 A350-900로 비지니스석은 2-2-2 배열이었다. 창가를 소망했지만 비행기 티켓을 출장 가기 2주 전에 예약하는 바람에 가운데열 좌석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앉았을 때 끝도 없는 레그룸에 감동을 받았다. 어메니티로는 포르쉐디자인 파우치에 록시땅 핸드크림과 립밤, 수면 양말, 치약, 칫솔이 제공되었다.
비행기가 뜨기 전부터 음식 세례가 시작된다. 웰컴드링크로 샴페인, 물, 루프트한자 시그니쳐 레드 드링크가 제공되었는데 시그니쳐 드링크를 골랐다. 토닉 워터가 들어갔다는 거 말고는 레시피가 기억이 안 나지만 색도 예쁘고 맛있었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코스 요리가 시작되기 전 상추, 피망, 애호박(주키니)이 똘띠아에 싸져있는 한입거리 음식이 오이피클, 올리브와 함께 제공되었다.
전채요리, 메인요리, 디저트에는 각각 세 가지 옵션이 있고 그중에 하나씩 고르면 된다.
첫 번째로 애피타이저. 다른 옵션으로는 크랩 케익, 돼지 안심이 들어간 슬로(?) 스타일의 애피타이저가 있는데 소식가인 나는 주는 대로 다 먹다가는 비행 중에 부대낄까 봐 첫 번째 요리로 채식 메뉴를 선택했다. 쥬키니 룰랜드 안에 고트 치즈를 가득 채워놓은 음식이다. 빨간 소스는 토마토와 피망이 베이스였는데 새콤달콤 맛있었다. 샐러드도 맛있었고 승무원이 추천해 준 마늘빵도 맛있었다. 따뜻했으면 더 맛있었을 듯. 애피타이저는 대만족.
안심과 연어 사이에서 끝까지 고민을 하다가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 승무원에게 추천을 받아 안심을 골랐다. 물론 기내 음식이라 퀄리티에 큰 기대를 하는 것은 좀 그렇긴 하지만 승무원이 어느 정도 익기를 원하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럼 니가 물어봤어야지 알아서 구워 나온 안심은 웰던중에 웰던이라 실망스러웠다. 안심은 레어에 가까운 미디움 레어지 아스파라거스도 너무 많이 익어서 식감이 완전히 없어진 채 물컹물컹한 상태였다. 시금치가 약간 들어있던 맥엔치즈는 맛있었다.
디저트 메뉴를 다시 고르라 해도 이걸 고르겠지만 단순한 초콜렛 크림 맛이었다. 다른 옵션으로는 생과일과 치즈보드가 있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는 승무원이 아침 먹을 때 깨워줄까, 아님 그냥 잘래,라고 물어보길래 깨워달라고 했다.
비지니스석을 탑승해서 가장 좋았던 두 가지다. 좌석 풀 리클라인 기능과 노이즈 캔슬링이 되는 헤드셋.
좌석이 풀 플랫이 되니 밥 먹던 시간 빼고는 비행 내내 쿨쿨 자면서 올 수 있었던 턱에 도착해서 하루를 풀로 소화했다. 밥 먹고 바로 누워서 잤더니 아침 먹으러 일어났을 때 역류성 식도염 증상이 잠깐 나타나서 이게 비지니스의 단 하나의 단점인가, 싶었다. 배부른 소리
비행기 착륙 1시간 전에 나온 아침식사. 승무원이 깨워서 놀래서 일어났는데 주위 사람들은 식사를 마쳐가고 있었다. 소세지를 좋아하지 않아서 초리조는 한입 먹고 건드리지도 않았고 오믈렛은 그냥 괜찮았다. 오히려 크로상에 살구쨈하고 버터 치덕치덕 발라먹는 게 맛있었다.
비즈니스 좌석을 온전히 즐기기엔 10시간은 조금 짧은 듯 느껴졌다. 밥 먹는 나머지 시간을 제외하면 잠을 자다 보니 티모시 샬라메의 2017년 작, 2시간 러닝타임의 Call me by your name을 채 끝내지 못하고 비행기에서 내려야 했다. 다른 남주 아미 해머도 너무 미남이라 근데 얼굴값 하는 막장 범죄자 둘이 짧은 반바지 입고 자전거 타는 신이 예쁜 영화였다.
딱딱한 독일 이민국 직원에게 너 목적지가 어디니, 독일에 얼마나 오래 있을 거니에 대한 대답을 해주고 도장을 받고 짐을 찾아 나오니 회사에서 보내준 운전사가 내 이름을 들고 게이트 밖에 서있었다. BMW 7 시리즈에 몸을 싣고 아우토반을 달려 레겐스부르크로 이동하는 동안 피곤을 참지 못하고 골아떨어졌다가 호텔 도착 5분 전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정신이 붙어있을 때 구경한 아우토반은 속도 제한이 있는 구간도 있었지만 속도 제한이 없는 구간이 대부분이라 신기했다. 운전사가 시속 160km를 넘게 밟으면서 왔는데 차가 너무 좋아서였는지 고속으로 밟는데도 아주 조용하고 편안하게 레겐스부르크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