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사진 많음 주의
바이에른 왕국이 빚은 찬란한 궁전들과 예쁜 그림이 가득한 미술관들을 돌아본 후 어디를 갈까 생각하다가 독일 역사의 가장 어두운 장소중 하나일 다하우 수용소를 가기로 했다. 빛은 어둠 위에 드리우는 법이다. 숙소에서 전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거의 한 시간을 달려 도착했다. 님펜부르크 궁전보다도 한참 북쪽에 있지만 꼭 가볼 것을 추천한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1933년 히틀러가 국가 수상의 자리에 앉고 몇 주 후 세워진, 나치가 지은 첫 번째 강제 수용소이자 강제 수용소중 가장 오랜 시간 운영된 곳이다. 이후 나치 독일이 지은 강제 수용소들의 모델이 되었다고도 알려져 있다.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에 가려져서 그렇지, 독일 내 최대 규모 강제 노역 수용소이며 12년 동안 운영되면서 20만 명의 사람들이 거쳐갔고 이중의 1/5 정도가 이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1945년, 나치의 패망 이후 세계 2차 대전이 막을 내릴 때 다하우 수용소에는 32,000명 정도의 인원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말하기도 죄송스럽지만 이곳은 6,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이곳의 수용자들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었을지, 위생상태가 어땠을지 숫자가 이야기해 준다. 미국이 이곳을 점령한 이 후로는 3년 동안 독일의 사회주의자들과 SS 친위대 (슈츠슈타펠)를 가둬놓는데 쓰였고 미군들이 머물기도 했고 1948년부터 1964년까지는 난민들의 숙소로 쓰였다.
이렇게 강렬하게 마음이 아픈 곳은 처음이었다. 마음에 돌덩이가 앉았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았다. 마음에 마치 무게라도 생긴 듯,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한국의 슬픈 역사에 대한 나의 무지함이. 전시를 보며 우는 사람도 있었다.
ARBEIT MACHT FREI, WORK SHALL SET YOU FREE,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
말만 보자면 나쁜 말이 아닌데 황망하게 느껴진다.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으면서 대가는커녕 원치도 않는 강제 노동이 행해지는 곳에서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한다라니. 강제 노동을 하다가 자유를 맛보기도 전에 이곳에서 증발해 버린 영혼이 몇 만 명이다. 노동은 신성하며 자유는 잃기 전까지는 모르는, 역사의 많은 사람들이 피 흘려 얻어낸 소중한 가치라 나치의 슬로건으로 노동을 강조하는 것은 많이 부적절해 보인다.
ARBEIT MACHT FREI 가 써진 문을 지나면 오른편으로 ㄷ자의 엄청나게 큰 건물이 펼쳐진다. 이 건물 역시 수용자들이 지어 올린, 수용자들의 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해 필요한 주방, 의류실, 목욕탕, 빨래실 등이 있었던 건물이다. 건물의 서쪽 편엔 새로 들어온 수용자들이 등록을 하는 절차를 하는 집무실이 있었다고 한다. 이 건물의 지붕에는 이런 말이 써져 있었다고 하는데, 이도 참 기가 차다. 수용자들을 자유로 이끈 것은 나치의 패망이었는데 말이다.
"There's a path to freedom. Its milestones are: Obedience, Honesty, Cleanliness, Sobierty, Hard Work, Discipline, Sacrifice, Truthfulness and Love of thy Fatherland"
"자유로 가는 길은 존재한다. 자유의 길로 가는 이정표는 복종, 정직, 청결, 절제, 근면, 규율, 희생, 진실 그리고 조국에 대한 사랑이다."
수용소가 지어진 직후 초기에는 주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으나 시간이 점점 가면서 거지들이나, 사회 부적응 자들, 유대인들도 수용소에 들어오게 된다. 형제 복지원이 생각난다. 그 이후로는 이민자들, 여호와의 증인 등 종교인들, 동성애자, 각종 범죄자들도 수용소로 들어온다.
1938년 4월엔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삼키면서는 나치에 반대하는 자들, 유대인들 등이 본격적으로 다하우 수용소로 들어오기 시작하고 1938년 11월엔 나치 독일이 이유 없이 유대인 커뮤니티 사냥을 시작하며 만 명이 넘는 대규모의 유대인이 다하우 수용소로 들어오게 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곳은 6,000명 정도가 살 수 있는 규모의 수용소였다.
다하우 수용소의 상징이 된 이 조형물은 가시철조망에 걸린 수용자들을 상징하며 추모한다.
※ 잔인한 사진 주의
고문을 받고 죽은 루이스 쉴로스라는 이름의 사업가의 뒷모습. 탈출을 시도하려다 총에 맞은 유대인 아브라함 보렌스타인. 목매달려 죽은 구스타브 힌즈.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을 넘으려다 감전당해 죽은 프란즈 라반다. 데쓰 챔버 앞에 늘어져있는 시신들.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꽤 충격적이지만 그만큼 현실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사실적으로 전달한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나라도 이렇게 잘하고 있겠지. 이 시신들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는지 1940년에 SS는 화장장을 만들어 1940년부터 1943년 동안 무려 10,000구의 시신을 화장했다고 한다.
1944년부터는 남성들만 있던 수용소에 여성들도, 특히 유대인 여성들이 수용소에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이들은 모든 강제노동과 열악한 환경에 더해 성폭력의 희생양이 되었다.
ㄷ자의 메인터넌스 빌딩 맞은편으로는 가로수길과 그 양 옆으로 수용자들이 지냈던 서른 개가 넘었던 배럭의 터가 남아있다. 이 배럭들 역시 수용자들의 "노동"으로 지어진 건물들이었는데 그중 몇 건물에서는 말라리아 등 질병을 주입하거나 저체온증, 인간이 어느 정도의 압력과 고도를 견딜 수 있나 등 생체 실험도 행해졌다고 한다. 물론 수용가능 인원을 훨씬 넘어버린 수용소의 상황의 위생이나 균형 잡힌 식사를 할 수 없는 많은 수용자들은 질병을 얻었고 죽음의 문턱에 가까워졌다.
예전 사진을 보면 가로수길의 나무들도 키가 작았었는데, 모든 역사를 목격하고도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무들은 키가 훌쩍 커버렸다. 수용소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가로수길에서 같이 노래를 하거나, 편지나 드로잉들을 교환하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하면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공감대 의식을 기르고 삶의 의지 다시 되새겼던 듯하다. 잔인한 인간들에게 종속되어 고통을 받았지만, 그 고통을 결국 인간들에게서 희망을 찾아 이겨내어 가는 아이러니 하지만 기적 같은 일들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가스실에 들어간다고 하면 사람들이 저항을 하니 사람들이 옷을 다 벗은 채로 반발 없이 들어갈 수 있도록 샤워실에 가는 거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가스실로 들어가는 수용자들이 몇 분 후 죽을 것이라는 것을 모른 채 죽음의 방으로 향하게 했다는 것이 정말 잔인하다. 가스실 바로 옆으로는 시신더미를 보관하는 창고와 시신을 태우는 화장소가 붙어있다. 인간에 대해 어떤 태도와 생각을 가졌었길래 나치는 이런 식으로 인간을 물건 마냥 무덤을 쌓아놓을 수 있을까. 나치에게 인간의 존엄성이란 무엇이었을까.
30개가 넘는 배럭들의 터를 지나 가로수 길을 끝도 없이 걸으면 가스실과 화장터가 있는 건물과 배럭들 사이에 전쟁 후 천주교, 개신교, 유대교, 러시아 동방 정교회에서 세워둔 종교 추모시설이 있었는데 왠지 감동적으로 느껴졌다.
수용소 생활 중 미소를 보이는 사람의 사진은 한 장도 보지 못했는데 연합국이 승전보를 울리고 해방이 되고 나서야 미소를 보여주는 수많은 수용인들. 가슴이 아프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점은 체험학습처럼 학교에서 수용소를 둘러보러 나온 학생들이 아주 많았다는 점이었다. 과거에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 배우고 반추하는 민족이라니. 시간이 흘러 희생자들이 세상을 떠나 역사가 잊히기를 기다리는, 역사를 지우고 자기네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는 다른 패전국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어렸을 때 서대문 형무소 같은 곳을 가서 일제강점기 역사니 근현대사니 하는 것들을 배웠을 텐데 기억도 잘 나지 않는뿐더러 내가 우리나라 역사를 잘 알고 있지가 않다는 게 슬프다. 나이가 더 먹은 지금,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알아보고 기억하고,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깨어있는 시민이 되겠노라고 다짐을 다시 한번 하게 되는 곳이었다. 잔인한 독재자를 만나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고 고난의 시간을 보낸, 우리가 당연시 여기고 있는 소중한 자유를 얻기 위해 피를 흘린 모든 사람들을 추모한다.
수용소를 다 둘러보고 나오니 간단히 식사를 할 수 있는 카페테리아가 있어서 엄마와 커리 부워스트를 나눠먹고 다하우 수용소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