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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phapha Dec 22. 2020

아빠와 똥개

(feat.개과천선)


생후 1년이 이제 갓 넘은 믹스견, 일명 똥개가 친정집 문앞을 지킨다.

옆 동네에 아는 오라버니네서 새끼를 낳았다는 말을 듣고 귀촌을 하자마자 강아지 새끼들을 보러 달려간 엄마는 유독 몸은 작은데 발이 가장 컸다는 똥개 한 마리를 집으로 데려왔다.

이미 안방을 점령하고 있던 시추가 있었기에 아빠는 무슨 또 개새끼를 데려와 키울라냐고 엄마에게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강아지를 좋아하는 엄마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올해 초 엄마한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차 사고로 10년을 키우던 시추(앵두라는 이름의 우리 집 개)가 그 자리에서 즉사를 하게 되었고 잠시 외출을 갔던 엄마가 보면 기절할까 싶어 아빠가 재빨리 산에 묻어주었다는 말을 전했다.

"앵두가 나 좋으라고 빨리 갔나.. 그런 생각이 들어.."

재작년부터 눈이 좋지 않던 앵두가 귀촌과 동시에 눈이 거의 멀다시피 해서 엄마와 산책을 하면 곧 잘 논두렁에 빠진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었다.

안타까운 마음이 컸지만 딱히 방법이 없다는 병원 측의 말에 안약만 넣어주고 있었던 때였다.

그런 앵두가 사고로 죽게 되자 엄마는 의기소침해졌다.

집에 오니 허전하고 밖을 나가도 휑하게 느껴졌다.




곰돌이 (영국의 사냥개와 믹스된걸로 추정하고 싶은)




오히려 엄마는 앵두가 죽고 나자 우리 집 똥개(곰돌이)한테 관심이 사그라들었다.

엄마가 요양보호사로 일을 시작하게 되자 곰돌이의 밥을 챙겨주거나 같이 놀아주는 일을 하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그 큰 발을 믿고 데려오는 게 아니었다면서 엄마의 덩치보다 더 커져버린 곰돌이의 힘에 밀려 산책은 꿈도 꿀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와 반대로 아빠는 원래부터 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그저 엄마의 잔소리와 취향에 맞춰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30년 전부터 끊임없이 다양한 종류의 개와 동고동락을 해왔다.

개와 함께 살면서도 술만 먹으면 괜히 시비를 걸거나 때리는 일도 허다했고, 이뻐하는 모습보다는 개를 귀찮아하는 모습이 훨씬 많았다.

많이 예민했던 앵두한테는 물린 적도 여러 번이라 앵두가 죽고 나면 그 어떤 개도 집에 데려올 것을 금지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좋아서 키우는 개도 사람처럼 보듬어주려면 힘든 건 당연한 이치인데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개랑 30여 년을 함께 살라니 꽤나 괴로운 만도 했다.




아니 요놈이 음청 나게 영리한 놈이여
사냥개보다 더 똑똑하다니께




엄마의 일이 본격화되면서부터였다.

엄마는 급기야 운전면허 필기와 실기를 한 번에 붙으며 아빠의 SUV 차량을 겁도 없이 끌고 다니며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했다.

기타를 치거나 낚시터를 다니던 한량의 아빠가 코로나와 빈털터리 주머니 신세를 인지하게 되면서 꼼짝없이 어딜 가지도 못하고 집만 지키는, 곰돌이와 같은 신세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기타 줄을 튕기고 노래를 부르는 일도 하루 이틀이지 농사에 관심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몸을 움직이는 일에는 전혀 취미가 없어 눈만 끔뻑거리며 혼자서 먼 산만 쳐다보기를 수백 번이었다.




엄마의 잔소리에 못 이겨 곰돌이와 새벽 산책에 나서기 시작한 게 3개월 전쯤인데 요즘은 아침저녁으로 곰돌이의 울부짖음에 반응하며 주도적인 산책을 이어나가고 있다.

수동적 아침 산책이 능동적 저녁 산책으로까지 이어진 까닭이 있었으니 바로 삼촌이 키우던 사냥개와의 만남에서였다.

새벽 운동을 하러 나간 그날, 우연히 동네 어귀에서 삼촌과 사냥개를 만났고 뛰어다니며 반가워하는 개들 뒤를 마구 쫓다가 힘들어진 두 사내가 멈춰서 숨을 고르고 있었단다.

아빠가 시계를 보고 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 곰돌이를 연신 불렀고, 이에 삼촌도 함께 로크를 부르며 동네를 걸었는데, 어디로 사라진 줄 모르겠던 녀석들이 몇 번을 불러도 나오지 않아 난감해진 찰나 곰돌이만 아빠한테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처남! 나 먼저 갈라니까. 천천히 오드라고"








"아니 사냥개를 키우면 뭘 해. 맨날 묶어두기만 해서 바보 됐다니까. 우리 곰돌이 봐봐. 내가 딱 부르니까 오잖아. 아주 요놈이 보통 영리한 게 아니여"

삼촌과 보이지 않는 심리전에서 월등히 이겨버린 아빠는 그날 삼촌의 껄끄러운 시선을 뒤로하고 곰돌이를 앞장 세워 의기양양하게 집까지 걸어왔다.

이에 합세해 엄마는 곰돌이는 그냥 똥개가 아니라 영국의 사냥개(오터하운드) 같은 품종과 믹스가 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시골에 그런 품종이 있었나)

이후에 아빠는 곰돌이와 산책 나간 동영상을 가족 톡에 올리거나 직접 곰돌이의 털을 깎아주는 모습이나 개껌을 씹는 곰돌이의 사진 등을 종종 보내오기도 했다.

아빠가 개 사진을 찍기 위해 휴대폰 용량을 내어준 것이 신기했다.






지난 주말 아빠 생신이라 집에서 감자탕을 준비해 같이 먹고 있는데 아빠가 먹다 말고 대뜸 이런 말을 꺼냈다.

"아 이거 곰돌이 주면 환장하겄는디? 걔는 이빨도 단단해서 이런 뼈다구는 믹서기 갈듯 다 씹어브러"

그 말에 살이 붙은 등뼈 몇 개와 우리가 먹고 남은 뼈다귀를 봉지 한가득 담았다.

집에 도착했다며 전화가 온 엄마에게 아빠는 뭐하냐고 물었다.

"집에 오자마자 곰돌이 준다고 뼈다구들고 버섯 발로 뛰쳐나가드라. 다 주면 죽을 수도 있다고 살 많이 붙은 걸로 골라 주던데"

맛있는 거 먹을 때 원래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는 말이 있다.




33살에 통풍이 와서 통증이 심할 때는 걷지도 못하고 목발을 짚고 다니던 아빠가 시골에 내려가서 곰돌이를 만나고는 하루에 만보를 그냥 걷는다.

아침 7시가 되면 어김없이 아빠를 깨우는 소리에 투덜거리면서도 비가 와도 일어나 산책을 시키고, 우리 집에 와서 하룻밤을 자면서도 곰돌이 혼자 있다고 걱정 어린 말을 하며 눈뜨자마자 집에 간다고 하는 아빠를 보니 낯설었다.

사람이 달라져도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싶다.

아빠는 곰돌이 덕분에 몰라보게 건강해져 살도 빠지고 얼굴색이 달라졌다.

곰돌이는 아빠 덕분에 하루에 두세 시간을 마음껏 뛰놀고 산책하며 건강하게 크고 있다.

일요일 오전 동물농장 1000회 특집을 보며 눈물을 쏙 빼던 엄마와 나, 내 동생에게 아빠가 한 마디 했다.

"개는 개처럼 키워야지 너무 정주면 나중에 힘들어져"

아빠 자신이 지금 그렇게 지내고 있다는 진심의 말이었다.

아빠의 생신에 나는 오래오래 곰돌이랑 행복하라고 말했다.






#개사랑

#개과천선

#믹스견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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