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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후 Jan 18. 2023

이국 땅에서 만난 소설 [이국에서]

- 소설 [이국에서]를 마주하며..

   

지난해 여름 필리핀 마닐라로 유학을 온 막둥이를 핑계로, 나도 지난 11월 중순부터 필리필 살이를 하고 있는 중이다. 벌써 3개월 차로 접어들고 있다.   

  

유명 관광지나 휴양지보다는 오랜 역사나 존경받을 만한 역사 인물의 자취가 배어 있는 여행지를 좋아한다. 마닐라에 도착 후 근교의 스페인 식민지 유적지인 인트라무로스를 비롯해 약 100년 전 도산 안창호 선생도 다녀가셨다는 팍상한 폭포, 김대건 신부님 중국 유학 시절 휴양을 위해 두 번 머물렀다는 성지에도 다녀왔다.     



장거리 여행으로는 16세기 스페인 식민지 도시형태가 비교적 보존이 잘 되고 있는 필리핀 북부의 비간 역사 마을을, 경유지로 연중 기후가 서늘하여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고산 도시 바기오를 여행했다.     






낯선 도시를 대중교통으로 혼자 여행하는 것이 그때만 해도 익숙지 않았다. 해서 꼭 가고 싶었던 여행지 사가다를 놓치고 온 것이 내내 후회가 되었던 바..


새해 들어 버킷리스트를 실행코자 지난 주말 무작정 사가다행 버스 티켓을 예매했다.     

왕복하는데 꼬박 하루가 걸리는 거리인지라 2박 3일 일정을 작심하고 떠난 여행이었다.


본격적인 사가다 여행 2일 차 새벽 일정, 일출을 보기 위해 4시 반에 숙소를 나와 5시에 가이드와 일행 미팅 후 다녀온 말보로 컨트리.


고산도시 사가다 말보로 컨츄리에서 바라다 본 아침 풍경, 그리고 소나무 숲



그 장엄한 자연의 한가운데를 걸으며, 어쩜 이리도 한국의 산을 닮았을까 감탄을 하면서도 필리핀에 온 지 2개월 만에 처음으로 내가 낯선 이국 땅에서 고국의 산천을 그리워하고 있는 걸 깨달았다.     

고산 지대에 피어 있던 철쭉을 닮은 꽃, 찔레꽃, 고사리 군락지를 보면서..



이국에서 만난 반가운 찔레꽃


고사리 군락지



금강송 숲길을 연상케 하는 하산 길 풍경


끝없이 펼쳐진 소나무 숲길을 걸으면서 문득 대학 시절 흥얼거렸던 노래 한 자락을 나도 모르게 떠올렸다.     


“이국의 들가에 피어난 꽃도 

내 나라 꽃보다 곱지 못했소.

돌아보면 세상은 넓고 넓어도 

내 사는 내 나라 제일로 좋아~♪”     


흐린 날씨로 비록 떠오르는 선명한 태양을 마주하지는 못했으나

필리핀에 와서 너무나도 그리워하던 숲길을, 산길을 마음껏 걸으면서 원을 풀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품었던 의문을 인식하는 순간을 마주하고야 말았다. 

    

사가다 여행 3일 차 오후 2시 버스로 마닐라로 귀가할 예정이었으나, 운명의 장난인지 전날 내린 산간지역의 폭우로 산사태가 발생하는 바람에 도로복구가 늦어져 결국 버스 출발이 다음 날 오전으로 미루어지게 된 것.     


낯선 오지여행에서 맺어진 소중한 인연 덕분에 변화하는 상황을 실시간 접할 수 있었고, 일행들의 도움으로 저녁 식사와 숙소마저도 매우 저렴하게 해결할 수 있었던 건 정말이지 행운이었다. 안도감으로 숙소에서의 간단하게 나 홀로 맥주타임을 가진 후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고산지내대의 저녁은 매우 빨리 시작되기 때문이다.   

  

자다가 문득 오한을 느껴 억지로 몸을 일으켜 겉 옷을 모두 챙겨 입고 다시 잠을 청했다. 오리털 점퍼의 위력으로 깊은 잠을 자고 몸이 더워져 다시 잠을 깬 후, 이른 새벽 명징한 시간에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마주한 문장 하나.     


주인공 황선호의 어머니가 그에게 해준 조언이었다.    


 

“네가 원하는 일인지 생각해라. 너를 위한 일인지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다. 남을 위해 일하더라도 네가 원하는 일을 하라는 뜻이다.”     



어디에서 발견한 문장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홀린 듯이 이 문장에 꽂혀 도서를 검색하고 전자책을 구매했다. 이국에 있는 나의 조건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종일 마닐라행 버스를 타고 가면서 읽을 요량으로...     


주인공 황선호(이후 황)가 처한 상황이 낯설지 않았고, 그가 선택한 ‘보보’라는 유배지가 나 또한 익숙했다. 자전거로 세계 일주를 하며 어머니에게 여행기를 써서 편지로 보낸 남자가 황의 아버지라는 것도 일찌감치 짐작했다. 심지어 죽음 앞에 의연했던 황의 어머니도 평소 내가 죽음에 대처하리라 마음 먹고 있던 모습이었다.     

 

소설 속에 순식간에 몰입하여 13시간 여의 버스 여행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가끔 차창 밖을 보며 내가 머물렀던 고산 도시 사가다의 어디께를 가늠해 보았고, 지나치는 산과 들의 모습에서 푸근함을 느꼈다. 그리고는 또 소설 속으로 몰입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광주항쟁의 학살자의 편에 섰던 황의 아버지, 그 트라우마를 견디지 못해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세상을 두 바퀴로 떠돌아야 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뒤를 잇듯이 마법처럼 아버지가 생을 마감한 ‘보보’로 유배를 떠나게 된 황.     


“하늘이 투명하고 태양빛이 순수한 도시”     


그 도시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찾고 본인도 결국은 아버지처럼 본인의 의지대로 남을 위한 삶을 선택하게 되는 황.     


낯선 도시에서의 이방인, 외지인이라는 시선을 매일 의식해야 하는 나와 어쩌면 황이 비슷한 처지라 느껴서일지 모르겠다. 내가 이 책을 충동적으로 구입하고 또 몰입할 수 있었던 힘이.     






이제 나도 진지하게 나를 향해 질문을 던져 본다.



“네가 원하는 삶이 뭐야?
너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 말고, 


남을 위해 일하더라도 

진심으로 네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거니?”  



어쩌면 인생의 변곡점에서 마주하게 된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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