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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후 Mar 03. 2023

아직 나의 청춘은 지나가지 않았다

- 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읽고

부쩍 생각이 많아지고 우울한 요즘이다. 낮부터 읽던 책을 챙겨 오지 않아 타인의 책장을 뒤져보다 만난 신경숙 작가의 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반가웠다. 이 얼마 만에 만나는 신경숙 작가의 소설인가? 출판 연도는 벌써 한참 된 책. 따져보니 내가 처음 그녀의 소설을 만났던 90년대 초반에서 근 20년이 흐른 뒤의 소설이었다. 그 당시에도 비록 어두웠지만 몰입감이 있던 그녀의 문장들이 떠올랐다. 그때의 잔상들도 함께 떠오른 건 당연한 과정이리라.  

   

소설의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당시 읽었던 그녀의 작품들은 <풍금이 있던 자리>, <깊은 슬픔>, <외딴방>,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등으로 기억한다. 그중 <깊은 슬픔>을 읽으며 엉엉 울었던 기억의 장면도 떠오른다. 스물두어 살의 나는 왜 그렇게 울었는지, 무엇에 공감했었는지는 잘 기억할 수 없지만, 아마도 지금처럼의 막연한 무언가가 나를 울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가끔은 왜?라고 묻지 않는 것 그 자체가 고마울 때가 있다. 그는 왜 집에 빨리 가고 싶지 않았는데?라고 묻지 않았다. 그가 왜?라고 물으면 대답이 궁한 참이었다.     


주인공 윤이 사랑하는 명서를 떠올리며 설명하는 장면이다. 궁색하지만 나 또한 윤과 닮은 점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명서 같은 남자라면 실컷 사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일은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가난해지는 일일 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일은 오히려 침묵 속의 공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렵게 체득하게 된 깨달음을 작가는 깔끔한 문장으로 표현해내고 있었다. 점점 몰입감이 강해짐을 느끼며 소설 속의 윤과 명서, 단이, 미루에게 빠져들었다.     




인생은 매 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단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끝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소설 속 주인공들을 묶어 준 정신적 지주인 윤교수가 스스로 교수직을 사직하면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남긴 편지 중의 한 부분이다. 살아 있으라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이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지금 나에게 던지는 누군가의 메시지처럼 들리기도 했다. 한편 내 인생에 강한 영향력을 끼친 스승이 나에게도 가까이에 있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기도 하면서 존경스러운 스승을 둔 이 주인공들을 질투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곧 다른 모양으로 변화할 것을 예고하는 일이고, 바로 그것이 우리들의 희망이라고 했던 윤교수. 태어나서 살고 죽는 사이에 가장 찬란한 순간, 인간이거나 미미한 사물이거나 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겐 그런 순간이 있다. 우리가 청춘이라고 부르는 그런 순간이.     


결혼 후 잊고 살았던 청춘이라는 단어, 그 짜릿한 황금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는 걸 소환해 낼 수 있어서 이토록 이 책에 몰입했는지도 모르겠다. 신기하기까지도 했다. 그 시절의 감성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 아직도 내 안에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싫지 않았다.     



윤교수는 임종의 순간까지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희망의 문장을 선물로 주었다. 손가락의 힘이 빠지기 직전까지 제자들의 손바닥에 써주던 마지막 유언의 말..     


나의 크리스토프들, 함께해 주어 고마웠네. 슬퍼하지 말게.

모든 것엔 끝이 찾아오지. 젊음도 고통도 열정도 공허도 전쟁도 폭력도. 꽃이 피면 지지 않나.

 나도 발생했으니 소멸하는 것이네. 하늘을 올려다보게. 거기엔 별이 있어. 별은 우리가 바라볼 때도 잊고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을 걸세.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의 단 하나의 별빛들이 되게.     


이 말은 분명 나에게도 울림을 주었다. 아직 너의 청춘 시절의 꿈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그저 잠시 묻어 두고 숙성시키고 있었을 뿐이라고..  아직 너의 청춘은 지나가지 않았노라고, 서슬 퍼런 날을 세우며 너 자신을 단련시키던 그 시절의 인고는 헛되지 않았노라고 그렇게 위로하는 듯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고 했지.. 

지금이 그때인 것일까?

나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언젠가 우리에게 생긴 일들을 고통 없이 받아들이는 순간이 올 거라고 누군가 말해주길 간절히 바랐던 시간들.     


그럴지도 모른다. 난 누군가에게 이 같은 말을 듣기를 기다리며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이 따스한 위로의 말이 오늘 내게 문장으로 이렇게 다가온 것을 알아챘다.     


작가가 에필로그에서 제자들에게 강의하고 있는 윤이의 입을 빌어 나에게 주는 마지막 메시지도 눈부셨다. 그래, 나도 이젠 기다리지만은 않을 테다...     


매 순간 오. 늘. 을. 잊. 지. 말. 자. 고 말하고 싶은 사람을 갖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언제든 내. 가. 그. 쪽. 으.로. 갈. 게.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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