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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엠은주 Mar 10. 2023

엄마가 미안해

기도하면서 아이와 나는 다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나는 결혼하고 일 년 후에 아이를 갖자고 했다. 남편도 동의했지만 허니문 베이비로 아이가 생겼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몸살이 오는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심해지지도 않으면서 같은 증상이 2주 정도 계속되었다. 그즈음 친구를 만나서 내 상태를 말했다.


“너 임신한 거 아냐?”

“응? 설마”

“약국에 가서 임신테스트기 사서 한번 해 봐.”

“나 창피해서 못 사.”

“그게 뭐가 창피해, 내가 사줄까?”

“응”


다음 날 아침 친구가 사준 임신테스트기로 검사해 보았다. 너무나도 선명한 빨간 두 줄을 보는 순간, 기쁘기보다는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남편을 향해 원망하는 마음도 들었다. 아직 엄마가 될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반응 때문이었는지 남편도 아무 말이 없었다. 열 달, 임신 기간 내내 입덧을 했다. 더군다나 양쪽 사랑니까지 번갈아 올라오면서 통증이 심했다. 임신 중이라 치과 치료를 받을 수 없어 가글로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사랑니가 조금씩 올라올 때마다 참을 수 없는 통증 때문에 잠을 설쳤다. 설상가상으로 원래부터 약했던 허리가 임신 7개월쯤부터는 무리가 되었나 보다. 허리를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임신 기간에 입덧과 사랑니, 허리통증 때문에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다.


분만 예정일 2주일을 앞두고 병원에서는 자연분만이 어렵겠다고 했다. 굳이 자연분만하겠다고 하면 시도는 하겠으나, 하다 안 되면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남편에게 얘기했더니 고생하지 말고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자고 했다. 예상대로 아들이었다. 아들을 원했던 남편이 무척 좋아했다. 갓난아이답지 않게 얼굴이 매끈하고 예뻤다. 손가락 마디에 솜털이 보송보송 난 것이 신기했다. 이렇게 예쁘고 깨질 것 같은 갓난아이는 세상에 나온 후 사흘 만에 소아과를 다녀왔다. 그것을 시작으로 몸이 약한 아들은 한 달에 이십일 이상 병원에 다녔다. 아침 일찍 아들을 업고 집을 나서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병원에 출근 도장 찍으러 가냐고 할 정도였다.


아들의 병치레가 잦으니 나는 육체적으로 너무나 고단했다. 거기다 남편과의 불화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서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큰 짐처럼 느껴졌다.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온다. 아들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부모 될 자격이 없었던 우리 부부는 아들 마음을 살피기보다는 각자 자신을 내세우며 싸우기 바빴다. 우리의 갈등이 깊어질수록 아이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아들이 어떤 영향을 받을지는 안중에 없었다. 어릴 적 내 부모님에게 받은 상처를 아들에게는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더 못난 엄마가 되었다.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아들은 안드로메다에서 온 것 같았다. 아들이 하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 하는 것이 보기 싫어서 잔소리하면 TV를 봤다. TV 보는 것을 야단치면 마지못해 책상 앞에 앉았다. 나는 그게 또 불만이었다. “책상 앞에 앉았으면 공부 좀 해라.” 잔소리는 끝없이 이어졌다. 어느 날 아들이 말했다. “엄마 나는 형제가 없잖아. 게임 안 하고 텔레비전 안 보면 혼자 뭐해? 누구랑 놀아?” 아차 싶었다. 그러나 미안한 마음도 잠시뿐이고 다시 잔소리로 이어졌다. 미성숙했던 당시를 생각하면 미안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네 살 무렵부터 친정에 들어와 살게 되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친정아버지는 첫 손주여서 그런지 무한 사랑을 베풀었다. 무뚝뚝하기 그지없던 분이 직접 외손자의 옷과 장난감을 사다 주셨다. 필요하다 싶으면 조르기 전에 이미 내 아들 손에 들려있었다. 내 여동생이 “00이는 할아버지의 영원한 왕자야.”라고 말할 정도였다.


나는 아들이 내 말을 안 듣는 것이 아버지의 무조건적 사랑 때문이라며 원망했다. 그러나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아들아, 엄마 아빠도 주지 못한 사랑을 주시던 할아버지가 이제 안 계시는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편을 들어주던 한 사람이 없어졌네.’ 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할아버지의 무한 사랑이 없었더라면 아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하기도 싫다.


아들이 세상에 나가서 사람 구실이나 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남자아이들의 사춘기 특성을 몰라 잔소리와 체벌이 끊이지 않았다. 아들의 훈육으로 시작한 잔소리는, 점점 내 화풀이로 바뀌었다. 그러면 한두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그래도 아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다 듣고 있었다. “다음부터 잘하고, 일어나 씻고 자라.”라는 말이 있을 때까지 끝까지 들어주었다. 대들지 않아서 고마웠다. 내 아들을 부족하다고만 여기고 있을 무렵, 속회예배를 드리며 아들에 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다른 집도 사춘기 아이들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 아들만 안드로메다를 다녀온 것이 아니었다.


소아정신과 의사 ‘김영화’는 저서 『사춘기 뇌가 위험하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춘기는 뇌가 발달하는 시기다. 그중에서 가장 활발하게 발달하는 부위는 뇌의 가장 앞에 있는 전두엽이다. 전두엽은 충동을 억제하고 참을성을 키우며 곧장 후회하게 될 행동을 하지 않도록 브레이크 거는 역할을 한다. (중략) 한편 전두엽은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 바로 부적절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이다. 1949년 포르투갈의 의사 에가스 모니스는 전두엽 절제 수술을 통해 전두엽이 충동적인 행동을 조절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노벨 의학상을 받은 바 있다. 모니스는 당시 어떤 치료로도 고칠 수 없었던 데다 난폭한 행동을 보이는 환자들을 뇌수술로 치료했다. 하지만 현재에는 뇌 과학과 약학이 발달하면서 매우 위험하고 힘든 수술로 알려진 전두엽 절제 수술은 하지 않는다.”


사춘기 아이들을 보면서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할 때가 많이 있는데, 전두엽이 덜 발달하여 사실적으로 아이들은 생각이 없다고 한다. 사춘기 때는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내다가도 그 시기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짱해지는 게 다 전두엽 때문이다. 내 아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사춘기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는 누구나 겪는 일이다. 당시에는 이런 과학적 상식이 없었기에 ‘쟤 왜 저러지?’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었다.


새벽예배 나가서 기도하면서 이 아이와 나는 다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내 가치관과 맞지 않는 것을, 아이가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잘못된 나의 고정관념이었다. 술, 담배 안 하고 불량학생과 어울려 다니지 않았고, 학교 마치면 집으로 바로 오는 착한 아이였다. 아들의 좋은 점은 당연하게 여기고 부족한 부분만 보고 잘못된 것으로 여겼다.


아들 때문에 내가 진흙탕에서 뒹구는 것 같았다. 아들만 없으면 날아다닐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들 때문에 어렵고 힘든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다. 못된 유혹이 손짓할 때마다 ‘아이에게 할 말 없는 엄마는 되지 말아야지.’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들은,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의 원동력이었다.


내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였다. 내 눈에 부족해 보이는 아들도 하나님에게는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이다. 내가 가장 잘 보살펴 줄 것 같아서 내게 보낸 아들을 천덕꾸러기로 만들었다. 정말 착해서 마마보이처럼 내 말을 잘 들었다면 아이가 행복했을까? 사십 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어떻게 십 대를 보낼 수 있겠는가? 세대 차이가 나는 건 당연했다. 돌이켜보니 아이는 옳았고 나는 틀렸다.


지금 아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가고 있다. 긴 침묵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언젠가 하나님이 이 아이를 사용하시는 그날에 그를 빛나게 해줄 거라고 믿는다. 이제 조급한 마음 내려놓고 나는 아들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 있었던 고통의 시간이 당시에는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 모든 시간이 현재와 연결되어 있다. 그때의 모습으로 인해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이지만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준 유익한 시기였다.


“아들, 많이 사랑하고 많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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