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에게 쓰는 반성문
친할머니가 약 3개월 전 88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나는 할머니와 별로 친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태백에 홀로 사셨기 때문에 용인에 사는 우리 가족과 왕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절이나 특수한 경우만 찾아뵀을 뿐. 아빠는 심지어 젊은 시절 자신의 어머니를 싫어했다고 한다. 무뚝뚝하셨고 돈이 필요한 경우에만 자식들에게 연락을 했다고. 게다가 대쪽 같은 성정에 자식들은 혀를 내둘렀다. 꼬꼬마 시절의 어린 나도 할머니가 좀 무서웠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어딘가 모르게 삶의 지혜를 통찰한 분으로 보였다. 아니, 해탈을 했다고 해야 할까. 할머니는 자식들 7남매 중 4명을 하늘나라로 보냈다. 하지만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 그 누구에게도 심적으로 기댄 적이 없으셨다. 모진 세월, 풍파를 너무 많이 맞았던 탓인지 자식을 네 번씩이나 여의었어도 꿋꿋이 살아가신 분이다.
그런 할머니도 나이에 장사 없었다. 운동하는 것도 귀찮아하셔서 더 건강이 좋지 않았고, 그런 상태로 나이만 점점 드셨다. 몸이 좋지 않으셔서 한동안은 태백에서 용인으로 올라와 우리 집에 같이 지내시기도 했다. 당시 나는 취준생이었는데 할머니와 같이 사는 게 불편하고 싫었다. 하릴없이 거실에 앉아 가족들이 무언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는 할머니를 싫어했다. 또 엄마가 일하면서 시어머니 수발을 들어야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같은 연배이신 나의 외할머니와 비교도 했다. 외할머니는 운동으로 건강 관리를 하셔서 정정하신 편인데 할머니는 운동도 안 하고 노력도 안 해서 자식들을 힘들게 한다고 마음속으로 미워했다. '저렇게 나이 먹고 싶지 않다. 운동을 하든 뭐든 노력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나이만 먹었지 노력을 하지 않네.' 그런 생각들을 하며 할머니와 더 거리감을 두던 어느 날 할머니는 요양원에 들어가시게 됐다.
요양원에 들어가시고 난 후 할머니를 만나 뵐 일이 극히 줄게 됐다. 명절에 못 뵙게 된 건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오래되었고, 코로나 시기와 맞물리며 할머니는 더욱 고독한 요양원 생활을 시작하셨던 걸로 안다. 나는 가끔 엄마, 아빠로부터 할머니 소식을 들으며 지내는 게 전부였다. 몸과 마음이 할머니로부터 많이 멀어졌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할머니를 더 이상 미워하지도 않았고 설령 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되더라도 크게 슬프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갑작스레 할머니는 떠나셨다. 돌아가시기 직전 우연히 나는 할머니 곁에 가장 먼저 도착을 했다. 생사를 헤매는 할머니에게 말했다. "저 왔어요." 그 목소리가 할머니에게 닿았을 때는 잠시나마 호흡이 돌아오셨다. 의사가 말했다. "가족분이 오시니 호흡이 돌아오네요. 그런데 혈압이 너무 낮아요. 죄송하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 바로 할머니는 떠났다. 할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은 상상하던 것보다 괴로웠다.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허무함과 절망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나이는 노력으로 먹는 게 아니잖아.' 나는 이 문장을 굳게 믿으면서 살았다. 나이는 누구나 저절로 먹는 것이라고. 나이만 많고 노력 없이 그저 세월이 가길 바라며 죽는 날만 기다리며 사는 분을 한심하게 여겼다. 그게 우리 할머니라고 생각했고. 하지만 할머니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나니 내 생각이 크게 잘못됐단 걸 알았다. 나이는 세월로 먹는 것이고 그 안에는 노력도 있었다. 할머니는 살아있는 한 최대한으로 사셨다. 사막의 모래를 퍼먹으며 사는 삶이었던 할머니, 나라면 그런 메마른 삶을 누구에게도 불평불만 없이 홀로 감내할 수 있었을까? 나라면 할머니가 겪었던 고통의 10분의 1이라도 버티지 못했을 것 같다. 몸이 편찮으실 때 '왜 운동을 안 하실까, 노력을 안 하실까.' 했던 생각은 전혀 할머니의 삶을 살아보지 못한 나의 오만과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제야 생각해 본다. 2명의 남편과 4명의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시대도 보내온 할머니는 가난과 불건강함이 크게 불편하게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친숙하지 않았을까?
진한 파란색의 바다와 같던 할머니의 인생은 88년이 지나 끝이 났다. 아직은 무슨 색일지도 모를 33년 인생의 손녀는 창피해진다. 감히 나이를 논했던, 진짜 우울한 삶이 뭔지도 모르고 핑계만 가득했던 나. 진심으로 사죄하고 싶다. 이제는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 FINE -
그럼에도 언젠가
날 용서해주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