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즘과 자아도취
소포모어 징크스의 스팩트럼은 무척 넓어서, 대개 2년 차란 우악스러운 경험을 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 법이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욕설이 섞인 랩 음악을 들었다는 이유로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한 적이 있으며,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모의고사에서 언어 영역을 풀다 슬픈 소설의 지문을 읽고 펑펑 울었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계획대로, 찾아온 것이다, 20대의 첫 소포모어 징크스는.
대학교 2학년이 되자, 나는 머리카락을 기르기 시작했다. 기르고 또 길러서 어느덧 뒷머리가 뒷목을 덮게 되었고, 앞머리는 속눈썹과 부딪히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히피의 전성기 시절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열성적인 관람객임을 표방하며, 잠실에서 열렸던 록 페스티벌에서 약지와 중지 손가락을 접은 채 손을 들고 나는 이 곳에 내가 살아 있음을 나 스스로 증명하고자 하였다. 액세서리 가게에서 담백한 디자인의 철제 머리띠를 구매하였고, 처음으로 머리띠를 차고 간 다음 날 학교에서 후배들에게 "형 머리 좀 제발 잘라요."라는 지독한 핀잔을 듣기도 했다.
머리를 기르게 된 동기는 나보다 먼저 머리를 기르고 다녔던 동네 친구의 그럴싸한 개똥철학에 넘어간 나의 팔랑귀 때문이었다. 장발이 주는 자아존중감은 남자는 머리가 짧아야 한다는 사회의 고정관념을 깨뜨림에서 찾아오는 자기애가 그 이유였다. 그 혓바닥에 넘어간 나는 그 이후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탈이 나를 바꾸어 줄 것이라 굳게 믿었던 터이다.
신기하게도 당시의 나는 정말 나를 사랑했던 것 같다. 그 시절만큼이나 셀피를 많이 찍었던 적도 없었을 것이며, 열정을 불태우며,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판단들로 일상을 채워나갔다. 하교 후 교내에서 돗자리를 펴고 눌러앉아 비슷한 코드를 가진 친구들과 함께 막걸리와 짜장면을 시켜먹었다. 숙취로 찌든 간과 함께 제출한 기말고사 답안지에는 전날 들이부었던 알코올의 향기가 남아 있었다. 얼마 후 쌍권총으로 중무장한 학점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감각이 없었던 나는 그날 저녁에도 여기저기를 싸돌아다니며, 장발 선구자였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머리 기르는 효과가 진짜 있는 것 같아.", 뒤이어 들리는 경쾌한 답변, "그렇지? 내 말이 맞다니까!"
그러나 장발의 마법은 어느새 머리가 쇄골에 닿을 때 즈음 풀리기 시작했다. 나의 현실감각은 맨홀 뚜껑 저 아래에 처박혀있었으며, 수업을 빠지고 자전거를 타며 느꼈던 가을 하늘 아래 자유로웠던 바람은, 사실 무책임한 방종이었던 것이다. 50여 년 전 미국 서부에서 유행처럼 퍼졌던 히피 문화는 21세기의 대한민국과는 그 어떠한 연관성도 없었다. 히피라는 키워드는 정신 나간 방종을 포장하기 위한 스스로의 방어 수단이었고, 장발이라는 속성은 자기애를 빙자한 자아도취에 빠진 어른판 중2병 콘셉트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저 한 과에 어디 가나 한두 명 정도 있는 술 좋아하는 멍청한 친구들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가며 책 펼치려 하지 않았던 학생이었음을 가을 낙엽이 다 지고서야 뒤늦게 간신히 깨달았다.
늦가을 저녁, 집 앞 미용실에서 머리를 잘랐다. 낙엽마냥 바닥으로 뭉텅뭉텅 떨어지는 머리카락들을 바라보았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12와 6을 가리키는 시계처럼 현실과 이상을 동일시 못했던 나는, 시간이 흘러 분침과 시침이 비슷한 방향을 가리키는 삶을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되었다. 어른이 돼야 하는 어린 어른들은 그렇게 각자의 소중한 삶 가운데서 소포모어 징크스를 마주하는 것이다. 사진첩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치지도 못하는 기타를 연주하는 시늉을 하며 반쯤 풀린 눈으로 웃고 있는 내 사진을 미워할 수는 없다. 나는 영원히 그때의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