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집은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가난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중산층에 속하는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맞벌이를 하셨고, 저녁에 집으로 들어오시면 어린 나를 앞에 두고 항상 돈 때문에 언성이 높아지는 일이 잦았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아, 우리 집은 돈이 많지 않구나...'라고 생각했다. (참고로 우리 아버지는 화물차 운송, 어머니는 마트에서 일을 하셨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내가 어릴 적 유행했던 킥보드, 바퀴 달린 신발, 자전거, 게임기 등 어릴 때는 뭐가 그렇게도 많이 유행을 했던지... 물론, 이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었지만, 부모님은 내가 친구들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많은 걸 사주셨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기 때문에, 항상 집에 혼자 있는 나에게 친구들과 놀 수 있도록 그런 것들을 사주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하셨다)
또, 중학교를 들어갈 때쯤부터는 왜 그렇게 학원이 다니고 싶었는지, 동네에서 가장 유명한 종합반 학원에 보내달라고 했었다. (친구들이 거기에 많이 다녔었다) 덕분에 성적은 좋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 그 학원의 학원비는 정말 비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내가 몇 년간 그 학원을 다니도록 해주셨다.
중학교 3학년. 나는 어릴 때부터 요리에 관심이 많았다. 음식을 잘하는 우리 엄마의 영향도 컸지만, 항상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 때문에 혼자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특히 방학에) 그래서 나는 요리라는 걸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다. 찾아보니 국내에 조리고등학교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고자 했던 그 학교는 등록금이 비쌌다.
부모님, 특히 아버지의 반대가 심하였다. 비싼 등록금도 문제였지만, 남자가 무슨 요리냐며 반대가 심하셨다. 하지만, 부모는 자식을 이기지 못했다. 결국, 나는 그 학교에 들어갔고, 하필이면 그때 집안 경제사정이 가장 안 좋아졌다. 우리 가족은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갔고, 나는 작아진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대학교. 이제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나는 시간만 나면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동안 나는 갖고 싶은 걸 많이 가졌었지만, 나는 욕심이 많았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용돈을 받긴 했지만 넉넉하지 않았고, 이것저것 사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더 많아졌다.
그래서 식당, 당구장, 마트, 술집, 놀이공원, 공사판, 푸드코트, 어린이집 무대 설치, 뷔페, 가전제품 판매, 강연 보조 등 돈을 벌기 위해 내 몸을 아끼지 않았다. 정말 돈이 필요할 때는 주말에 풀타임 아르바이트 4개를 하기 위해 3시간만 자고 일을 나가기도 했다. 대학시절 가장 부러웠던 친구들은 맘 편하게 술을 마시며 노는 친구들이었다. 물론 나도 용돈을 받았지만, 넉넉한 친구들이 노는 술자리는 부담이 됐다.
내가 군대를 다녀오면서 우리 집은 숨통이 조금 트였다. 2년간 나에게 들어갈 돈이 없으니 여유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자취를 시작하게 되면서, 돈이 더 필요했다. 게다가, 그 당시 여자 친구가 생겼던 나는 넉넉하진 않더라도 남들 하는 건 다 해보고 싶었다. 돈은 항상 부족했다. 옷을 좋아하던 나는 그때부터 옷 사는 걸 포기했다. 학교에서 학생회장을 해보고 싶어 학생회장이 되었다. 남들은 학생회장하면서 돈이 생긴다던데, 나는 돈을 더 썼다.
대학교 3학년. 그동안 외국에 한 번도 나가보지 못했던 나는 워킹홀리데이를 가보고 싶었다. 이번엔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휴학을 하고 본격적으로 돈을 모았다. 기본적인 영어도 못했기 때문에 어학원에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학원은 비쌌고, 나 혼자 그만큼의 금액을 모으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영어를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그렇게 캐나다로 가서 나름 성공적인 워홀을 마쳤다. 그곳에서 생애 처음으로 가장 큰돈을 벌었다. 배낭여행을 하고 싶었다. 5개월간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한국에 돌아와 마지막 4학년을 다녔다. 배낭여행을 하느라 돈이 한 푼도 없었던 나는 또다시 용돈을 받았다. 27살에 용돈을 받고 있으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부모님께 도움이 되고자 장학금을 받기 위해 처음으로 공부에 매진해보았다. 운이 좋게도 두 학기 모두 장학금을 받았다. 그리고 방학에는 또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에게 방학은 언제나 돈을 버는 시간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또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다. 국내배낭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부모님 친구분들의 아들, 딸은 대부분 취업을 해서 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부모님은 내편을 들어주셨다. 여행을 마치고 나니, 진정한 독립이 필요했다. 집을 나와 지방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지방에 있는 회사에 들어가 돈을 벌기 시작했다.
나의 진정한 독립적 삶은 29살이 되어서야 시작된 것이다. 이제 진짜 모든 걸 내가 해결해야 했다. 화장실의 비누부터 원룸의 관리비까지 모든 걸 내가 내야 했다. 정말 '기본적인 생활비가 많이 드는구나'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전에도 자취도 해보고 외국에서 혼자 살아 봤지만, 그동안 나는 부모님 그늘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나 혼자 사회에 나와 돈을 벌면서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무조건 가성비 제품을 찾으며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더 노력했다. 치킨이 아무리 먹고 싶어도 참았다. 허리띠를 졸라매 생활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진정으로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부모님 생각이 났다. 우리 부모님은 어떠셨을까?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며 벌었던 금액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 당시 부모님의 소득을 떠올려 생활비를 계산해보니 말이 안 됐다. 그 돈으로 우리 가족의 생활비며 나의 학원비, 내가 갖고 싶은 물건들을 사주셨다. 부모님의 물건은 없었다. 나는 왜 그동안 우리 가족이 여행을 못 갔고, 왜 외식을 자주 못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동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거의 다 했다. 나는 그게 가능했던 것이 내가 열심히 살아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모든 건 부모님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부모님이 내주신 학원비며 고등학교, 대학교 등록금 덕분에 나는 빚에 대한 걱정이 없었고, 그 큰돈을 벌기 위해 우리 부모님은 당신의 시간을 포기하셨다. 그동안 철없던 나의 행동들 때문에 부모님은 더 나이 들어갔고, 더 힘들어졌다.
과거의 내가 부끄러워졌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도대체 자식이 뭐라고 당신들의 인생을 포기하면서 나를 키우셨을까. 나는 그동안 잘 사는 주변 친구들과 나를 비교하며, 나는 흙수저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나의 철없는 생각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금수저를 가지지 못한 것이 당신들의 탓이라 생각하고, 나를 위해 금수저를 만들고 계셨다. 그리고 당신들의 수저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