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춘천마라톤 후기
월간 마닐씨.
나의 달리기 패턴을 말하라면 바로 '월간'이다. 런데이 어플을 켜서 확인해보니 꾸준히 뛰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워낙 바쁜 시기이기도 하지만, 자전거를 사고 매일 등하교를 자전거로 하니 달리러 다시 나가기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그러다보니 달리고 싶을 때 달린다는 게, 그게 딱 한 달에 한 번이 되었을 뿐이다.
게으른 러너다. 유튜브로 달리기 선생님들께 운동화 끈 묶는 방법, 다리를 차는 방법, 팔을 흔드는 방법, 숨 쉬는 방법을 배우고, 열심히 머리로 연습하는 것이다. 매일 자전거를 타고 산에 있는 학교를 오르니 심폐지구력은 향상되고 있다는 것을 위안 삼으며. 그런데 정말 자전거 덕분인지, 아니면 마인드 트레이닝 덕분인지 매번 달리기를 하러 나갈 때마다 페이스가 좋아지긴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라톤에 나간 건 2013년에 있었던 나이키 쉬런 서울(Nike She Runs Seoul 7k)이었다. 대학 때 나간 거였고 워낙 오래 전이라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던 기억이다. 2020년에 허리를 다친 이후로 거의 못 뛰다가, 올 여름부터 다닌 한의원에서 진료를 받은 이후에 허리가 제법 나아져서 다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10km 거리를 달리는 건 난생 처음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씩 5~6km 정도 거리를 달리는 게 별로 어렵지 않았기에, 안 되면 뛰다가 걷자는 마음으로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새벽 다섯 시에 동네 언니를 태우고 춘천으로 출발했다. 풀코스는 9시, 10km는 10시에 시작이라기에 여유를 부리고 있었는데, 찾아보니 춘천까지는 2시간 넘게 걸린단다. 게다가 8시부터 도로 통제가 이루어진다고 하니 최소 5시에는 출발해야 별일없이 도착하겠다는 계산이 섰다. 동도 트기 전, 안개낀 도로를 따라 달리니 어느새 춘천에 도착해 있었다. 7시쯤 베어스호텔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잠깐 눈을 붙였다. 차창 밖으로 와글와글한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서 보니 8시였다. 집에서 싸온 호밀빵과 찐계란을 먹으며 옷을 갈아입고 테이핑을 하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대회장까지는 또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길에는 체온유지를 위해 세탁소 비닐과 비닐 우비를 쓴 사람들이 가득이다. 나도 바람막이와 장갑 따위를 챙겨왔지만 10km 마라톤 경험이 있는 언니가 다 차에 두고 가자고 했다. 짐을 맡기는 것도 일이고, 나중에 찾는 것도 정신이 없단다. 그래서 한손에 핸드폰만 들고 찬 바람에 오들오들 떨면서(언니에게 춥다고 투덜거리고, 언니는 왜 이리 손이 차냐며 안타까워하다가) 대회장에 도착했다.
거대한 축제 분위기다. 사람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풀코스가 벌써 출발하며 사방에 응원단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회자가 출발선 앞 단상에 서서 가장 멀리서 온 사람을 묻고, 한 명 한 명 이름을 호명해가며 앞서 간 주자들이 거리를 벌릴 시간을 벌고 있었다.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은 응원단도 있었다. 신나는 음악에 몸이 벌써 들썩들썩했다. 기록미보유자라고 쓰인 풀코스 F조가 지나가고 나자 10km 참가자들도 줄을 서기 시작했다. 다행히 우리 둘 다 같은 조에 배정되어 함께 출발할 수 있었다.
B조에 줄을 서러 들어가는데 유튜브에서 많이 보던 얼굴들이 있었다. 하말넘많의 서솔 님과 김은하와 허휘수의 휘수 님, 그리고 소그노의 멤버였고 지금은 과묵한 권운씨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현지 님이었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자 휘수 님이 흔쾌히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해주셨다. 내적 친밀감이 폭발한 팬을 따뜻하게 맞이해준 세 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같이 셀카를 남기고 조금 더 뒤에 줄로 자리를 옮겼다. 페이스가 좋으면 줄 앞에 서는 게 좋지만, 줄 앞에서는 그만큼 기록을 남기기 위해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대서 안전하게 뒷쪽에 서기로 한 것이다. 한산했던 우리 주변도 사람들로 꽉 찰 때 쯤, 줄이라고 부르기엔 이제 거대한 군중이 된 무리가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A조가 출발한 것이다. 출발선 앞으로 오니 저 멀리 작게 보이는 응원단이 음악에 맞춰 동작을 하는 게 보인다. 춤인지 준비운동인지 모를 율동을 어설프지만 흥겹게 따라했다.
드디어 출발. 처음에는 걷다가 출발선이 지나고나서 뛰기 시작했다. 언니와는 페이스 차이가 있어서 출발선을 넘으며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거대한 군중과 함께 달리니 신이 나서 시작부터 오버페이스했다. 보통 7분 정도인데, 이날은 6분 초반대였다. 그렇지만 앞에 선 사람을 하나 둘 제치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4km 지점까지는 "아 마라톤 너무 좋네! 왜 진작 이런 걸 안했지!"하고 생각했다.
5km 반환점을 돌면서부터 신난다는 생각보다 힘들다는 생각이 커지기 시작했다. 초반에 5km를 넘으면 사람들 다 걷는다는 얘기가 옆에서 들렸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는지 주변에서 하나 둘 걷는 사람이 보였다. 그래도 힘이 닿는 데까지는 뛰고 싶어 열심히 달렸다. 6km가 지나자 내가 추월하는 사람보다 나를 추월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8km가 지나자 대부분의 사람이 나를 추월해 달리고 있었다. 마지막 1.5km는 달려도 달려도 줄어들지 않는 마법 같은 구간이었다. '내 페이스를 지키자'하며 어떻게든 걷고 싶어하는 다리를 끌면서 뛰었다.
재밌는 점은, 나를 추월해 달리는 사람들이 초반에도 보였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분명 내가 추월했거나, 나를 추월해 달린 사람들. 내가 계속해서 뛰는 동안에 걷다가 다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을 수도 있고, 혹은 내 시야에 닿지 않는 곳에서 비슷한 페이스로 달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추월해서 달린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레이스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내게는 나를 추월하는 사람들만 보였을 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사는 것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생각이 많은 것은, 사실 이어폰마저 안 챙겨서 생각과 구경과 달리기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달리면서 생각을 많이 했다. 사는 것도 달리기와 비슷하구나. 다른 사람들이 다 나를 추월해서 저 멀리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도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쉬고 있었을 수도 있고, 나보다 빨리 달리는 것만 보이지만 다들 그들만의 페이스로 달리기를 하는 것이다. 결승선이 정해져있는 마라톤이야 순위와 페이스와 기록이 나오지만, 인생이야 결승선을 그어놓지 않는다면 기록이라는 건 나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양심과 기분이 전부다. 그러니까 나는 이번 마라톤에서 1시간 6분에 거쳐 10km를 달렸지만, 사실 기록보다는 한 번도 걷지 않고 10km 구간을 전부 달리며 완주했다는 것, 다치지 않고 무사히 골인지점에 들어왔다는 것이 더 뿌듯했다. 걸으면 어떻고 중간에 쉬면 또 어떠랴. 그저 최선을 다해 들어왔고 마음에 아쉬움이 없다면 성공이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10km의 결승선이 보였다. 바닥에 그어진 검은 색 선을 넘으며 삐빅 소리가 쉴새없이 울렸다. 한 시간 내내 달리던 몸의 속도를 한껏 낮췄다. 지친 성동일 아저씨처럼 걸어 페트병에 든 물을 받아 보도블럭 턱에 걸터앉아서 한번에 다 마셨다.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결승선 라인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언니가 들어오려면 좀 더 기다려야할 것 같아, 행사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행사장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인파의 흐름을 따라 함께 흘렀다. 줄을 서서 바나나와 빵과 시리얼바와 주스와 메달을 받고 인조잔디밭에 앉아 하나하나 까먹었다. 다 먹고 나니 다시 머리가 반짝해지는 기분이다. 언니도 결승선을 통과했다는 문자가 왔다.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다시 30분을 걸어 주차장으로 갔다. 집까지 찍어보니 올 땐 2시간 걸렸던 길이 3시간으로 늘어나 있었다.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하자. 닭갈비의 도시에 왔으면 닭갈비를 먹어야 된다. 미리 식당에 전화해 주문해놓은 뒤 허기진 배를 붙잡고 달렸다. 허기가 사리를 불렀다. 우동 사리 치즈 사리에 막국수까지 주문해놓고 결국 음식에 점령당한 상태로 퇴장했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맛집은 믿지 말라는 말이 있던데, 러너의 맛집도 신뢰성이 떨어지긴 마찬가지일 것 같다. 10km를 달린 후에 먹는 닭갈비는 너무 맛있었다.
도무지 3시간을 다시 운전할 용기가 생기지 않아 사우나에 가서 잠시 쉬기로 했다. 춘천터미널 근처 사우나에는 벌써 도착한 러너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줄을 서서 열쇠를 받아 탕으로 들어갔다. 푸근한 동네 할머니들과 빼빼 마른 러너들이 한데 섞여 피로를 풀고 있었다. 비누로 찌든 몸을 빡빡 씻어내고 온탕, 냉탕, 사우나를 오가니 한껏 긴장됐던 근육도 풀어지는 느낌이다. 목욕을 마치고 언니 손에 바나나 우유를 쥐어주고 쌍화탕을 받아들고 "또 오세요~"하는 인사를 들으며 나왔다.
도로 위에도 마라토너들이 가득하다. 하늘은 맑고, 잠은 쏟아진다. 도착 시간은 계속 길어지고 소요시간은 줄어들 기미가 없다. 세 시간은 무슨. 네 시간 안에 가면 다행이겠다. 천천히 달리다가 갓길이 보여 잠시 차를 대고 눈을 붙였다. 15분 정도 자고 일어나니 그래도 살 것 같다. 거기서 자길 다행이지. 그 다음부터 보이는 갓길이며 졸음쉼터며 사람이 빼곡하다. 우리는 왜 한 시간을 달리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와서 또 다시 한참을 달려 돌아가는가. 그래도 꽉 막힌 도로를 운전한 기억보다는 가을이 다가오는 산을 바라보며 가슴이 뻥 뚫리도록 달린 경험이 훨씬 오래 남으니까. 언니랑 내년엔 하프, 내후년엔 풀코스 뛰자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은 없는 약속을 했다.
10km든 풀코스든,
내년에도 또 올게요. 춘천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