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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의 Apr 26. 2024

8. 필담으로 소통하기

  18세기 국제어는 한자였다.  한자는 오늘날의 영어처럼 의사소통 가능하게 했다. 중국어 한마디를 못하는 암도 한문을 가지고서라면  얼마든지 중국사람과 소통을 했다. 대체로 집주인은 손님을 대접하느라 음식 마련 분주하여 대화에 못 낀다. 그런데  필담 소통에서는 일단 음식 차리면 필담 종이를 쓱 스캔하여 대화를 따라잡더라는 것이다. 다 큰 어른이, 친구의 공책을 베껴서 빠진 수업을 보충하는 학생처럼 진지하게 학습(?)한다. 필담의 장점이다. 그 진지한 자세를 보니  청 나라의 전성기 그냥 된 게 아니겠구나 미루어 짐작이 된다.      


  연암은 밤중에 몰래 빠져나가 젊은 중국인들과 어울렸다. 제갈공명의 <후출사표>를 골라 낭송도 하고 글씨를 요청받아, 글씨도 써준다. 짙은 먹물을 부드러운 붓에 찍어 쓰니 자획이 썩 아름답게 되어 스스로도 잘 썼다고 여긴다. 여럿이 감탄하고 칭찬을 하니 술 한 잔에 글씨 한 장을 쓴다. 붓 돌아가는 모양이 마음대로 종횡무진 누빈다,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자유로운 장사치의 길로 접어든 들과학문의 높낮이를 견줄 일은 아니다. 그저 흥겨운 나머지 글씨를 남발하는 연암의 모습은 뛰어난 선비가 아닌 귀여운 개구쟁이에 다름 아니다. 나도 나중에 해외에 가면, 누구에게든 한글 글자를 마구 써줘야겠다. 나이 칠십이 넘어도 귀여워질 수는 있는 법이다.                                


  이 모임에서 연암이 마음에 쏙 든 나머지,  중국인들 골동품 위조법까지 상세히 알려준다. 끝없이 이어지는 페이지를 넘기며  나는 글을 읽고있는 게 아니라 그 글을 과연 어떻게 썼을까를 배우고 있었다. 어떻게 이걸 일일이 기억했을까. 암기식 교육이 몸에 밴 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수첩에 꼼꼼하게 요점 정리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연암 말 안장에 주머니 두 개 드리웠는데 왼쪽 주머니에 벼루, 오른쪽 주머니에 붓 두 자루와 먹 하나, 작은 공책 4권과 두루마리를 담았다. 작가의 문방사우ㅡ여행 소지품이다. 나는 필통과 열하일기 필사용 빨간 다이어리와 소감 기록용 컴퓨터를 사용한다. 연암의 족적을 진지하게 따라가기 위해 다른 책은 되도록 안 읽는다. 또 연암의 필담 방법도 궁금하기 짝이 없다. 종이 한 장에 주고 받았는지 아니면 내 말은 내 종이에, 상대의 말은 상대의 종이에 썼는지 여러가지가 궁금하다.      


  나도 필담을 한 적이 있다. 요르단에서 한 젊은 아가씨를 만나 필담을 했다. 요르단 영어에도 요르단 사람 특유의 특징이 있어 내가 콩글리시를 하듯 그녀도 용글리시를 한다. 예를 들면 요르단에서는 p를 b로 발음한다. 여러 번 묻고 대답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녀가 자기의 핸드폰에 영어로 질문을 써서 보여준다. 나는 내 핸드폰으로 대답을 써서 보여주었다. 하지만 오늘날 정작 그렇게 공들여 주고받은 대화의 내용은 기억에 없다. 그 아가씨는 자기가 영어 문장을 쓴 데 감격했을 터이고 나는 난생처음 필담을 주고받은 데에 감격했다. 필담을 해봤다는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다.      


  나도 연암처럼 기록을 생활화했어야 한다. '적자생존'이다. 적는 자는 살아남는다. 비록 가는 데마다 뭔가 메모하느라 맨 마지막에 허둥거리며 따라오는 진상 동행이었겠지만, 연암은 곳곳마다 즐겨 썼다. 그가 북경에 되돌아왔을 때 열하에 다녀온, 이상할 정도로 두툼해져 있는 그의 보퉁이가 모든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사실은 붓과 벼루, 필담의 초고와 일기만 있었다. 그걸 알고 다들 실망한다. 대단한 보물이라도 되는 줄 알았던 게다. 하지만 그 보따리야말로 그가 중국에 온 목적이니, 강을 건너거나 눈비가 내릴 때도 흠뻑 젖지 않도록 목숨처럼 소중하게 지켰을 진짜 보물, 맞다.      


  말 안장 위에서 무려 수십만 마디의 말이 가슴속에 문자로 쓰지 못하는 글자를 쓰고 허공에 소리 없는 문장을 써서 매일 여러 권이나 되던 연암을 만난다. 어쩌면 냉난방이 다 되는 실내에서 얼마든지 컴퓨터로 지우기와 고쳐쓰기를 하면서도, 글쓰기가 되네 안 되네 유난을 떠는 내 모습을 본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는 억지로라도 부끄러워해야 한다. 글을 못 쓸 이유란 없다. 안 쓰고 싶다는 오직 하나의 이유를 제외하고는. 그러고도 내 글들을 삶의 비바람이 손대지 못하도록 아주 잘 관리하기로 마음먹는다. 『열하일기』처럼 불후의 명저로 자리매김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평생 써온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난 글인 오늘어치의 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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