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쓸 수 있는 것들로부터 구분해내기 위해서이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던 이유는 막연히
죽고 싶음을 표현해내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십 오세 언저리였지 싶다.
어떤 식으로 처음을 서술하든
지금 어떤 일련의 현상을 서술할 정도의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상태에 있음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도록 했다.
내가 먹여 살리는 이 개체는
철저히 이 개체가 어느 날
처음으로 어떤 습관을 들인 날을 닻으로 삼아
돌고 돌고 도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현상을 이 정도의 확신으로
서술할 역량이 되려면
삼십 년 이상은 그 패턴을
질리도록 반복했어야 했고,
죽고 싶다고 적을 정도가 되는 바람에
어느 정도 숨 쉬고 살았던 이유로
삼십 년을 살아낸 지금
나는 인생이 지나치게 단순해서
적잖이 놀라고는 한다.
그래서
평일에 들인 습관대로
복잡하게 해석하려 해도
살아낸 세상을 무효화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을 알기에
그리고 복잡하게 둘러대도
결론은 단순하게 내려야
타인을 적당히 이해시킬 수 있음을 알기에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법을 배워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더 복잡하게 돌아가면
아쉬운 머리만 빠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금 탈모를 멈추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사실도
이 사람을 꽤 허무하게 했다.
이럴 거면서
그렇게 살았냐고
따질 힘도 이유도 서술해내기 전에
커피 한 잔에
꽤 달래지고
와인 한 병에
잊어지는 짜증남이
오히려 아쉬운 토요일 저녁이다.
글을 쓰는 이유는
글로 쓸 수 없는 것들을
글로 쓸 수 있는 것들로부터
구분해내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내가 인지하고 저지른 일이든
인지하지 않고 저지른 일이든
저지른 일은
꽤 되돌릴 수 없는 방식으로
나에게 새로운 각도로
현상을 해석해야 하는
과제를 끊임없이 남겼다.
좀처럼 글로 쓸 수 있는 것들은
서른 쯤 되니 진부해지고,
그리하여 글로 따져낼 수 없는 것들을
보고 사는 일들에
꽤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아니,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글로 누구에게 일러바치는 방식으로
기분이 나아지지 않아도 되는
일련의 패턴에 안착해서인지도 몰랐다.
갑자기 꽤 사는 게 즐거워져서
적잖이 행복한 방식으로
괴로워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불행에도 일련의
질량 보존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
분명하다.
행복을 견디기가 더 어렵다고 여겨질 때
행복의 일련의 원인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했다.
너무 쉽게 죽고 싶다는
내 인생의 첫 문장에
충성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히려는
나로부터 나를
구해내야 했다.
글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선명해지는 건 하나였다.
내일도 그 사람을 봐야겠다는
철저하게 조건화 된
그 단순한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동기가
이 개체를 재우는
오늘은 일반적인 토요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