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표 좀 보여주세요.
1만원으로
관심을 끌었다면
다음 번에는 2만원이어야 하는 듯 보였고,
그리하여 10만원이든
100만원이든,
감사합니다로
귀결되는 순간은
다르지 않는 듯 보인다.
대가없이 시공간과 물질을
나눈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살았지만,
그 기저에 깔린
대가에 대한 기대는
암묵적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내가
주는 무언가를 당신이 받았다면
내가 기대하는 행동이 반드시
있을텐데,
그 마음을 발견하고나서는
타인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것이
상당히 조심스럽다.
주지 않는 것도 이상하고
뭔가를 준다는 건 더 이상한
방식으로
제가 주는 이 빵을
받으시고 커피를 받으신 경우
다음 번에 만날 때에는
당신도 커피 한 잔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사 오는 센스를
기대해도 될까요로.
귀결하는 그 맥락을
탈피하고 싶기에
가방 안에는
혼자 먹을 것들만
자기 자리를 버젓이
차지한다.
그냥 때로는
내 마음을 전하고
기분 좋게 받을 대상이 있음이
기쁘지만,
주기만 하는 맥락과
그 관심을 유지하기 위해
높여가는 금액을 스스로
책정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닌 것이었다. 결국.
어떻게든 좋은 마음으로
합의해서
마음을 안정시킬 수는 있지만,
언제든
내 마음을 모른척할 수 있는
대상을 절대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건
위태로운 일이었다. 여러모로.
기대하던 관심을 받지 못하면
말썽을 부리는 본인을 발견한다.
그렇게라도
심술을 부리려고 하는
아이같은 모습은
나이가 30이 넘는다고 한들
무시할 수 없는 자아의 요술이었다.
심술난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고
분노하고
대드는 것을 목격하며
사랑의 눈길을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노려보는 눈을 목격하며
그것을 받아 줄
여력 또한 없음에
허탈한 심정이
보름달을 마주한다.
그 모습 자체로
마음은
채워진다.
물론 이론적으로.
당신의 좋아요는
얼마면 되는지
묻고 싶다.
정당히 지불할 수 있다면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오히려 대가를 지불해야
받기 편한 것들이 있다.
그렇게 가격표나 있으면
내가 못 사는 당신
관심, 인정할만 하니까.
그러나 많은 것들이
정황적으로 자의적이게
측정되는
아주 아주
비일관적인 사건만 같다.
같은 관심을 기대할 수도
없는 하루 하루의 거듭
속에서
누군가의 예외가 되고 싶지만
그 예외가 된다는 것의 의미 또한
비일관성을 내포함을 알아가는 중이다.
모두가 퇴근한
텅 빈 사무실에서
업무하는 8 시간 동안 한 모금 마시지 못한
물을 한쪽 구석에 서서
삼키며
염증으로
고통스러운 목의 통증을
느끼면서,
내 살아있음의
경과를 기억한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아프면 그래,,병원을 가야되지,,
당신을 생각한다고 항생제가
처방되는 것도 아니고...'
내일은 병원을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