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르는 둘

왕초보 여행자 모녀, 유럽에 도착하다

by 녕로그

유럽을 글로만 배운 둘이 여행길에 나섰다.


휴대폰은 가방 안쪽 고리에, 가방은 모두 자물쇠로 꽁꽁. 누구보다 철저하게 소매치기를 대비한, 극성맞은 여행자 둘. 비장하게 마지막일지도 모를 한식으로 배를 채우며 비행기에 올랐다.


장장 12시간의 비행도 설렘 앞에선 제법 짧게 느껴졌다. 기념사진을 찍고, 기내식을 먹고, 잠시 눈을 붙이고. 이것저것 함께 무언가를 하다보니 어느새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오랜 시간 날아와 머나먼 대륙의 땅을 직접 밟을 때까지도 이 여행이 실감나지 않았다.



설렘보다 긴장이 더 앞선 상태로 기차를 타고 솔 광장 역에 도착했다. 우린 여기서부터 여러 난관을 이겨나가야했다. 먼저, 각각 20킬로가 넘는 캐리어를 들고 올라가기. 올 것이 왔다. 우리는 한국에서부터 이런 경우에 대비해 수없이 계단을 오르며 연습했지만, 실전은 느낌이 달랐다. 나는 둘째치고, 몸집이 작은 엄마가 제 몸만 한 캐리어를 끌고 올라가야 한다는 게 가장 아찔했다. 그렇다고 내 캐리어를 두고 엄마를 도우러 갈 수도 없었다. 잠깐 한눈판 사이에도 도난당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짐은 각자가 책임져야만 했다.


모두가 이곳 주민인 듯 익숙한 걸음으로 지나가는 상황 속 덩그러니 놓인 우리. 우리의 시간만 멈춰 선 사람들 같았다. 아직 요령도 없던 우리는 이를 악물고 힘으로 캐리어를 들어 올렸다. 여행객이라는 티를 조금이라도 덜 내고 싶었다. 사소한 허술함 하나도 범죄의 표적이 될 것만 같아서.


출구의 끝은 범상치 않은 함성으로 가득했다. 뜨거운 태양만큼 열정 가득한 나라로 알려진 스페인을 소리로 먼저 만나는 듯했다. 밖으로 나오자, 광장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만큼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은 곳곳에서 흥분한 채 소리를 질렀고, 그 옆에는 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서 있었다. 남들은 모두 즐기고 있었지만, 우리에겐 공포심으로 가득한 곳이었고,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다음 날 광장을 걸으며 마주한 포스터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해 축제 분위기의 실체를 알게 됐다. 그 얼굴의 주인공은 바로, 손흥민. 챔피언스리그 결승이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걸 기념하는 행사였던 것이다. 우리는 하필 그 행사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간 셈이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감탄할 정신도 없이 걸음을 재촉하며 숙소로 향했다. 긴장감에 5분이 채 안 되는 거리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가쁜 숨으로 도착한 숙소. 짐을 내려놓고 나니 시작부터 캐리어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손과 팔의 통증에 앞으로의 여정이 막막했다. 게다가 겨우 진정하고 돌아본 숙소는 꽤나 작았다. 캐리어 한 개 조차 완전히 펼 수가 없었고, 펼친 캐리어들 사이로 폴짝폴짝 뛰어야만 생활이 가능할 정도. '유럽 숙소는 다 이렇게 작은 걸까?'



엘리베이터는 더 놀라웠다. 문을 수동으로 여닫고 브루탈리즘 건축이 아닐까 싶은 밖으로 노출된 엘리베이터. 엄마와 나, 가방까지 함께 타면 숨만 겨우 쉴 만큼 비좁기까지. 지금은 익숙하고 또 반갑기까지 한 유럽 구시가지의 흔한 엘리베이터지만, 그때는 솔직히 겁부터 났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으니까.


충격적으로 작은 방과 엘리베이터를 뒤로한 채, 베드버그를 막겠다며 가져온 스프레이를 침대에 마구 뿌렸다. 효과가 크지 않다는 말도 있었지만, 여행의 변수는 무엇이든 미리 차단하고 싶었다. 우리에게 베드버그는 유럽 여행 내내 경계해야 할 가장 큰 적 중 하나였다. 숙소에 도착하면 침대부터 살피는 일이 자연스러운 루틴이었을 만큼.


루틴을 마치자마자 굶주린 배를 안고 물도 살 겸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볼 새도 없이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결국 우린 집 근처 식당으로 들어가 샌드위치로 가볍게 해결했다. 그러곤 소화시킬 겸 마트를 찾으러 나섰다. 길 한편에서는 멕시코가 떠오르는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음악에 맞춰 공연을 하고 있었고,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그 낯선 풍경을 구경했다.



하지만 이내 밤이 되며 한층 더 흥분한 사람들의 모습에 아직 유럽의 어둠이 무서워 엄두가 안 나 포기하고 둘이 꼭 붙은 채 숙소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긴 첫날이다. 우리는 생각보다도 훨씬 겁이 많았다.


우리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