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아

오늘도 또 하나를 배웠다

by 녕로그

마드리드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박물관 세 곳과 왕궁, 톨레도까지 다녀왔다. 장기 여행이라기에 우린 지나치게 부지런했다.


이때만 해도 우리는 여유가 없는 한국식 여행을 했다. 다양한 곳을 둘러보는 게 목표였던 만큼 마드리드 일정에 조금의 여유가 있다면 무조건 근교를 가 시간을 꽉꽉 채워 다녔다. 톨레도는 이미 다녀왔으니, 남은 후보지는 쿠엥카와 세고비아. 그중 쿠엥카는 엄마가 유일하게 먼저 관심을 표했던 곳이었기에 남은 근교 여행은 여기로 정했다. 정보도 별로 없는 소도시였지만, 절벽에 매달린 집 하나로 우리를 사로잡았던 곳.


아침엔 공원을 돌고, 또 미술관도 봤다. 아침잠이 없는 우린 이 날도 상당히 부지런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곤 오늘 일정의 가장 중심이 될 곳에 가기 위해 마드리드 아토차역에 도착했다. 역은 생각보다 훨씬 거대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것부터 당황스러웠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살면서 만난 기차역 중 가장 복잡했다. 티켓 판매소는 지나치게 다양해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고, 물어볼 직원조차 없었다. 이 줄 저 줄 모두 기웃거리며 눈치 보며 불안함에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창구 직원과 대화를 해야 한다면 큰 곳이 낫겠지 싶어 일단 넓은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뽑은 번호표는 불가능할 미래를 예견이라도 하는 듯, 택도 없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999번까지 갔다가 다시 1로 돌아와도 한참 기다려야 할 만큼. 평범한 날 같은데 역사는 명절 귀성 전쟁을 눈으로 직접 보는 듯, 정신이 없었다. 종일 기다려도 내 순서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점점 애가 타고 예민해졌다. 엄마가 관심을 표한 곳이라 더 계획이 틀어지지 않았으면 했다. 스페인에 언제 다시 올까 싶어서 더욱 더.


주변을 간절한 마음으로 한참 헤매다 한 쪽 구석 부스에 편히 쉬고 있는 직원을 찾았다. 그는 영어가 통하지 않아 아는 스페인어를 총동원해서 대화를 했다. 그는 몇 마디 없이 '쿠엥카'라는 말에 우리가 기다리던 창구 쪽을 가리켰다. 맞게 찾아오긴 했나 보다.


혼란 속 뜻밖의 친절을 만나기도 했다. 지나가던 사람 중 한 분이 자신은 더 이상 이 번호표가 필요 없다며 바꿔주었다. 본인 것이 더 빠를 거라면서. 그 수많은 사람들 사이 왜 하필 우리에게 말을 걸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러다 한쪽에 사람들이 마구 줄 서 있는 곳이 눈에 들어와 무슨 줄인지는 몰라도 본능처럼 그 뒤에 섰다. 그리고 마침내 차례가 왔다. 이제는 정말 갈 수 있는 걸까.


"쿠엥카 가는 티켓 있나요?"

"언제 가시려고요?"

"오늘이요."

"매진입니다."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 티켓을 위해 얼마나 마음 졸이며 동분서주 움직였는데, 매진이라니. 여행객이 얼마나 있을까 싶은 곳이었던지라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다. 큰 도시 이동표는 이미 다 예매해 둘 만큼 우리는 계획적인 여행자였기에 물리적으로 갈 수 없게 된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쿠엥카는 별도 노선이 아니라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잇는 열차가 지나가는 도시였다. 그러니 표가 빨리 동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허무함과 상실감이 컸다. 이 여행은 내가 주도하는 만큼, 나의 잘못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해서든 가고 싶었지만, 언어도 잘 안 통하고, 물어볼 사람을 찾기도 힘든 이곳에서 다른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였고, 결국 우린 마드리드에서 또 다른 하루를 보내기로 하고 역을 빠져나왔다.


한순간에 모든 계획이 사라져버린 우리. 말없이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뜻대로 다 되는 게 어디 있겠어. 그렇지?"

틀어진 계획에 속상함에 풀이 죽은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지, 엄마는 나를 위로했다. 남들 눈엔 기차표 하나 못 산 일이었겠지만, 내겐 꽤 큰 배움으로 남았다. 세상은 내가 생각한대로만 움직이지 않고, 길이 막혔을 땐 그 계획을 붙잡고 서 있기보다 다른 길로 걸어야한다는 걸.


지도를 열어 마드리드를 훑어보며 계획을 재정비했다. 다 둘러본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갈만한 곳은 많았다. 마요르 광장, 산미구엘 시장, 그리고 마트를 지나 그랑비아 거리까지. 덕분에 마드리드를 더 구석구석 둘러볼 수 있었다. 마무리로 맥도날드에서 휴식까지. 밖이 보이는 창문 앞에 나란히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한참 구경했다. 틀어진 계획은 어느덧 잊혔고, 마음은 편안했다. 그렇게 사람 구경할 만큼의 여유를 내가 가진 적이 없었는지, 그런 시간도 좋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어쩌면 표를 못 구한 게 더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그날 처음 몸으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