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준혁 May 28. 2024

특별한 순간

1

일과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더니 공기가 평소와 다르게 무척 맑았다. 늘 퇴근하던 시간인데, 풍경이 유달리 낯설게 느껴졌다. 선명했다. 시야가 깨끗하고 투명해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까지 보일 것 같은 기분이었다. 태양은 빌딩과 빌딩 사이 가득 주황빛으로 물들며 저물어가고, 그보다 더 멀리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물결치며 전해져왔다. 작게 바람이 불자 허리춤까지 올라온 회양목과 머리 위의 벚나무 잎사귀들이 조용히 움직였다.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아니, 전혀 벅차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도 즐기지 못했다. 노을을 보며 느끼는 벅차오르는 감정조차 억지로 부풀려서야 간신히 느껴지는 정도일 뿐이었다. 멋진 풍경을 보아도 기분이 슴슴하다. 어딘가 동떨어진 느낌이다. 요즘 계속 그렇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이 실제 나라는 사람과는 몇발짝 떨어져 있는 것 같다. 나자신과 내가 서로 거리두기를 하는 걸까? 그냥 피곤해서 그런가? 뭐, 그런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지. 그렇게 속편히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다. 하지만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문득, 이러다가 정말로 특별한 순간을 놓칠까 겁이 난다.


2

놓치고 싶지 않다.


3

지하철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문득 올려다보니 바로 앞에 선 남자의 옷차림이 나와 비슷했다. 청바지에, 네이비색 셔츠, 흰색 운동화. 심지어 매고 있는 검은색 가방도. 컬러의 톤은 물론 실루엣까지 몹시 비슷했다. 나는 에스컬레이터에 실려 올라가며 그가 나와 다른 길로 향하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역시나 그는 내가 갈 방향을 앞서 갔다. 늘 이런식이다.

나는 일부러 속도를 늦췄다. 자연스럽게 서서히 멀어지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게 됐다. 그가 행인들을 피하느라 속도가 늦어지면 나도 걸음걸이를 늦췄고, 그가 조금 빠르게 멀어지면 나도 모르게 내 발걸음도 빨라졌다. 왜 그랬을까? 가까워지는 건 싫은 게 당연한데, 멀어지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운명의 끈이 이어져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맺어진 인연 같은 거. 그와 내가 만나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모종의 문제. 나는 사람과 사람의 문제에 관해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은 왜 다를까? 비슷한 상황에서도 왜 생각하는 게 다들 제각각일까? 감정이란 왜 이렇게 시도때도 없이 변해버리는 걸까?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는 게 정말 가능한 걸까? 불가능하다면 소통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엇이 우리가 서로를 죽이거나 증오하지 않도록 묶어주는 걸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서로 멀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한참동안 걸은 기분이었다. 그래봤자 생각해보면 오분도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갑자기 그가 발길을 돌려 다이소로 쏙 들어갔다. 그 순간 우리의 모든 역사도 산산조각나 흩어졌다. 우리 사이에 남은 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아무런 기쁨도 슬픔도 없이 가던 길을 마저 갔다. 집에 돌아와 저녁으로 목살을 구워먹었다. 배는 불렀지만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운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