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십 대까지 나는 철저한 운명론자였다. 세상 모든 일이 이미 정해진 수순대로 차례차례 흘러갈 것이라고 믿었다. 굳센 믿음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체념에 가까웠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인간이란 무엇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미숙하고 연약했으며, 주체적으로 삶을 꾸려갈 용기도, 힘도 없었다. 생각은 많았지만 그 생각 안에 의지라고 부를 만한 건 전혀 없었다.
그렇게 젊은 시절을 술술 흘려보낸 게 잘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하지 않았으면 정말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은 든다. 당시엔 몰랐지만... 돌아보면 나는 항상 내게 꼭 필요한 일을 직감적으로 해왔던 것 같다.
아니, 그것도 모두 운명이었을까?
2
새벽에 잠이 안와 오래 뒤척였다. 쓸데없이 다음날 일어나서 먹을 메뉴를 이것저것 상상했다. 치킨이나, 햄버거나, 탕수육이나, 족발이나, 해물찜 같은 것. 음, 아니지, 아니야. 그래, 내일은 피자다. 피자헛의 페페로니 팬피자(기름에 튀기듯 구워낸 미국 정통 팬도우)를 먹어야지. 느끼하면서, 짭쪼름하고, 바삭하면서 부드러운 고 녀석을 배가 터지도록 양껏 먹어야지, 다짐하며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배달 어플을 켜고 피자헛에 들어갔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메뉴를 담고, 주문을 하려고 하는데, 이상하네, 왜 이렇게 당기지가 않지. 불과 몇 시간전만 해도 노란 도우 위에 올라간 빨간 페페로니들이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 없었는데. 왜 이렇게 딱딱하고 칙칙해보이는지. 싫은 것까진 아니지만 뭐랄까, 피자를 먹어야만 하는 필연성 같은 게 완전히 사라진 기분이었다. 어영부영 망설이다가 생각지도 못한 삽겹살 짜글이 같은 걸 주문했다. 그럭저럭 먹을만 했지만 역시나 제대로 된 선택은 아니었다. 배는 부른데 만족스럽지가 않다.
음,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것도 운명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원래 피자를 먹을 운명이었을까? 아니면 짜글이를 먹을 운명이었을까? 혹은 피자를 먹고 싶어하다가 돌연 짜글이로 메뉴를 바꾸고 나서 먹은 뒤에 역시 피자를 먹을 걸 하면서 후회할 운명이었을까? 결국 운명이란 태도라기보다 과거에 대한 평가에 불과한 걸까. 흐음, 잘 모르겠다.
3
나는 오늘 운명에 관한 글을 읽고, 운명에 관한 글을 쓰게 될 운명이었을까? 자꾸 똑같은 결론이 되어서 민망한데, 역시 모르겠다. 그나마 확실한 결론을 하나 말하자면, 아무튼간에 운명을 핑계로 체념해버리는 습관은 참 별로라는 것이다. 나 스스로 오랫동안 그래왔기에 안다. 수동적 허무주의의 늪에 빠지면 모든 게 의미가 없어진다. 아니,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말할 것도 없이 그건 정말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