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몰리션(2015) & 벌새(2019)
누군가의 마음의 상처를 쉽게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떨까요? 치료약이라도 있다면 정말 잘 팔릴 텐데. 비슷한 상황에서 받게 되는 상처와 그 치유는 개인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마음의 상처쯤 안 받고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험난한 세상 속에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고 준비해도 혹은 세상을 달관한 듯 유유자적 지내도 계절이 바뀌는 걸 막을 수 없듯이 마음의 고난은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자세히 보아도 연관성은 없어 보이는 이 두 영화 '데몰리션'과 '벌새'에서 주인공들은 그들의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하는지 얘기해보고 싶었습니다.
우선 데몰리션과 벌새는 영화를 보아야 하는 시점에서부터 다른 태도를 요구합니다. 데몰리션은 주인공 데이비스의 시점으로 들어가 그의 상황을 느끼고 행동들을 함께 하기를, 벌새는 주인공 은희에게 몰입하기보다는 감독이 극 중의 은희를 보는 시점과 같이 조금 떨어져 그때의 상황을 보아주기를 원합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
벌새는 김보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감독 본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경험을 바탕을 토대로 한 자서전과 같은 양식을 띄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배경은 1994년, 주인공 은희는 중학교 2학년입니다. 중 2병이란 말이 있듯이 저자에게는 흑역사만 가득할 뿐한 시절인데 왜 감독은 굳이 그때의 본인을 다시 마주하고 싶어 했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앞섭니다. 다들 겪는 질풍노도의 시기일 텐데 은희가 갖게 되는 상처는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입니다. 벌새를 보고 나서 본인의 경험과는 다르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지만 꼭 은희처럼 형제간의 막내가 아니어도 연애하던 이성친구가 없었더라도(ㅠ.ㅠ) 나와 은희는 전혀 다르다고 말하기 어려운 보편적인 부분을 은희는 겪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1994년이라는 그 시대와 사회 속에 있었던 경험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 중 2의 나이로는 알기 어려웠던 시대적 기류와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겪어야 했던 폭력과 아픔을 들춰냄으로써 은희의 상처가 결코 은희만의 것이 아님을 관객들에게 전달합니다.
은희가 겪는 상처는 다양합니다. 부모에게서 받지 못한 충분한 애정에 대한 갈증과 오빠로부터의 폭력, 이웃들의 편견, 이성친구와 동성친구에게서의 버림 등등 본인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에 대해 때로는 답을 구하고자 해보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하기도 하지만 상처가 피해 지는 건 아닙니다.
벌새가 개인의 사건과 사회적 사건을 맞물려 공감대를 형성하려 했다면 데몰리션은 누구나 겪었을 개인의 상처를 더 깊게 파고들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주인공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의 상처는 갑작스러운 아내-줄리아 의 죽음입니다. 이별의 시기에 아내를 사랑하지 못했음을 자책하는 데이비스는 고장 난 자신의 마음을 고치려는 듯 주변 모든 것을 분해하기 시작합니다. 사물을 분해하고 자신의 지위와 마음을 분해해가는 그의 모습에서 울음 없는 절규를 들을 수 있습니다.
주변 인물 캐런(나오미 왓츠)은 구체적인 묘사는 되지 않지만 그녀 역시 비슷한 아픔을 지나왔고 본인은 그저 덮어 두었을 그 상처 안에 허덕이는 데이비스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이 캐런의 모습은 관객가 동일시되며 데이비스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바라보게 해 줍니다.
상처의 이유를 찾으려는 은희=감독과 상처의 감정을 찾으려는 데이비스의 행보는 다른 것이지만 둘 다 상처의 치유를 위한 길입니다.
벌새가 실화를 토대로 한 극을 띄고 있지만 전개를 위해 데몰리션처럼 필요한 장치로써 연출된 인물이 있습니다. 벌새에서는 한문 선생인 영지(김새벽)가, 데몰리션에서는 캐런의 아들인 토드(브렌단 둘링)가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영지와 은희가 둘 다 왼손 잡이었던 점을 캐치해 영지가 미래의 은희라고 빗대어 보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 보다는 영지란 인물은 은희의 우상으로서 감독이 어린 시절의 자기를 이끌어주길 바란 필요에 의해 가공된 인물로 보입니다. 감독은 영지를 통해 관객들에게 명심보감 교우 편을 들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병원에 입원해 받은 관심만으로 신이 난 은희에게는 성장의 촉매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토드는 데비이스의 감정이 투영된 존재로 볼 수 있는데 데이비스가 보여주는 감정의 변화에 따라 토드의 모습도 변화되어 갑니다. 굳게 닫아둔 마음의 벽 위에 까칠함을 덮어놓았던 토드는 데이비스와의 교류를 통해 같이 물리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벽을 허물게 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토드에게 그려지는 폭력을 이해하기 어려운데 토드를 데이비스의 감정이 투영된 매개체로서 바라보면 감춰져 있던 데이비스의 감정의 멍들을 보여주는 계산된 연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벌새와 데몰리션의 또 다른 특징은 주변 인물에 대한 시각에 대한 변화입니다. 벌새의 초반과 중반은 어두운 음영과 무거운 사운드로 침잠된 은희의 시점으로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아빠, 오빠 등 다른 가족 구성원들과 영지 선생님이 은희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보조적인 인물로서만 보이는 듯하다가 극 후반으로 가면서 각 인물들의 감정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때 아니 아빠의 울음과 오빠의 울음 장면, 영지의 편지와 노래들. 아빠와 엄마의 싸움과 상처. 무너진 성수대교를 바라볼 때 은희 혼자가 아니었던 모습. 등 많은 시간을 할애해 다른 이들의 아픔을 보여줍니다.
데이비스가 개인의 감정에 빠져 주변인들과의 박자를 못 맞추는 과정에서 그려지는 장인 필의 모습은 다소 매정하게 보입니다. 필이 딸 줄리아의 보험금으로 장학금 재단을 구성하려 하는 모습 등은 자산가가 보여주는 어떤 가식적인 행위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조금 억지스러운 연출로 캐런을 통해 이런 모습을 비웃기도 합니다.(극 중 실제로 비웃는 장면). 하지만 필이 데비이스를 향해 쏟아내는 단 한 씬만으로 자식을 잃은 이의 감정을 표출합니다.
There was love between me and Julia. I just didn't take care of it.
I loved 가 아니라 There was love 라고 말한 데이비스의 감정은 더 이상 홀로 자책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감정이 홀로의 것임이 아님을 또한 상처도 자기 혼자 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필에게 말합니다.
I was wondering if, um...
You'd wanna be a part of it.
상처의 치유에 동참해줄 것을..
벌새의 대사 중에 하나를 꼽자면 재밌게도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
이 대사가 생각납니다. 이유라고는 되지 않는 이 이유가.. 은희가 받았던 상처들의 원인이었음을 그 시절 우리가 받았던 상처들의 이유였음을 비유한 재치 있고도 아픈 대사였습니다.
멀어 보였던 이 두 영화의 결론은 은희의 상처도 데이비스의 상처도 어쩌면 혼자 치유될 수 없음을, 그 아픔을 공유하고 이해할 때 그들이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영화들이 나의 마음을 흔들었던 건 들여다볼 용기가 없어 세월과 함께 그저 외면하고 덮어두었던 나의 상처를 대신 바라봐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유를 몰랐던 감정에, 알고도 느끼지 못했던 그 순간들에 뒤늦게나마 같이 위로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