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덴 형제의 시각
세계 3대 국제 영화제라 하면 베니스, 베를린, 칸 영화제를 말한다. 그중 굳이 따지자면 칸 영화제를 가장 주목받는 영화제로 볼 수 있다. 물론 일반 대중들은 미국의 아카데미 시상식에 더 관심이 많더라도 말이다. 헐리우드 영화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이다. 한때 전도연 분이 '밀양'으로 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많은 관심을 받았었다. 하지만 '밀양'이 대단한 영화지만 즐기기 쉬운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당시 나뿐만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도 밀양을 극장서 관람하고 오셨었는데 아버지 말씀하시길.
'아니 그래서 이 영화가 말하는 게 교회 다니라는 거 아니냐?'
이렇게 간혹 영화가 어려울 때가 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유럽의 국제 영화제는 어딘가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그리고 얼마 전 여러 말해도 입 안아픈 '기생충'이 칸에서 최고 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다시 한번 유럽 국제 영화제에 관심이 쏟아졌고 역대 황금 종려상 수상작 들도 같이 조명 받기 시작했다. 다르덴 형제는 칸 영화제의 단골손님으로 황금 종려상은 이미 2번 수상했고 그 외 작품들도 항상 강력한 후보들이었다.
아직 다르덴 형제의 작품들을 다 보진 못했지만 이 두 거장의 얘기를 잠깐 하고 가보자. (내가 뭐라고..)
-많은 팬층이 있는 감독님이니만큼 혹시 정보의 오류 또는 첨언이 있으시면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장 피에르 다르덴(Jean-Pierre Dardenne), 뤽 다르덴(Luc Dardenne) 형제는 벨기에 출신으로 작품들의 배경 또한 본인들이 자라온 벨기에의 세랑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다큐멘터리로 경력을 쌓은 이력답게 작품들 전반에서 다큐의 느낌을 많이 받을 수 있는데 이는 다른 다큐 출신 감독들에게서도 흔히 나타나는데 또 다른 황금종려상 수상 감독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초기 작품들에서도 볼 수 있다. 고레에다 감독님은 나중에 다른 리뷰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다르덴 형제의 다른 특징들을 몇 가지 더 살펴보자.
보통 영화 촬영을 하게 되면 제작비 절감 등의 이유로 인해 같은 로케이션의 촬영분을 한 번에 촬영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첫 촬영부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게 되는 일도 생기게 마련이고 아무리 스크립트를 여러 번 읽은 배우들이라고 해도 감정선 연결에 애를 먹을 수도 있다. 무명 배우나 신인 배우를 선호하는 다르덴 형제에게는 이런 촬영 일정이 디테일한 감정 표현의 방해요소이기에 모든 촬영 일정을 작품의 시간 순서에 맞춰서 촬영을 한다.
대부분의 촬영이 핸드헬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등장인물들에게 매우 근접해서 촬영되기 때문에 배우들의 표정이나 시선 처리 등이 작품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아들'에서 다소 과격히 흔들리는 카메라와 워킹은 주인공 올리비에의 불안한 감정과 시선을 대사를 통한 부연 설명 없이 잘 담아낸다.
작품들에 배경음악이 전혀 사용되지 않는데 '로제타'와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잠깐 흘러나오는 음악들도 모두 영화 내 디제시스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일 뿐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조차 음악이 없고 엔딩 또한 이야기의 맺음이 아닌 쇼트 중간에서 잘려나간 듯한 장면으로 바로 크레딧이 올라가게 된다. 이는 영화 속 서사가 단지 영화 안에서 그치지 않고 러닝타임 이후 현재의 시간에서도 이 이야기들이 이어지고 사유되도록 하는 다르덴 형제의 기법처럼 되었다. 그리고 우리 현실에는 원래 배경음악이란 건 없다.
'내일을 위한 시간'의 마리옹 꼬띠아르
초기 작품에 무명 배우들을 기용함으로써 낯섦의 미학으로 다큐와 같은 공간을 구성해 내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같은 배우들의 출연하게 되면서 그런 분위기는 점점 옅어졌고 대신 안정적인 표현을 가져가게 된 것 같다. 후기 작품들에서는 유명 배우들의 섭외도 이루어지는데 '내일을 위한 시간'에는 탑스타인 '마리옹 꼬띠아르' 도 출연하게 된다.
핸드헬드 촬영과 적은 편집 화면으로 인해 촬영이 빨리 이루어질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짧아도 2 테이크 이상 촬영하게 되는데 형제가 한 명이 카메라를 들면 다른 한 사람이 연기 지도를 하게 되고 컷 후에 역할을 교대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편집 외의 후반 작업이 거의 없기에 촬영할 때의 결과물이 작품 전체를 결정한다 보아도 무방하다. 따라서 현장에서의 촬영에 세심하게 공을 들이는데 한 장면에 100테이크까지 가는 일도 있다 하니 촬영 현장의 분위기가 결코 즐겁지만은 않을 것 같다.
영화 속 얘기를 좀 해보자면 '로제타'는 사회적 빈곤계층으로 캠핑카에서 생활하며 알코올중독인 어머니와 단둘이 지내는 주인공 로제타의 이야기다. 수습 기간이 끝나자마자 공장에서 잘린 후에 와플 공장에 반죽 업무 일로 취업을 하지만 3일 만에 일자리를 잃게 된다. 청년 실업에 관한 이야기지만 대체로 이런 주제를 다룬 영화들이 비관적이고 반항적인 태도의 인물들을 보여주는데 반해 로제타는 자신에게 불합리한 체제에 저항하기보다는 그 안에 들기 위래 공격적으로 보일 만큼 노력한다.
가난하지만 그 가난함에 꺾이지 않은 로제타의 도덕심과 열의는 로제타를 응원하게 만든다.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적 윤리와 정의감을 갖춘 로제타지만 현실은 그녀에게 발붙일 곳을 내어주지 않는다. 자꾸만 밀려져 나가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결국 자신이 지켜온 신념과 삶조차 잃어가게 되는 모습들은 실로 잔혹하다.
당시 이 영화가 벨기에에 준 사회적 충격은 대단해서 '로제타 플랜'이라 불리는 법이 생겨났고 의무적으로 고용 노동의 일부를 사회 초년생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로제타'가 청년 실업이란 주제를 내세워 청년층의 고통을 조망해 사회 전체에 책임감을 부추겨 그 고통을 분담하려는 사회적 기능의 목표가 분명해 보였다면 '아들'은 잠시 사회적 체제의 얘기를 벗어나 인간이 윤리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디까지 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아들'에서 주인공 올리비에는 한 교육센터에서 소년원에서 출소한 아이들에게 가구 제작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왜인지 교육센터의 신입 명단에서 한 이름을 본 이후에 크게 동요하며 불안정한 행동을 보인다. 보통 다른 작품들에서 주인공의 옆에 붙어 같이 동행하는 이로서의 시점을 보여주었었다면 '아들'에서의 카메라는 올리비에의 곁에서 그의 눈으로 이동을 반복한다. 올리비에를 흔들리게 한 '프란시스'(모건 마린느)를 쫓는 그의 시선과 동일시된 카메라는 배우의 시선만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불안감과 격동감을 직접 관객으로 체험케 한다.
-스포 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한 리뷰들을 찾아보면 '용서'라는 관점으로 뻔한 주제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다르덴 형제의 작품들이 그렇게 단순하진 않다. 올리비에에게 아들이 있었고 의문의 인물로 보이던 프란시스가 아들을 죽인 소년이라는 사실은 꽤 관객에게 늦게 전달된다. 올리비에의 행동에 의문을 갖게 되던 관객들도 '아..'하는 탄성(아들이란 제목의 의미를 이제서야 알게 됨)을 마음속으로 짓게 됨과 동시에 '아니 왜?'라는 질문을 다시 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미 이혼한 아내 마갈리(이사벨라 수파트)가 묻는 대체 왜 그러냐는 말에 올리비에는 자신도 모르겠다고 답한다.
이성적으로는 프란시스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할 올리비에지만 자신도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 채 그를 계속 쫓는다. 늘 그렇듯이 이성과 감정은 다른 길을 걷는다. 이성이 항상 효율적이고 정의로운 길을 안내한다 해도 감정이란 늘 예기치 못한 선택으로 우리의 맘과 발을 움직인다.
올리비에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전혀 다른 얘기지만 알렌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21그램'이 생각났다. '21그램'은 주인공이 자신에게 이식된 심장과 연결된 사람을 찾아가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갖고 있다. 마치 만유인력의 법칙이 적용되듯 사람들은 자신에게 연결된 어떤 고리들을 쉽사리 놓지 못한다. 그리고 그 법칙처럼 이유는 없다.
프란시스에게 다가간 올리비에는 아들을 죽였던 것에 납득할만한 이유라도 있기를 그리고 후회와 함께 뉘우치고 있길 기대하지만 허망한 대답만 들을 뿐이다. 올리비에의 갈등의 표현은 여러 가지 장면으로 표현되는데 자기가 운전하고 있는데 프란시스가 졸자 다그치듯이 깨운다. 그랬다가는 다시 뒷좌석에 재운다. 식사를 챙겨주는 듯하다가도 돈은 내주지 않고 해치지 않겠다고 하지만 어느새 목을 조르게 된다.
프란시스가 자신의 죄를 후회하고 뉘우치고 있었다면, 올리비에의 말을 듣고 도망치지 않고 용서를 구하는 이었다면 올리비에의 용서한다는 말을 우리는 들을 수 있었을까.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고레에다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에서 키키 키린 분의 굳은 얼굴로 내뱉던 장면이 생각난다. 긴 시간 용서를 구해온 자에게도 쉽게 내어지지 않는 게 자식을 잃은 이의 용서라는 것은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그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
어차피 답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올리비에의 갈등처럼 마지막 쇼트에 대한 여운 또한 이쪽이든 저쪽이든 그와 나의 감정처럼 요동칠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많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나름의 올바른 윤리적인 가치관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쉽게 답할 수 없는 끊임없는 질문들은 다소 괴롭기까지 했다. 명쾌한 답이란 없는 그 사유하게 되는 질문에서 반길 수 있었던 건 내가 아직 이런 질문에 고민할 수 있는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다르덴 형제의 질문에 기꺼운 마음으로 고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