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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섬 Feb 1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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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만 책을 꺼내 들었다. 요즘에는 긴 호흡으로 책을 읽기가 어렵다. 책에 대한 흥미가 떨어져서일까, 아니면 더 짧은 순간에 내 눈길을 끌고 재미도 가져다주는 여러 매체들의 발달 때문일까. 문득 어렸을 적 책 대여 서비스를 이용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매주 한 번 4권씩의 도서를 집에 가져다주는 서비스였는데, 당시 독서광이던 나는 책이 바뀌는 날 곧바로 새 책을 집어 들고는 하루 이틀 만에 다 읽어버리곤 했다. 오히려 남은 5일 동안은 읽을 책이 없어 학교 도서관에 가서 남은 독서욕을 채우곤 했다. 그러던 아이가, 이제는 책을 멀리하고 하루에 몇 시간씩 스마트폰을 들고 산다. 달라진 건 무엇일까. 어느 경우에나 눈이 나빠지는 건 마찬가지이다. 

'시간이 없다'라는 핑계 속에 우리는 자극적인 10분짜리 재미와 감동을 여러 편 연달아서 본다. 자극적일수록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고, 그래서 콘텐츠 공급자들은 더 아슬아슬한 자극을 연출하기 위해 선을 넘어서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긴 호흡으로 접하는 것들이 더 깊게 우러나온다는 것을. 마치 1분짜리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30분간 기승전결을 갖추어 이야기된 무서운 이야기가 더 무섭고 실감 나게 느껴지는 것을 알고 있듯이 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드라마나 영화 산업은 일찍이 망했으리라. 나는 지금 재미의 좋고 나쁨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재미로 인해 얻어갈 수 있는 것들, 그리고 '여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스턴트 재미에 쩔여져있던 어느 날,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하루라도 핸드폰이 없으면 어떻게 살까 걱정했던 것이 무안하게도, 초반의 힘겨움을 견디고 나니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고, 그 안에서 유일하게 접할 수 있던 종이 매체인 책과 다시 가까워지게 되었다. 21개월 간의 군생활 동안 즐겁고 유익한 기억은 떠올려내기 힘들지만, 그곳이 내게 가져다준 긍정적인 영향을 두 가지 정도 꼽자면 규칙적인 생활과 디지털 디톡스 정도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기도 했다. 그때부터 써온 글들이 내 첫 번째 책의 근간이 되기도 했고 말이다. 아무튼 내게 다시 종이를 넘기며 상상하고 생각하는 재미를 되돌려 준 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전역 후에는 디지털 매체와 아날로그 매체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확실히, 글을 쓰려는 시도를 해봐서인지 예전보다 머리가 커서 그런지 내가 접하는 것들에게서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책을 앉은자리에서 한 호흡만에 읽는 것은 어렵다. 옛날에는 숨 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는데 말이다. 다행히도, 나에겐 책갈피가 있다. 책갈피를 통해, 나는 작가가 구상한 상상의 세계 속에 한참을 헤매는 일 없이 손쉽게 나 자신을 들이밀 수 있다. 또한, 감명 깊은 장면을 몇 번이고 되돌아가 음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전에는 그다지 쓸모없었던 물건에게서 발견한 쓰임새에 대해, 나는 왠지 모를 동질감과 연민을 느낀다.

인생이라는 건 반드시 책과 같은 것이었으면 한다. 10분을 마주해도 5분 뒤에 잊히는 디지털이기보다는 1시간, 아니 하루 내내 머릿속에서 기억될 수 있는 아날로그적인 낭만과 의미가 아직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있으니까. 우리의 삶이 디지털화되더라도, 본질 그 자체는 아날로그에 근거하고 있으니까. 

인생이 책이라면, 나는 다른 책 속의 책갈피이고 싶다. 어디까지 읽었는지 몰라 쩔쩔맬 때, 내가 기준이 되어줄 수 있으니까. 인상 깊은 부분을 다시 찾아보고 싶을 때, 나를 통해 언제든지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까. 한 개를 꼽든 열 개를 꼽든, 나라는 이름의 책갈피는 단 하나니까. 내가 죽더라도, 타인의 삶 속에서 내가 살아있었다는 생생한 증거로서 남아있을 테니까. 그렇게 누군가의 기억 속에 어떠한 장면으로 남을 테니까. 기왕이면 나를 통해 떠오르는 그대 인생의 어느 장면이 즐겁고 감동적인 장면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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