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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딩버스 May 07. 2023

나우이즘의 부작용

하루하루 다른 자아를 가지고 산다면

스토아학파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삶의 여정 속에 자아는 여러 번 작은 죽음을 경험한다고 했다.

어린이 자아는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청소년 자아는 성인이 되면서 사라진다. 출산, 질병, 교육, 이민, 새로운 짝 등 인생의 이벤트를 겪으며 새로운 자아가 출현하고 떠나간다.

누구도 어제와 같은 사람일 수 없다지만 나우이즘(Now-ism)에 심취하다 보면—조금 과장하자면 순간충이 되면—단기집중적인 사람(short-term oriented person)이 된다.

나의 자아는 ‘그 순간’에 최적화되어 설계되어 있다.

이번 글에서는 그에 대한 부작용을 말하려고 한다.


1. 우선순위 설정에 어려움을 겪는다.

해야 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한다.

만약 어떤 일이 하고 싶어지면 대단한 워커홀릭이 된다. 나는 내가 코파운더로 있던 회사에 다닐 때에는 일에 집중하느라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서 살았다.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렸기에 망정이지, 몸이 상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일에 몰입해 있었던 것 같다.

보통 긴급도와 중요도로 2x2매트릭스를 그려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게 중론인데 나는 나의 흥미를 얼마나 끄느냐와 내가 했을 때 얼마나 임팩트가 나느냐를 기준으로 일을 처리한다.

(그런데도 내 퍼포먼스가 썩 나쁘지 않고 단체생활에서도 욕을 안 먹는 건 하기 싫은 일도 빠르게 쳐내는 퀄리티가 괜찮아서인가 보다.)


내가 공을 들여서 마친 일에 남이 인정을 해주면 더 좋고,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왜냐면 나는 그 일을 해내기 위해 최적의 방법을 고민하느라 저녁시간이 다 된 지도 모를 만큼 시간을 보냈을 테고, 샤워하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재빨리 받아 적으며 룰루랄라 흥이 나는 경험을 했을 테니까 말이다.

반대로 노력이 필요하지만 만족감이 낮은 일인 빨래, 청소 같은 집안일은 미루고 미루다가 한꺼번에 모아서 하기 일쑤이다.

쇼핑 같은 것도 꽂힐 때 한꺼번에 몰아서 하는 스타일이라, 필요한 것이 있어도 내키지 않는 경우에는 검색-비교-선택-구매 이 모든 과정이 지난하게 느껴져서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 어떤 계절은 아무런 옷과 아이템을 사지 않고 지나가기도 하지만, 사고 싶은 무언가가 생기면 그땐 통장에 생채기를 내서라도 구매한다.

장점은 계산이 없어 단순하다.

내 의사결정이 명확한 만큼 타인도 그럴 거라고 치부해서인지 다른 의도가 있을 거라고 꼬아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가 잘 읽힌다는 단점도 있다. 아마 나는 바둑 같은 건 잘하지 못할 거다.

몇 수 앞을 미리 계산하고 유리한 방식으로 일을 하기보단 그냥 내 진심으로 하는 게 맞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는 편인 것 같다.


2. 도파민 추구형 인간이 된다.

오래 만난 연인과 결혼하게 된 친구가 청첩장을 나눠주길래 어떻게 결혼을 결심했냐 물었다.

그 친구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스스로에게 세로토닌형 인간으로 살겠다는 다짐을 하고 나서 청혼했다고 밝혔다.

나는 애초에 타인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교제하는 이성이 아닌 다른 이성에게는 호기심이 가는 편이 아니라 ‘관계 맺기’에 있어서 도파민을 추구하는 편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외의 거의 모든 면에서는 경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세상에는 배우고 싶고 가보고 싶고 한 번씩 해보고 싶은 것이 많다.

난 호기심과 탐구정신이 강하고, 그를 바탕으로 어떤 부산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한다.

그 과정에서 분출되는 도파민을 사랑한다.

세상을 바꾸는 건 어쩌면 도파민에 중독된 사람들이 내는 아웃풋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

나는 이런 인간의 탐구정신을 숭배하여, 다이아조차 천연이 아닌 랩그로운이 더 좋다.

천연 다이아는 노동을 착취해서 캐낸 물질이자,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지구상에 공룡이 있을 때부터 맨틀에 함께하던 물질이라는 것에 기대어 결혼의 영속성을 맹세하는 것이라고 본다.

반면 랩그로운 다이아는 불순물을 없애는 기술과 에너지 효율화를 추구하는 과학자들의 결실이라고 생각하니 연구결과로 개발된 랩그로운이 더 마음에 든다.

도파민 추구형 인간들의 쾌거인 것 같아서.


3. 기억력이 나빠진다.

차곡차곡 쌓이는 시간x경험의 블록이 워낙 많으니 특정 순간을 떠올리려면 기억을 더듬어야 한다.

기억이 왜곡되는 적은 없는데 아예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기억력 측면에서 나우이즘이 인과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상관관계는 있는 게 분명하다.

지나간 순간에 크게 집착하지 않으려 노력을 하다 보니, 기억이 통째로 사라지는 걸까.

사실상 그 순간의 질감은 다시 재현되기 어려운 것이라고 변명해 본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순간들 중에 좋았던 순간까지 모두 날아가버리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영상을 촬영한다.

조금 더 부지런해져야 하고, 도큐멘팅을 위해 정신이 팔리면 순간에 대한 집중도가 흐릿해지긴 하지만 뭐 나쁘지 않다.


4.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된다.

혹자는 이기적인 게 아니고 독립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확실히 평균의 사람보다 자기중심적인 것은 맞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가 있다는 건 취향과 의견이 뚜렷하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게 중요하지 않은 것에는 철저히 무관심하기 때문에 무심한 면이 있다.

골치 아픈 문제는 나중으로 밀어내버리는 바람에 회피형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자기 성질대로 살면 만족할 수밖에 없고 만족이 쌓이면 행복해진다.

그렇지만 욕을 먹기 쉽다.


5. 관계적으로 고립될 확률이 높다.

내 색깔이 뚜렷하면 할수록 뾰족한 사람이 된다.

와인 좋아하냐는 물음에 “네 레드와인 좋아해요”가 아니라 “네 저는 기포가 있는 레드스파클링 와인 좋아해요. 특히 견과류 향과 허브향이 나는 화려한 아로마 와인이요.”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좀처럼 와인을 선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몇십 년 후 은퇴해서 누릴 안락한 미래만을 꿈꾸는 사람이거나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이 찐하게 되어있지 않는 사람과는 이렇게 사소한 것에서부터 차이점을 느낄 수 있고, 심리적 거리감이 생기게 된다.

대화가 통하는 사람만을 곁에 두려는 욕심을 가지다가는 주변에 사람이 남아나지 않게 되므로 나는 억지로라도 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질문하고 귀 기울이는 연습을 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기 때문에 책임도 후회도 내 몫이라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어, 타인이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다.

‘뉴욕에 사는 파이낸스에 종사하는 여성’만 되어도 유니크한 존재일 테지만 뉴욕에 살면서 주말마다 파머스마켓에서 크랩케이크를 사 먹고 LP를 관리하는 벤처투자가인 중국계 싱가포르 여성이라고 하면 정말 정말 유니크한 존재가 된다.

나우이즘에 충실하다 보면 이렇게 곱하기에 곱하기가 쌓여버리므로 매우 세분화된 취향과 스타일을 갖게 된다.

스스로에게는 여러 기회를 주고 가꾸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곁을 잘 내어주지 않는 사람이 되는 이유이다.

조용히 고립을 즐기므로 딱히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문제라면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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