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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딩버스 Apr 03. 2023

나우이즘의 발달

내가 Now-ism을 주창하게 된 이유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가 언제야?"

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언제인지를 생각해 보면 그 '때'는 꽤나 오랫동안 ‘진행형’이었다.

‘때’라는 것은 예를 들면 고3이었을 때, 실연의 아픔을 겪었을 때, 통장 잔고가 바닥이던 때, 이렇게 언제부터 언제까지 시작이라는 이벤트와 끝이라는 이벤트가 있는 그 사이의 시간이어야 할 것 같은데, 내게 그 때라는 것은 시작은 있는데 끝이라는 게 없는 기간이었다.

나는 내가 죽을 때까지(=끝날 때까지) 괴로워할 것 같았다.


나는 1월생이라 물병자리이다.

그래서 그때는 다음 주, 다음 달, 이번 연도의 물병자리 운세를 찾아보면서 미래로 현재를 버텼다.

운세는 웬만하면 좋은 얘기를 해주니까 그걸 읽으면서 다음 주엔 더 나아지겠지, 다음 달엔 더 좋아지겠지 생각하면서 꾸역꾸역 시간을 살아냈다.

시간 지나면 괜찮아지는 게 아니었다.

시간은 해결해주지 않았다.

나는 괜찮아지지 않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일본 별자리 운세를 찾아서 번역해서 읽는다. 구글 발번역이 재밌어서.


내가 후회하는 그 일이 발생한 이후로 쭉 그랬다. 과거에 이미 발생한 일이라서 되돌릴 수 없는 일.

그 사실이 나를 절망케 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한다고 해도, 다른 누군가가 뭐든지 돕는다 해도, 그 일은 그렇게 벌어져버린 상태였다.

처음에는 매일매일 내 머릿속에서 그 일을 리플레이했다.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보다 더 이전으로 돌아간다면, 등등 온갖 가정에 가정을 더하고 시간여행을 하는 망상까지 이어졌다.

그 일이 발생한 것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나 보다.


나는 공포를 느꼈다.

내가 평생 이 마음으로 산다면(live) 살 수(alive)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일이 또 발생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훌륭한 사람들은 삶이 그런 거라고, 불확실함을 사랑하는 게 삶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럴 위인이 못됐다.

내가 괴로운 이유가 후회 때문이라면 더 이상 후회할만한 걸 하면 안 됐다.

그래서 나는 후회하지 않을 만큼 순간순간을 충분히 만끽하고자 했다.

내가 보내는 하루,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가는 장소와 내가 생각하는 것들 모든 것을 구석구석 만끽해서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그렇게 살았을 삶을 사는 게 목표가 됐다.


50년간 15만 명의 환자를 돌봤다는 정신과 의사가 밝힌 불안을 끊어내는 방법은 덮는 것이라는 기사를 읽으면서 아, 내가 살기 위한 방법을 스스로 터득했나 보다 싶었다.

그는 원한과 분노, 불안을 없앨 수는 없으니 작은 재미로 덮으라고 했다.

인생의 슬픔을 일상의 작은 기쁨으로 잊고, 사소한 즐거움으로 희석하라고 했다.

내가 정확히 하고 있는 거였다.

잠시라도 마음속의 괴물을 잊을 수 있는 즐거운 일을 찾아서 하는 것.

그렇게 하다 보면 그 과거의 일이 대과거가 되었다.

대과거가 더 대과거가 되고 새로운 기억이 쌓여 조금씩 그때가 희미해질수록 덜 고통스러워졌다.

괴로움의 빈도와 강도가 확실히 덜해졌다.


그렇게 몇 년간 나우이즘을 충실하게 실천하며 재미를 열심히 좇았다.

스터디원들이랑 성수동 플리마켓에서 내 소장품을 팔아봤고 친구들이랑 간 아트페어에서는 동질감이 느껴지는 작가의 그림을 사봤다. 돈을 버는 재미와 쓰는 재미가 있었다.

줌바댄스, 번지핏, 카버보드, 자이로토닉, 승마를 배웠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재밌었다. 나는 파워는 좋지만 유연성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론 동적으로, 때론 정적으로 스트레스를 날리는데 효과가 좋았다.

좋아하는 향을 찾은 이후엔 향 제품을 콜렉팅하면서 혼자서 인센스 홀더를 카빙했고 보석 방향제도 만들었다. 이렇게 수작업하는 것들은 시작한 지 한 시간 만에 재미가 시들해졌다. 나는 손재주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까지 친하진 않은 후배들이랑 클라이밍을 하러 가거나 유명 셰프랑 밥 먹는 자리에도 나가봤다. 얼마든지 사교적인 척할 수 있었지만 집에 오면 시들시들한 상태였다. 남과 어울리는 재미를 누리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충전 시간이 몇 배는 필요했다.

일회용 모임을 만들어서 모르는 사람들이랑 배드민턴을 치거나 일출산행을 떠나고, 단편영화를 보고 토론을 했다. 나와 접점이 없는 사람들의 인생과 시각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 어떤 경험도, 감정도 철저히 내 것으로 만들었다.

웃기면 박장대소를 했다. 카페에서 신나서 큰 소리로 웃다가 경고를 받은 적도 두 번 있었다.

알바생은 내가 너무 시끄러워 다른 손님에게 방해가 된다고 했다.


이제는 열심히는 아니고 적당히 나우이즘을 좇는다.

인생을 남김없이 맛봐야지!라는 욕심에 파워내향인인 내가 이것저것 행사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면서 인풋과 아웃풋을 동시에 늘리다 보니 종종 방전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균형을 맞추게 되었다.

햇볕이 들어오는 날엔 모든 계획을 무르고 침대에 퍼질러 누워있는 게으름도 피운다.

조금 더 내게 너그러워졌다. 그래도 괜찮아졌으니까.

여전히 삶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때 내가 느꼈던 그 공포로부터는 해방된 것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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