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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성평화지킴이 Nov 28. 2019

갯벌에서 사라진 사람들

햇빛이 유난히도 다정하게 내려 앉는 늦가을의 한낮, 구불구불한 마을 길 끝자락에 자리잡은 단층 집에는 오늘도 할머니들이 모여 앉았다. 어느 날은 김치 송송 썰어 넣어 전도 부쳐 먹고 어느 날은 서울 사는 손주가 사온 주전부리도 들고 가고. 지나 가던 마을 청년이 들려서 안부도 묻고 가끔은 밥상에 수저 하나 더 얹어 밥도 얻어 먹고 간다. 시골 마을의 청년이라고 해봐야 어느 새 오십을 훌쩍 넘은 장년이지만, 긴 세월 같이 살다 보니 다 아들 같다. 그렇게 이 마을의 할머니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늙어 간다. 


모여서 하는 이야기는 다 매 한가지. 고향 떠난 자식 이야기, 하루하루 달라지는 건강 이야기, 무심히 세상을 져 버린 친구 이야기, 마을 사람들의 이런저런 신변잡기. 하지만 이 마을의 수다는 가만히 듣고 있으면 예사롭지 않은 어두움이 불쑥불쑥 튀어 나온다. 어느 날 불현듯 떠오른 옛날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왜 그리도 이 마을에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지. 양식장이 먹고 살기 좋다 길래 80년대에 이 마을로 이사온 나름 신참 할머니는 항상 마음이 먹먹했다. 


“처음 시집갔을 때는 대천에서 살다 여기에는 85년도에 왔어요. 여기 한창 사격하고 그럴 때. 김양식 하기에 어장이 참 좋으니까. 김양식 하는 기술을 여기 주민들한테 알려주고 퍼트렸죠.. 처음에는 이게 사격장 옆에 있는 마을인지도 모르고. 와보니까 막 하늘에서 비행기가 쌩쌩, 총알이 막... 무서웠죠, 진짜.” 


1.

뱃일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바다는 한없이 자애로운 은인이자 밑도 끝도 알 수 없는 공포다. 뿌린 씨가 없어도 날이 가고 달이 가면 통통해진 낙지들이 갯벌에서 고개를 불쑥 내밀고, 알아서 먹고 자란 물고기들이 철이 되면 우르르 몰려와서 그물에 걸려든다. 끝없이 베풀어 주는 넉넉한 고향 같은 바다도 맘이 상하면 돌변이다. 날이 안 좋을 때면 집채 만한 파도가 바다 밑바닥까지 다 긁어내며 으르렁거리고, 무언가 인간이 잘못 건드리는 날이면 풍성하던 어장도 씨가 마른다. 그래서 성난 파도에 가족을 잃어보고 텅 빈 채 돌아오는 배를 맞아 본 사람들은 바다가 얼마나 무서운 줄 안다. 


넉넉한 인심을 자랑하는 갯벌이 바로 코 앞인 매향리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대를 이어 고기를 잡는 어부의 마을이었고, 갯벌에서 캐내는 낙지와 조개가 내 자식들 먹고 살 밑천이었다. 굴 따러 가는 엄마를 쫓아나선 아이들은 농섬 주위에서 하루 종일 놀면서 자라났고, 오며 가며 눈이 맞는 청춘 남녀들의 상열지사도 동네 아낙들 사이의 질펀한 우정도 모두 갯벌에서 자라났다. 고마운 줄 알고 무서운 줄 알아서 귀히 대했던 이 바다에 감당하기 힘든 죽음들이 갑작스레 찾아왔다. 
 

미 공군과 미 해병대 부대가 마을 해안에 천막기지를 설치하던 1952년에는 바다에서 일하던 어부의 손이 폭탄 파편에 잘려 나갔다. 해변에 미군 전투기의 격납고 막사가 설치되고 난 후에는 갯벌에서 굴을 따던 소녀의 다리에 폭탄 파편이 박혔다. 1955년의 일이었다. 그 후 소녀는 팔순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된 지금까지도 평생 긴 치마만 입고 살았다. 남에게 내 보이기 싫은, 말도 꺼내기 싫은 흉이 마음에까지 크게 남았다.

 “그때가 사촌누이가 시집가기 전이니까... 그 당시에는 중고등학교도 없고 초등학교도 돈이 있어야 다니는 거고. 바다에 굴 따러 가다가 파편이 와 가지고 맞았어.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불구가 되가지고 시집을 간 거지. 보상을 받은 게 아니라 위로의 말 한마디 없었지. 죄송해요, 한 마디를 듣지 못하고... 그 때는 우리가 무지해서, 아는 게 없었으니까”


미 공군 사격장을 관리하는 기지는 어느 새 천막에서 함석 건축물로 바뀌었다. 이제 곧 떠나갈 군대가 아니라 여기에 오래 남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불발탄을 주워다가 분해하던 동네 아이들 4명이 한번에 죽어갔다. 철없는 장난이 아니라 먹고 살 궁여지책으로 불발탄의 고철을 모으던 마을의 슬픔이었다. 어른들도 불발탄을 줍다가 터진 폭탄으로, 모래 구덩이에서 고철을 모으다가 모래더미에 깔려서, 참 한 순간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화약에 화상을 입거나 엄지손가락이 잘린 정도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마을에 새댁이 있었는데, 굴을 따다가 포탄에 맞아서 죽었어요. 그 방망이처럼 생긴 포탄이 하필이면 임신 8개월 된 새댁 등에 꽂혀 가지고... 그래 가지고 그걸 무마하려고 남편을 사격장의 경비원으로 채용해 줬어요... 그때 사격장 직원이면 마을에서 제일 좋은 직장이었으니까”


마을의 논과 밭 29만평을 강제 수용하고 징발해 정식으로 미 공군 사격장을 만든 1968년 전까지 일어난 사망사고만 해도 이 정도였다. 다른 마을 같으면 한두 번 있을 말까 하는 끔찍한 사고가 이어지니 마을은 줄초상이었다. 까르르 웃고 다니던 아이들이 죽었고 굴을 따러 간 아내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한 개인의 씻을 수 없는 상처였고 한 가정이 평생 짊어져야 할 불행이었고 한 마을이 떠안아야 했던 아픔이었다. 


2. 

다른 곳보다도 훨씬 일찍 굴 양식을 시작한 마을이었다. 이 마을 출신이었던 전직 세무공무원이 사재를 모두 털어 석화 굴 양식 사업이 시작한 것이 1960년, 다들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무상으로 굴 씨앗을 나눠 받은 이들이 너도나도 굴 양식에 나서면서 마을의 경제 상황은 한결 나아졌었다. 나라에서는 훈장을 주고 마을에서는 그를 기리며 공적비를 세울 만큼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 만큼 사격장이 들어서면서 생긴 재산 피해도 컸다. 대대로 물려 받은 땅에다 염전, 신문에 소개될 정도로 비옥한 굴 양식이 있던 마을이지만, 미 공군의 사격장을 설립하면서 어장은 징발되고 본격적인 사격훈련을 하면서 바다 출입까지 통제되었다. 황금어장과 함께 마지막 밥그릇인 갯벌까지 빼앗겼다.


“매일 바다 가서 먹고 사는데 사격장이 들어오니까 한 주에 토요일하고 일요일하고 두 번만 가는 거야. 그 때는 사격은 안 하니까. 세상에 한 주에 그거 두 번 들어가서, 두 번 벌어가지고 먹고 살겠어요? 애들하고, 배를 쫄쫄 굶고 살고. 엄청 고생했어요. 어디 가서 이야기를 할 수나 있나....” 


서글프게도, 죽는 건 재수 없어서 생기는 일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죽는 고통은 한 순간이었지만 배고픈 고통은 참 오래도 갔다. 
 

3. 

생각보다 사람은 불행에 빨리 적응한다. 익숙해진다기보다는 떠난 사람 뒤에 여전히 남겨진 이들이 있기에, 누군가의 억울한 죽음이 있어도 일상은 변함없이 굴러간다. 아니 굴러가야만 한다. 갯벌에서 누가 죽어도 또 다음 날 누군가는 갯벌에서 굴을 따고 낙지를 캐야 했다. 어쩌면 나의 등에도 잘 못 날아온 포탄이 꽂힐 수 있지만, 그렇다고 오늘 내가 쉬면 내 새끼의 뱃속 창자는 정신 없이 요동을 칠 일이었다.  

 

 “바다에서 사람들이 굴 따다가 죽고, 엎드려서 총 맞아서 죽고. 평일에 들어가면 호루라기 불고 경찰들이 나가라고 막 쫓아내고. 쫓아 내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그걸로 먹고 살고 애들 공부시켜야 하니까. 봄에는 바지락 겨울에는 굴인데, 일주일에 오일은 사격을 하니까 조금만 (사격을 쉬는) 시간이 있어도 뛰어 들어가서 하고.... 그러다가 맞는 거죠.” 


흘낏흘낏 자꾸 뒤를 돌아 보면서도 굴을 캐는 호미는 멈추지 않았다. 사격 연습이 한창일 때는 이마저도 허락되지 않았으니, 갯벌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면 최대한 바구니를 채워야 했다. 들어가지 말라는 붉은 깃발이 올라가도 조개 캐기 제일 좋은 물때면 몰래 라도 들어가야 했다. 이마저도 못해서 굶어 죽으나 재수 없어서 포탄에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라는, 자포자기 하는 마음까지도 생겨났다. 절박해진 사람들은 안개도 뭐고 갈 수만 있다면 갯벌로 나섰다. 


“안개가 자욱한 날이었는데, 원래 그런 날은 바다에 들어가면 안 되거든요.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까. 잘못하면 바다로 빠지니까. 근데 같이 바다가 있다가 안개가 너무 껴서 다른 사람들은 다 빠져 나왔는데, 한 명이 나올지 않는 거야. 따는 거에 몰입하다 보니까 물 들어온 것도 모른 거야. 그래서 사람들이 다 모여가지고 꽹과리 막 치면서 막 소리를 쳤어요. 소리라도 듣고 나오라고. 바닷물이 목까지 다 차서 빠져 죽을 뻔 하다가 겨우 살아 나오고 그랬죠.”


4.

그렇게 막막하던 날들. 안 죽고 먹고 살려면 내 목숨을 걸어야 하던 날들이 흘러갔다. 갯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순간순간 걸어 다니는 표적이 된 기분으로 살았다. 살 얼음을 밟고 사는 마음으로 산 세월이 오십 년을 훌쩍 넘다 보니, 긴 세월 이 마을에서 버틴 노인들의 가슴도 너덜너덜이다.

무탈하게 평온하게만 살아도 심장 근육이 힘을 잃어갈 나이인데, 과하게 벌렁거릴 일들이 여기저기에서 내내 터지다 보니 그 긴 세월 견뎌온 심장은 이제 새가슴처럼 졸아 붙었다. 2006년 미 공군의 사격훈련장이 사라지고 나서야 요동치던 심장은 잠시 잠잠해졌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전쟁터로 살아 온 트라우마는 비슷한 작은 소음에도 불쑥불쑥 유령처럼 되살아난다. 


억울하게 먼저 떠나 보낸 생명들이 천국에서 기다린다며 자꾸 손짓하는 듯한 나이가 되었는데, 그 얼마 남지 않은 세월마저 그 아픔을 다시 떠올리며 살고 싶지는 않다. 이제는 그만, 평화롭게만 살아 온 듯 귀하게만 지내 온 듯 연기라도 하면서 살고 싶다는 게, 할머니들의 마지막 남은 소망이다. 이 마을이 다시 지옥 같은 소음 속으로 휘말리는 건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못 본다며, 작은 주먹을 움켜쥔다. 그 주먹에 참 많은 아픔이 깊게 주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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