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성평화지킴이 Oct 29. 2020

매화리에 흰 소금꽃이 피었다

화성시 서신면 매화4리 이장 임덕근


어느 인터뷰보다도 어렵게 잡은 약속이었다. 농사일하고 염전일 하는 작은 마을의 이장이니, 대도시에서 출퇴근하는 사람보다는 시간이 좀 자유롭지 않을까 평일이든 주말이든 큰 상관없지 않을까 생각했던 건 오산이었다. 첫 번째 통화에서는 좀 기다려봐야 일정을 알 수 있다고 했고, 다음에는 일 흘러가는 걸 보고 다시 알려주마 했고, 세 번째에야 그날 일단 와 봐라 허락이 떨어졌다. 


마을에 도착해서도 바로 만날 수는 없었다. 약속시간 바로 전까지도 밭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고 있다가 전화를 받고서야 달려왔다. 일분도 허투루 보내기 아까운 농번기였다. 온통 진흙자국이 남은 작업복을 입은 채 황토가 잔뜩 낀 장화를 힘겹게 벗어내면서야 겨우 숨을 고른다. “담에는 이렇게 바쁠 때 찾아오지 말어… 지금도 고구마 캐서 싣다가 헐레벌떡 왔잖어...” 농촌 물정 모르고 찾아 온 철없는 도시손님이 들어 마땅한 핀잔이었다. 때 놓치면 안 되는 가을걷이 시즌에, 그것도 제일 일하기 좋은 날씨에, 몇 시간이나 붙잡고 이야기나 하자고 찾아 온 이를 쫓지 않고 들여주시는 것만도 감사할 일이었다. 


사실 마을을 둘러싼 염전은 더 없이 평화로웠다. 널찍한 염전에 얇은 바닷물만 찰랑.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물결만 살살 일어날 뿐 바삐 움직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잠시 존재가 잊혀진 듯 숨을 죽인 염전을 살피고 있는 건 따뜻한 햇빛뿐이었다. 그 햇살을 받으며 몸을 데우고 오가는 바람에 수분을 날려가며 둑 안에 갇힌 바닷물은 염분을 높이고 있었다. 세상에나, 염전이라니. 이 복잡한 수도권에 천일염을 만드는 염전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가 몇 명이나 있을지, 그저 신기하기만 한 풍경이었다. 


이장님을 기다리는 동안 마을회관 앞 작은 공터에서 따끈한 햇빛을 쬐며 바람에 너풀거리는 이웃집 빨래를 구경하고 있자니, 염전에서 말라가는 소금이라도 된 양 기분이 포시시 풀어졌었다. 아 햇살 좋다, 한가로운 생각에 빠진 표정을 읽기라도 한 듯 또 한마디 툭 던지셨다. “이 마을에 한나절 놀러 온 사람들은 참 팔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할 꺼요. 허허허. 그냥 바닷물만 가둬놓으면 된다고 알 테니까, 햇볕이 알아서 다 해주는 거 아니냐고 할 테지...” 염전의 고된 노동은 그저 책으로만 배운 도시인의 얼치기 낭만은 수십 년 단련된 염부의 매서운 눈길에 또 단번에 간파되고 말았다. 


하루 종일 해와 바람이 일하고 나면 그 다음은 오롯이 염부의 차례. 바닷물을 증발시켜 염도를 27도 이상으로 올리면 비로소 소금 알갱이가 맺히기 시작하는데, 이 소금꽃이 절정을 맞이하는 게 해질 녘 무렵이다. 그러니 해가 슬슬 넘어갈 준비를 하는 오후 네다섯 시부터 어두컴컴한 밤 아홉 시까지 묵직한 노동이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염전바닥에 생기는 작은 소금 알갱이들을 고무래로 긁어 모으는 대패질부터 시작해, 모은 소금에서 잡티와 이물질을 골라내고 삽으로 쌓아 올려 소금 산을 만든 다음 그걸 또 수레에 담아 창고에 옮기는 일까지 모두 염부의 힘으로 해야 할 일이다. 물론 수확한 소금을 창고에 보관하며 간수를 제거하고 포장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염전이 생긴 게 언제부터인가요?

1950년대 전쟁 후 강원도 평강 철원 쪽 출신 남자들 791명이 처음 이 마을로 들어와서 시작을 했어요. 우리 아버지 세대 때 일할 수 있는 남자들로만 정착한 1세대 어르신들이 등짐으로 돌이랑 흙을 날라서 남양만 바다에다가 직접 제방을 쌓은 거에요. 그렇게 만들어진 염전이 13만 평입니다. 다 만들어져서 소금이 나기까지 거의 10년간은 수입도 없었으니… 다들 구호물자를 받아가면서 힘들게 사셨죠. 제가 바로 이 마을에서 태어난 1호 태생이에요. 제가 54년생이니까 벌써 66년 전 이야기네요. 


공생염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가? 

다같이 살자, 함께 살아가자 그런 뜻이지요. 염전이 완성되고 나서는 자치조합을 만들어서 염전을 나눴죠. 소금창고 1동에 1만 2천평씩. 이 소금창고 한 동을 여럿이 공동소유하고 공동작업하는 방식이에요. 지금은 15개 소금창고 한 동에 4명씩 같이 일을 하고 있죠. 1984년에 외발수레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옛날식으로 소금 한 가마니 분량 100킬로그램을 다 사람이 직접 져서 날랐어요. 우리 조상님들은 원래 지게를 쓰는 게 더 익숙했으니까요(웃음). 


외발수레 쓰는 것도 쉽지 않다고 하던데요?

씨름선수가 와도 제대로 못 끌고 옆으로 픽픽 쓰러지죠. 이게 요령이 있어야 소금을 싣고 다닐 수가 있어요. 간수가 빠지기 전에는 훨씬 더 무거워서 소금 한 가마니 분량이 120~130킬로그램까지도 나가거든요. 일반 사람들은 몇 발짝 움직이는 게 고작이죠. 바다에서 퍼 올린 물을 가두어놓고 한 단계씩 낮은 밭으로 제때 옮기는 것도 그렇고, 비가 오거나 하면 물을 모았다가 염도가 낮아지지 않도록 다시 채우는 것도 그렇고, 그게 다 경험에서 나온 기술이 있어야 할 수 있죠. 


길게 펼쳐진 소금 밭만큼이나 끝이 보이지 않았던 염전 노동은 참 더디고 흔적 없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개미노동이라 불릴 만큼 혹독했던 1세대의 노동 덕분에 염전의 틀이 만들어지고 소금도 맺어지기 시작하면서, 마을에는 머무는 가족이 늘어나고 아이들도 하나 둘 태어났다. 등짐을 지고 아무것도 없는 바닷가에 제방을 쌓았듯 하나하나 쌓아 올린 마을이었다. 어느덧 1세대는 세상을 떠나갔고 그 다음으로 염전을 물려받아 경영한 2세대들도 이제 환갑을 훌쩍 넘긴 노년의 나이다. 그렇게 염전의 70년 역사와 함께 나이를 먹어간 마을. 다음으로 물려받을 3세대는 다들 마땅치가 않은 게 오늘날 마을이 맞이한 현실이었다. 
 

전국에 남아 있는 염전이 별로 없죠? 

경기만, 남양만의 염전은 거의 대부분 사라졌죠. 소래, 오이도, 군자, 시흥, 마도 같은 곳은 공단이나 간척지로 바뀌었고요. 중국산 소금이나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화학소금을 당해내는 게 쉽지가 않으니까요. 겨우 여기 남양만의 염전이 이 마을(서신면 매화리)에 조금 남아 있어요. 


여기에서 나는 소금이 꽤 유명했다던데?

198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는 여기 염전산업이 호황이었어요. 그보다 더 예전에는, 그러니까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1960년대)만 해도 소금이 다 전매품이었어요. 그 때 몰래 빼돌려서 사갔던 소금장수들이 트럭 3대를 싣고 가서 1대만 단속을 피해도 본전은 충분히 건진다고 할 정도였어요. 우마차에다 소금 50가마니를 싣고 나가면 돈으로 1가마니로 가득 채워서 돌아 온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어요.


여기 소금이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염전마다 다 바닷물이 다르거든요. 바닷물의 염도도 다르고 바닷물 성분도 다르고 바닷물이 닿는 갯벌도 다르고. 그게 다 소금 맛으로 나타나는데요. 이곳 염전의 소금은 쓴 맛이 안 나기로 유명해요. 그 맛을 알아보는 단골이 많았죠. 염전 바닥을 장판이 아니라 옹기로 깐 옹기판염을 하고 있는 것도 맛의 차이를 만들어 내고요. 중국산 소금이나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화학소금과는 다른 차원의 맛이죠. 


본격적으로 소금 이야기가 나오자 슬슬 신이 나기 시작했다. 염전 바닥에 흙을 깔아서 하던 토판염 시절의 이야기부터 갯벌이 섞여 들어가 색깔은 거무튀튀해도 더 감칠맛이 있던 옛날 소금 이야기까지, 50년 가까이 소금을 만지고 보고 가꾼 이의 이야기 보따리는 한 번 터지니 멈추지 않는 봇물 같았다. 

 

염전 일을 본격적으로 한 건 언제부터? 처음부터 잘 하셨는지도 궁금한데요. 

스무 살이 되니 아버지가 맡아서 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해에 어머니가 김장한다고 소금 좀 가져 오라길래, 창고에서 제일 하얗고 제일 예뻐 보이는 소금으로 잔뜩 가져다 드렸어요. 어머니는 그동안은 아버지가 거무튀튀한 소금, 못 팔고 갖다 버리는 소금만 가져다 줬는데, 올해는 아들 덕에 좋은 소금 먹는다며 아버지한테 한 마디 하시더라고요.


아버지는 뭐라시던가요? 

올해는 쓴 김치 먹겠구나, 딱 한 말씀만 하셨어요(웃음)… 근데 정말 그 해 김치 300포기가 모두 망했어요. 너무 쓰고 맛이 없어서 지져먹고 끓여서 먹느라 애먹었어요. 이걸 버릴 수도 없고. 그 때 알았죠. 이 소금이 다 같은 소금이 아니구나, 하얗고 눈에 예쁘다고 해서 맛있는 소금이 아니구나. 


같은 바닷물을 같은 염전에서 날려서 만들어도 그때그때마다 소금 맛이 달라진다는 것이 당시 스무 살 청년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일년이면 소금이 거두어들여지는 날이 평균 120일 정도. 그날그날 소금을 거둘 때 마다 날씨와 상태를 적어 놓고 샘플을 만들었더니 120가지의 다른 소금이 나왔다. 그리고 그 해의 김장은 소금 한가지에 배추 한 포기씩, 120가지 종류의 김치로 따로 만들어졌다. 김치를 한 봉지씩 꺼내가며 맛보고 서로 비교해가며, 소금의 상태에 따라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인정해주는 이는 없었지만 나 하나라도 제대로 알고 싶어서 시작한 50년 소금공부였다.
 


날씨에 따라서도 작업이 많이 달라지죠?

수십 년 동안 날씨를 기록하다 보니, 기상청도 부럽지 않은 저만의 기상 데이터가 있어요. 이 때쯤이면 태풍이 오고, 장마가 멈추고, 해가 날 거라는 그런 감이 있죠.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에 일어나서 하늘을 관찰하고 공기를 느껴보면 그날의 날씨 흐름도 대략 예상할 수가 있어요. 거기에 맞춰서 작업을 하면 소금이 나오는 양이 완전히 달라지죠. 그게 바로 노하우에요.


그럼 환경이 달라지는 것도 제일 먼저 아시겠네요?

자연환경이 달라지는 건 정말 대번에 와 닿습니다. 우리는 바닷물을 가져다가 그걸 원료로 소금을 만들어내니 바로 눈에 보이죠. 소금을 만들다 보면 불순물들이 생겨나고, 그걸 이리저리 모아가며 걸러내야 하는데, 그게 염전 한 개 판에서 10킬로그램은 돼요. 그걸 수십 개 판에서 1년 동안 그렇게 버린다고 하면 엄청난 양이죠. 그래서 바다가 얼마나 오염되었는지, 어떻게 달라졌는지, 우리만큼 민감하게 아는 이들도 없을 거에요. 


한창 소금 이야기로 신이 났던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 졌다. 이렇게 달라지는 자연환경으로는 자식 세대에게 이 일을 해보라고 차마 권해 볼 수도 없다며, 마을의 미래가 어찌 될지 미지수라고 했다. 남양만의 오목한 해안선 안쪽에 자리잡은 이 마을의 1호로 태어나서 한번도 마을을 떠나지 않고 줄곧 살았으니, 누구보다도 이곳 바다 사랑이 진할 터였다. 바다가 곧 마을의 식량이었고 젖줄이었던 칠십 평생을 살았으니 바다가 각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다가 그렇게 많이 달라졌나요?

한 15년 전만 해도 바다 도랑을 더듬어서 구멍 하나만 찾아도 이만한 망둥어가 우수수 나왔어요. 그 비싸다는 맛조개도 한 시간만 잡으면 빨간 함지박 큰 걸 가득 채웠죠. 6, 7월이면 맛조개가 참 맛있거든요, 염전 청소하고 나서 잠깐 틈만 내도 잔뜩 잡아서 젓갈을 담갔어요. 지금은 열 구멍을 찾아도 망둥어 한 마리가 겨우 나와요. 5월 중순쯤 물 받으려고 수문을 열면 갑오징어가 떼로 들어왔어요. 물 들어가는 동안 망에 걸리는 실치만 해도 장정 네 명이서 실컷 먹을 만큼이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실치가 안 들어오고 어렸을 땐 많이 보이던 작은 새우도 안 들어오기 시작했죠. 


군 공항이 들어온다는 말에 더 걱정이 되시겠어요? 

군 공항이 들어온다는 건 이 마을에서 더 이상 염전을 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그게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되겠습니까? 갯벌이며 바닷물이며 서로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는데요. 공항이 들어오면 이쪽 바다의 환경이 나빠지는 건 당연하지 않겠어요? 환경이 조금만 달라져도 이렇게 바뀌는 게 염전의 소금인데, 여기 바다가 더 망가지면 소금은 뭐 말할 것도 없죠. 지금 상태의 바다라도 지키려면 그건 안 될 말이죠. 


긴 인터뷰가 끝나고 사진을 찍을 때에도, 이가 다 빠져서 마스크 쓰는 게 더 편안하다는 그였다. 오십 년 짠 내 나는 노동의 시간마다 어찌나 지독하게 이를 앙다물었을까, 제 몸집보다 더 무거운 소금 가마니를 지고 끌면서 이를 악물었던 순간이 얼마나 길었을까. 그래도 망가진 바다 걱정에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던 그의 얼굴이 내내 떠나지 않았다. 평생을 바쳐 기록해온 천일염 제조의 노하우를 물려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그의 노년을 아쉽게 했다. 


그에게 염전은 가득 펼쳐진 바다였다. 한껏 응축된 바다였다. 그 안에서 끝없이 퍼주고도 한없이 남는 풍성한 바다를 보았고, 조금씩 변해가는 바다도 보았다. 그렇게 바다를 달래고 어르고 날려가며 소금을 거두었다. “내가 만든 소금은 참 좋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내가 만들 소금이 좋을 것이다 라고 변함없이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조금씩 두렵다. 몇 달 소금농사를 단번에 망쳐버리는 태풍도 장마도 이 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하늘이 무서운 줄 알아 내내 움직임을 살피고, 바다가 귀한 줄 알아 내내 흐름을 살폈던 일흔 살 염부가 평생을 교훈 삼아 부탁하는 말이다. “이 바다, 좀 지켜주소”


작가의 이전글 젊은 청춘들의 꿈을 담은 어촌의 미래를 만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