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라이프 13화. Wurzeln und Flügel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고 추구하는가?
나는 부모로부터 무엇을 물려받았나?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위의 두가지 질문에 이렇게 답하겠다.
낭만과 근본 있는 삶.
지금껏 살아오니 나의 인생을 이루고 지탱하는 틀, 즉 어떠한 삶의 골격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에게는 그 뼈대가 낭만과 근본이다.
초등학생 때 아빠는 우리 삼남매를 데리고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를 갔다. 나의 첫 유럽 여행이었다. 아빠가 힘있고 한창이던 그 시절, 작고 어린 우리에게 무엇을 경험하고 느끼게 하고 싶었는지 더욱 절감하는 요즘이다.
이후 살면서 또한번의 유럽행과 그외 나라들을 숱하게 다녀봤지만 어린날 첫 경험은 평생의 자양분으로 남아있다. 무시무시한 호랑이 아빠와 솜털뭉치 호랑이 새끼들이었던 시절. 이젠 우리가 그때의 아빠만큼 컸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어느 겨울밤, 만화책을 반납하러 가야 했다. 나는 어릴 적 동네 상가건물에 있는 만화책방에서 항상 몇권씩 대여해오곤 했다. 그날 엄마는 나 대신 만화책들을 반납해줬다. "밖에 춥다. 엄마가 갖다주고 올게~"
만화책을 건네주며 물었다. 엄마는 왜 다른 엄마들처럼 만화책 보는 걸 혼내지 않느냐고. 당시 보통의 학부모들은 공부와는 거리가 먼 만화책을 금기시하는 풍조였다. 만화책은 방에서 부모님 몰래 읽어야 하는 어떤 것이었다.
오히려 상상력과 표현력이 풍부해지지 않아? 그리고 네가 워낙 혼자 그림 그리고 TV에서 만화 보는 걸 좋아하니까. 엄마는 내 질문에 되려 의아해하며 답했다. 만화 보는 행위를 시간 낭비로 치부하거나 학업 방해물로 여기지 않고, 순수하게 딸이 좋아하는 대상으로 받아들이다니. 웹툰작가 김풍이 언젠가 낭만에 대해 한 말이 떠오른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해당 전체 영상은 여기 클릭)
"낭만은 낭비를 해야 한다고 봐요. 어떠한 낭비가 있어야 돼. 시간이든지 뭐든지. 효율적인 것을 하는 삶과는 괴리가 있어야 돼요. 낭만을 하려면 '저걸 왜 해? 무슨 도움이 된다고' (싶은 걸 해야 돼). 연애를 왜 합니까. 연애하면 돈 쓸 일만 있는데 왜 해. 좋으니까! 낭만이란 그런 거예요. (...) 낭만을 찾는다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좋아하는 걸 찾아야 돼요 결국엔."
60평짜리 우리집은 어린 나에겐 참 넓었다. 침실 안에 방이 더 있고 그 안에 또 작은 발코니가 있었는데, 나는 하루에 몇시간이고 그곳에서 혼자 놀았다. 발코니는 내가 이름을 붙여주고 영혼을 불어넣은 장난감 인형 친구들로 가득했다.
다른 엄마들이라면 왜 넓은 집 놔두고 맨날 구석에서 혼자 그러고 있느냐며 타박을 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내 방은 따로 있었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내가 만든 작고 소중한 세계와 그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이해하고 존중해줬다.
남 눈치 보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자유롭게 누리는 삶.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이나 효율과는 거리가 멀지라도 내 안을 진정으로 풍부하게 채우는 삶. 남들과의 속도 경쟁에서 벗어나 나만의 행복을 즐기는 삶. 그 뿌리에는 이 같은 엄마의 양육 방식이 있었다.
클래식의 나라인 독일에 살다보니 꽤 오래 피아노를 치고 바이올린을 배웠던 기억도 자주 떠오른다. 아빠는 친구분들을 집에 초대한 날이면 이따금 내게 피아노 한곡을 요청하곤 했다. 그땐 그게 너무 싫었는데 지금은 뭉클하게 느껴진다.
아, 우리 아빠가 피아노 선율을 좋아했구나. 집에서 내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은근히 좋아하셨지. 특히 타이타닉 주제곡 연주하는 걸 좋아했어. 겉으로 티는 안냈어도 아빠에겐 우리가 자부심이었구나.
지금도 우리집 거실에는 여전히 그 피아노가 있다.
엄마는 산책하다 예쁜 꽃잎과 낙엽을 발견하면 주워와 수반에 동동 띄운다. 추억이 담긴 사진들은 인화한 뒤 액자에 넣어 장식한다. 마음을 울리는 노래를 들으면 푹 빠지고 흥이 오르면 춤을 춘다. 그녀는 언제나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낸다.
이런 엄마도 특히 엄격한 부분이 있었다. 아니, 사실은 겉보기에 소녀감성인 것과 다르게 강단있고 화끈한 사람이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고, 할 거면 확실하게 해야 한다. 알고 보면 진짜 호랑이는 엄마다.
어렸을 때 '짜증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가 하루는 엄마한테 호되게 혼난 적이 있다. 계속 불평불만하면 진짜로 짜증나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거였다. 말 한마디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엄마는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도 제대로 가르쳤다.
엄마는 누군가 나에게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주면 바로 고마운 마음을 진실되게 전한 후 잊지 않고 꼭 은혜를 갚는 태도를 매번 역설했다. 실제로 엄마 자신이 그런 분이셨다. 그런 엄마를 보고 배운 덕일까 지금 내 주변에는 귀인들뿐이다.
삼십년 넘게 살다보니 나의 호의를 마치 자신의 권리인 줄 아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당연하게 받기만 하는 사람, 고마움 모르고 거지근성이거나 염치없는 사람을 보면 딱 이 생각이 든다. '근본 없네' 아무리 겉모습이 잘났어도 내면의 가난한 본질이 드러나면 가차 없이 잘라낸다.
'개념 없네' 혹은 '상식 없네' '예의 없네'도 아니고 근본까지 없다고 느끼는 게 웃기지만, 내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빠는 이 나이에도 암벽등반을 가고 몇년 전엔 히말라야와 아프리카도 다녀왔다.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가까이에 직접 마당 있는 집도 지었다. 늘 그곳을 우리 삼남매를 위한 멋진 보금자리로 만들고 싶어 하신다. 그는 매일밤 맥주 한캔과 함께 영화 명작들과 축구 경기를 챙겨 본다.
클래식뿐만 아니라 축구의 나라이기도 한 독일에 오니 또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하루는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남자애가 "이번 주말에 아버지 또 안나오셔?"라며 두 눈을 반짝였다. 주말에 우연히 남학생들이 우리 아빠랑 같이 축구를 하게 됐는데, 너무 빠르고 잘하셔서 오랜만에 진짜 재밌었다는 거다. 이후로도 그 친구는 이따금 아빠 안부를 물으며 함께 시합할 날을 고대하곤 했다. 이것이 진정한 낭만 축구 아닌가?
아빠는 언제나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잘해야 한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가르쳤고 진정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당신의 자식들이 살아가면서 이처럼 중요한 정신을 절대 잊어서도, 잃어서도 안된다고 말이다. 약고 악한 인간이 판 치는 세상을 살아가며 아빠의 가르침을 원망한 적도 많다.
어쨌거나 이런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자랐으니, 나의 피는 낭만과 근본으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낭만이 전혀 없거나 본바탕이 올곧고 진솔하지 못한 사람은 본능적으로 곁에 두지 않나보다.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두가지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뿌리와 날개다.
Zwei Dinge sollen Kinder
von ihren Eltern bekommen.
Wurzeln und Flügel.
문득 생각해보니 독일의 대문호이자 철학자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이 문장과 일맥상통하다.
괴테는 인간의 성장을 위한 중요한 두가지 요소를 뿌리와 날개로 비유했다. 뿌리는 자신이 속한 정체성과 본질, 가치관, 전통, 문화 등의 기반을 의미한다. 날개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용기와 창의력, 자립심, 잠재력을 뜻한다. 바로 나의 부모가 한평생 내게 물려준 두 알맹이다.
깊고 단단하게 내린 뿌리가 나를 지탱해주고, 그 힘을 발판 삼아 자유롭게 꿈꾸고 모험하는 것.
내가 독일에서 살고 있는 이 시간은 필연임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