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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rikim Nov 23. 2022

시간은 빠르게 혹은 더디게 흐른다

저 얼마나 더 살 수 있나요?

오늘 완독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라는 책은 정말 어려운 책이었다. 어려운 책이 읽고 싶어 골랐던거라 만족스럽다만- 책에 대한 독후는 시간이 많이 남을 때 천천히 쓰기로 하고, 오늘은 시간에 대한 일기를 짧게 쓰고자 한다.


하루가 모자라도록 열심히 사는 친구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매일 맛있는 떡볶이나 먹으러 다니고 놀기 바빴던 어린 시절의 우리는 다 어디가고 서로 날짜를 잡고 잡아야만 만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그만큼 시간을 쪼개쓰는 우리 어른들은 왜 시간이 없고 매일같이 발을 종종거리며 살고있는지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시간이 빠르다, 없다, 더디다, 많다 등 시간에 대해 표현하는 우리들의 말에는 기준이 모호하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어떤속도로 흘러야 빠른것인지? 또는 몇분, 몇초가 없어야 시간이 없는것인지? 이런 가이드가 없고 우리는 늘 시간에 쫓겨산다. 그리고 잠시 멈추어 심호흡을 해본다. 정말 시간이 없는 것 맞아? 


나에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아 있는지 모른다. '나에게 남은 시간' 이라는 말은 참 여러가지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내가 고민하고 있는 사회에서 쓸모있는 디자이너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 즉 내가 아닌 타인이 판단해주는 시간이 있다. 나이로 책정이 되는 타인이 판단해주는 시간에 대해 생각해보려면 마음이 쓰리다. 100세 시대에 고작 30대 중반을 달리는 나에게 나이가 너무 많다는 피드백이 돌아올때면, 나이가 많다는 기준은 또 어디에서 오길래 이런 부당한 판단을 하느냐고 화가 나기도 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내 생명이 붙어있는 기간이라 하겠다. 당장 내일 내 생명의 끈이 끊어진다면, 내 시간은 참 부족하고 빨리 흘렀고, 내게 시간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 for 이 붙어서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봐도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조금 더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고민해보자면 물리적으로는 '나에게 남은 시간'에 따라 연필쥘, 타자칠 체력이 없어질때까지, 내 뇌가 명을 다해 알츠하이머를 앓기 전 까지 나는 공부를 계속해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다른 일에 의해 시간적 여유의 부족에 의해 공부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없을 수도 있겠다.


24시간을 하루로 칭하는 것, 하루가 모여 일주일이 되는 것 등. 우리가 소통을 위해 함께 쓰는 단위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총량에 대해서는 누구도 가늠을 할 수가 없다. 독서가 하루 혹은 한달이 걸린다고 해도 그 시간이 결코 짧거나 길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물론 보편적인 시각에 따라 그래보인다고 느낀점을 이야기하거나 유추를 할 수는 있겠으나 단언은 어려운 것이다. 독서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거나, 좋은 감상을 얻고, 경험을 하는 가치를 시간과 견주어 놓고 한달이라는 시간을 쓰기에는 아깝다거나, 모자란다거나 하기에도 기준이 모호하다. 


가성비, 실용주의에 갇혀 정작 시간의 진정한 의미를 놓치고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타인의 삶을 한가지로 규정하려 한다며 <30대에 해야하는~> 류의 책을 극도로 싫어하면서 정작 나는 도착점도 없는달리기를 계속 하려는 것 같다. 그러니 매일이 버겁고 어려운 숙제처럼 느껴지는 것 아닐까. 


내 시간에 귀기울여본다. 


잠을 줄여 쓰는 이 일기의 시간이 아까운 시간이었을지, 소중한 찰나의 시간이었을지는 강림차사가 내 이름을 불러 이승에서의 내 시간이 종료된 시점에야 흐릿하게 판단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때가 된들 명확하게 알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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